2024년 4월 24일 (수)
(백) 부활 제4주간 수요일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전례ㅣ미사

[사순부활] 부활 대축일의 예절, 상징과 풍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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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7-02 ㅣ No.690

[전례와 상징] 부활 대축일의 예절, 상징과 풍속

 

 

부활은 신비이다. 교회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밤(부활성야)에 구원의 신비에 감추어진 모든 이야기를 집중시키려 한다. 즉 말과 상징의 언어를 총동원한다. 부활 예절이 추구하는 이 상징들을 크게 넷으로 나누면 빛과 물과 찬송과 알렐루야이다.

 

부활 성야의 예절 순서를 보면 다음과 같다. 제1부 빛의 예식, 제2부 말씀의 전례, 제3부 성세 예식, 제4부 성찬의 전례이다.

 

빛의 예식에는 불 축성과 초 준비가 있다. 이 모든 예식은 밤에 거행된다. 즉 밤이 시작되기 전에 시작하지 말고 주일 날이 밝기 전에 마쳐야 한다. 이 밤은 오랜 관습에 따라 주님을 기억하는 밤이고 루가 복음(12,35)의 권유에 따라 동불을 밝혀 들고 주인을 기다리는 충성스런 종처럼 깨어 준비하는 밤이다.

 

불의 축성은 고대 로마 전례에는 없었다. 아마도 프랑크 지역의 이교적인 봄맞이 불로 잡신에게 풍년과 다수확을 기원하던 관습에서 나왔을 것이다. 빛은 고대인들에게 가장 귀중한 신(神)의 선물이었고 이스라엘 백성 역시 야훼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으로 생각하였으며 그리스도인들도 촛불에서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았다. 촛불은 자신을 소모하여 빛과 따스함을 준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자신을 희생하여 세상에 빛과 사랑을 주셨다. 불을 축성하여 부활초에 붙이는 것도 자신을 봉헌하는 빛의 상징이다.

 

부활초는 초기부터 로마와 기타 지역에서 부활 성야를 밝히는 데 사용하였다. 이 초는 스스로의 빛을 통하여 죽음의 밤에서 부활한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원래는 사람 키만한 두 개의 초를 사용했었다. 빛의 예식은 부활초의 품위와 상징을 표면에 나타낸다. 십자가 표시는 그리스도를, 알파와 오메가는 시작과 마침 또는 영원을 뜻한다. 그 해의 연수는 인간의 시간 생활을 하느님의 영원한 계획 속에 연결하고 있다. 다섯 개의 붉은 향덩이는 예수님의 다섯 군데 상처(五傷)를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광명”을 노래하며 촛불을 붙여 행렬함은 그리스도의 말씀 자체를 연상케 한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라오는 사람은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요한 8,12). 또 다른 의미는 구약 성서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종살이하던 에집트를 탈출하여 밤길을 가면서 비추는 횃불을 연상케 함이다. 주님이 몸소 밤길을 비추며 앞서 가신다. 그분은 죄악의 어둠을 몰아내는 불기둥이시다. 신자들이 촛불을 들고 뒤따를 때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는 예수님 말씀이 들린다.

 

부활 찬송은 밤과 빛의 대조를 구체적으로 제시하며 하느님과 세상의 만남, 승리자로서의 하느님, 암흑의 세상에 파견된 빛이신 그리스도를 묘사한다. 세상이 구세주를 주범(主犯)으로 판결하고 진리와 사랑을 사형에 처했지만 부활을 통하여 빛이 승리를 거둔다. 부활 찬송은 주님의 부활을 알리는 기쁨의 노래이며 부활 예식의 정점이다. “…영원한 대왕의 광채 너를 비춘다. 비춰진 땅아 모두 깨달으라, 세상 어두움 사라졌다…”

 

 

성수 축성

 

초기 그리스도교는 부활 주일에 세례를 주었다. 그러나 지금은 준비가 되면 언제라도 예비자에게 세례를 준다. 이때 성세수를 사용하는데 부활 성야에는 성세 준비자들이 없더라도 성세수는 축성된다.

 

물은 낙원과 풍요를 연상하게 한다(물의 상징성은 1월호 110쪽을 참조). 성세수는 부활초를 세 번 물에 담가 축성한다. 셋이란 수는 완전을 뜻하고 성스러운 숫자로 사용된다. 물은 세탁, 풍요, 소생, 생동의 힘을 가지고 있다. 세례를 받을 때 십자가 희생을 통하여 은총의 샘물이 흐른다. 세상의 값진 원천은 십자가와 죽음에서 나온다. 성수 축성 때에 부활초를 물에 담그는 것은 하늘과 땅이 상징적으로 결합하는 뜻이다. 태양 빛을 반사하는 세상의 물에서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아름다운 면모를 이미 체험하고 있다.

 

 

알렐루야

 

사순절 동안 보류했던 알렐루야를 오늘 밤 다시 노래한다. 힘을 다하여 아름답고 즐겁게 하느님을 찬미한다. 부활 찬송, 부활 성가, 알렐루야 등의 노래는 근본적으로 기쁨의 표현 이외 별다른 것이 아니다. 진정한 기쁨의 노래는 인간 이성의 벽을 뚫고 무아지경에 이르도록 한다. 여러 성가 중에서 알렐루야가 가장 순수한 마음의 표현이 아닌가 한다. 알렐루야란 원래 “하느님 야훼를 찬미하다”란 뜻이다. 그러나 이 밤 예절에서는 더 깊은 뜻을 담고 있다. ‘알렐루야’는 번역될 수 있는 한 단어가 아니라 기뻐서 형언할 수 없는 상태의 자기 표출이다. 말이 필요없고 기뻐 용약할 뿐이다. 사순절 동안 절제했던 대영광송과 쇠종도 함께 즐거이 울려 퍼진다.

 

 

부활 시기

 

그리스도의 빠스카 신비는 2세기 초반부터 빠스카 성삼일 뿐만 아니라 그 다음의 7주간 또는 50일간을 감사와 기쁨 속에서 경축되었다. 사도행전(2장)의 성령 강림도 빠스카 신비의 결과로서 이해해야 한다. 부활하신 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성령을 받도록 하셨다. 이 부활시기에는 모두 감사의 정으로 알렐루야를 노래하고 단식을 금하며 무릎을 꿇지 않고 기도하였다.

 

부활초는 부활 축일부터 성신 강림 주일까지 제대 주변에 세운다. 50일 동안은 마치 하루의 축일 또는 하나의 ‘큰 주일’ 같이 기뻐 용약하며 지내게 된다고 가르친다. 예수님은 40일간 ‘여러 날 동안’(사도 13,31) 발현하셨다. 승천하시기 전 40일이란 정확한 역사적 시간이 아니라 상징적 숫자이다. 오랫 동안의 시간, 거룩한 기간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40일의 기능은 예수의 시간과 교회의 시간을 이어주는 계속성이다.

 

부활 시기의 첫 8일간을 부활 8일 축제라 한다. 이 8일간의 예절은 단지 빠스카 신비뿐만 아니라 새 영세자들을 많이 고려하였다. 초기 신자들은 모두 8일간 노동을 하지 않았고 미사 참여의 의무가 있었다. 또 이 주간은 ‘백색주간’ 또는 ‘흰옷 입는 주간’이라 하였다. 그래서 그 다음 주일을 ‘사백(?白)주일’이라 하여 입고 있던 흰옷을 벗었다. 지금은 사백주일 대신 부활 제2주일이라 한다.

 

 

부활 음식 축성

 

유럽의 부활 축일 미사 중에 빵과 고기와 소금을 축성하는 예절이 남아 있다. 즉 40일 재의 기간이 끝났으니 하느님이 주선 음식을 즐기자는 뜻이다. 금육과 단식이 철저히 시행되던 중세기에는 고기만이 아니라 우유와 달걀도(1966년까지) 금육재에 포함되었다.

 

로마의 히뽈리뚜스(215년)가 여러 가지 곡식 축성에 관한 기록을 남긴 것으로 보아 부활 음식 축성은 꽤 오래된 관습인 것 같다. 7세기부터는 여러 가지 음식과 식료품을 축성하는 풍습이 생겼다. 성찬의 전례 후 축성된 음식을 집에서 가족과 함께 먹었다.

 

 

부활 달걀

 

부활절은 새 삶의 축일로서 축복을 주는 시기이다. 달걀은 옛부터 보이지 않는 생명의 상징물이었다. 그래서 신의 능력이 미친 생의 상징으로 알았다. 그리스도인들은 달걀을 부활의 상징으로 여겼다. 달걀의 색깔은 이미 로마 시대에도 종교적이고 마술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로마 시대의 무덤에는 죽은 이를 위하여 부장물로 들어가기도 하였다. 지역에 따라서는 눈사태나 급류를 막는 부적처럼 사용되었다. 원래 부활 달걀은 붉게 물들여졌었다. 붉은색은 승리의 색으로 즉 죽음을 쳐 이긴 새 삶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 후 부활달걀의 색은 예술적인 묘사로 발전하였다. 그림이나 종교적 또는 익살스런 표현도 나왔다. 부활 달걀을 선물하는 풍습은 17세기 수도원에서 시작되어 일반인들에게 퍼져나갔다. 그림 달걀은 풍요의 상징 또는 선물로서 알맞기에 부활 축일에 달걀 축성을 받는 사람들이 많았다.

 

 

부활 토끼와 양

 

중세기에는 여러 가지 모양으로 빵과 과자가 만들어졌다. 이때 양, 닭, 토끼 등 짐승을 소재로 만들어진 것을 신자들이 성당으로 가져와 부활 음식과 함께 축성을 받았다. 양고기를 먹던 옛 관습에서 어린 양의 모양은 구세주(천주의 어린양)를 상징하였다.

 

특히 부활 토끼는 어린이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토끼는 중세기 신의 상징으로, 고대에는 신이 상주하는 짐승으로 여겼다. 즉 토끼는 눈 뜨고 자는 동물로 죽음의 잠에도 압도되지 않은 부활하신 주님의 상징이 되었다.

 

[경향잡지, 1988년 4월호, 안문기 프란치스꼬(대전 선화동본당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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