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9일 (금)
(백) 부활 제3주간 금요일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전례ㅣ미사

[미사] 독서, 성가, 전례의 소프트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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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두호 [event] 쪽지 캡슐

2005-07-31 ㅣ No.389

   월간지 사목 1998년 12월호에 기고한  

 청주교구 이현로 토마스 데 아퀴노 신부님의 

"전례의 소프트웨어들" 이 있습니다.

  ① 마이크 사용법
  ② 독서는 느리게, 성가는 빠르게
  ③ 쉬운 성가로 합시다.
  ④ 각본대로 하세요

 

  (아래는 그 내용 가운데 발췌했습니다)

 
  마이크 사용법


 마이크 성능이 다소 떨어지거나 또는 발성자의 음성이 그리 좋지 않더라도,

 효과적으로 음향을 전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발성자가 사용할 때마다 마이크의 거리를 잘 조절하는 일이다.

 다시 말해 참석자가 스피커를 통해 소리를 무리없이 가장 잘 들을 수 있도록

 발성자가 마이크 거리를 적절하게 조절해 주는 일이다.

 마이크 거리가 적당하지 않으면 내용을 전달하거나 기억시키는 데 많은 결함이 생길 수밖에 없다.

 때때로 사용자들이 마이크 거리를 잘못 잡아 값비싼 음향 기기를 무용지물로 만들 때가 많다.

 유의할 것은 마이크를 사용할 때 발성자 또한 자신의 목소리를 이중으로 듣고 있다는 점이다.

 하나는 스스로의 입 안에서 공명하는 소리가 자신의 귀에 들리는 소리며,

 또 하나는 스피커를 통해 들려 오는 소리다.

 실제 시험에서 얻을 수 있는 결과는,  발성자가 듣기에 스스로 내는 소리 크기와

 스피커를 통해 들려 오는 소리의 크기가 거의 같도록  마이크 거리를 잡으라는 것이다.

 여기서 또 한 가지 고려할 점은 바람직한 마이크 거리가 발성자의 음색과 음량,

 장소의 여건, 청중 수 등에 따라 그때그때 달라진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어떤 장소에서 마이크를 사용하기 시작할 때, 위 원칙을 염두에 두고 처음 몇 마디 해 보면

 곧 바로 그 장소에 알맞은 크기의 소리를 얻을 수 있는 마이크 거리를 알아낼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적절한 마이크 거리를 찾아내는 이 연습은 주례자와 해설자, 독서자,

 그리고 보편 지향 기도를 담당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해 두어야 할 것이다.


 독서는 느리게, 성가는 빠르게


 많은 경우 독서자들이 성서 본문을 읽어 가는 속도가 지나치게 빠르다.

 대중 앞에 서 있다는 사실이 독서자들에게 심적 부담을 주어,

 결과적으로 독서자들은 ‘빨리 읽어 치우고 내려 가고자’ 하는 심리를 지니게 된다.

 하느님의 말씀이 정중하면서도 정확히 읽혀지고 들려야 한다는 사실은 머리 속에만 남아 있을 뿐이다.

 특히 성서 본문에는 발음이 곤란한 지명이나 인명, 또 일상 생활에서 잘 쓰이지 않는 용어가

 많이 나온다는 사실을 염두에 둘 때, 독서는 반드시 천천히 해야 한다.

 독서는 느리게! 독서를 천천히 할 수 있는 실제적인 방법이 있다.

 독서하는 사람 자신이 ‘너무 느리게 읽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의 속도로 독서를 하라는 것이다.

 이러한 마음으로 연습을 자주 하고,

 또 실제로 그렇게 독서를 하면 듣는 사람들이 독서의 내용을 따르기가 쉽고,

 또 그 내용을 마음으로 듣게 된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성가는 독서의 경우와 거의 정반대다.

 

 많은 성당에서 성가대가 어지간히 노력하지 않으면,

 전례 대중의 성가 속도가 고무줄처럼 늘어지기 십상이다.

 특히 성가대 없이 성가를 부를 경우 더욱 그러하다.

 성가가 근본적으로 찬미의 성격을 지니고 있으며,

 찬미라는 성격은 어느 정도의 빠른 속도를 전제로 한다고 보아야 한다.

 물론 성가마다 정해진 제 속도가 있긴 하지만, 일반적으로 그 속도가 잘 지켜지는지를 판단하기가 어렵다.

 언제나 ‘왜 이렇게 빨리 부르나?’ 할 정도의 속도로 성가를 부르도록 전례 대중을 연습시키는 일이 바람직하겠다.

 

쉬운 성가로 합시다


 아마도 한 해에 쏟아져 나오는 대중 가요의 수가 엄청날 것이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이른바 ‘뜨는’ 곡이 정해져 있다는 것이며,

 더욱 흥미로운 것은 곡을 ‘뜨게’ 하는 사람이 가수나 작곡가가 결코 아니라는 사실이다.

 결코 전문가라 할 수 없는 일반 대중이 어느 곡이 ‘떠올라야’ 하는지를 아주 기막히게 잘 알고 있다는 말이다.

 성가도 마찬가지다. 성가집에서 애창되는 곡들이 있기 마련이다.

 신앙심을 잘 표현해 주거나 잘 이끌어 주는 성가가 어떤 것인지 이미 신자들이 아주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곡들은 대부분 부르기에 좋고 쉬운 법이라 억지를 써 가며 가르칠 필요가 별로 없다.

 전례 특히 주일 미사 때에는 ‘반드시’ 그러한 곡들로 성가가 선정되어야 한다.

 부르기가 어렵거나 잘 알려지지 않은 곡들을 전례 성가로 골라야 할 필요가 어디 있는가?

 음악성이 어떻고 전문성이 있느냐 없느냐는 것은 전적으로 전문가라는 사람들의 이론일 따름이다.

 전례가 전문가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과,

 또 진정한 전문가는 일반 대중이 무엇을 사랑하는지 또 그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았으면 한다.


각본대로 하세요


“모두 일어서시겠습니다.” “모두 일어서십니다.” “모두 앉으십니다.” “가톨릭 성가 59번을 부르시겠습니다.”

전례 중 흔히 듣는 해설자의 안내문들이다. 맞는 표현들일까? 과공(過恭)은 비례(非禮)라 했다.

겸손하겠다는 뜻은 가상하지만, 우리 말 어법에 어긋난 잘못된 표현들이다.

“모두 일어서십시오.” “모두 앉으십시오.” “가톨릭 성가 59번을 부르겠습니다.”

라고 하는 게 옳고 또 그것으로 충분하다. 단순하고 간결한 표현으로 안내될 때의 전례 분위기와

이런 저런 군더더기가 붙을 때의 전례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어느쪽이 정중하고 경건할까?

성삼일 예절 등 특별한 전례에서 해설자가 잘못 안내할 때가 가끔 있다.

예를 들어 해설자가 “모두 일어서십시오.”라고 했는데 사실은 계속 앉아 있어야 할 때라 하자.

복잡한 예절을 주례하느라 신경이 곤두서 있는 주례자가 냅다 호통을 친다(오, 그 무례함이여!).

또는 반대의 경우도 있다. 주례자가 성급한 마음에 해설자의 몫을 가로 챌 때가 있다.

이때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주례자마저 틀렸을 때다(오, 그 무색함이여!).

본당에 있을 때, 성삼일 동안 날마다 전례를 시작하기 전 모든 준비를 마친 다음,

해설자와 수녀님, 복사 단장을 불러 마지막으로 하는 말이 있다.

틀려도 전례적으로 멋있게 틀리자.” 일어서야 하는데, 모두 앉으라 했다면 앉아 있게 해 두는 것이다.

앉아 있어야 하는 데 일어서라 했다면, 다시 정정하지 말고 한 번 말한 대로

진행해 나가자는 원칙을 강조하는 셈이다.

하느님 앞에 조금 틀렸다고 뭐 그리 큰일날 일인가?

예절상의 순서나 규칙이 다소 틀렸다 해서 인상을 쓰며 바로잡는 일이

도리어 전례의 전체 분위기를 망친다면 과연 그것이 전례 정신에 맞는 것일까?

그렇다고 마구 틀려도 좋다는 것이 아니다. 가능한 한 정해진 각본대로 하자는 것이다.

다시 말해 전례부원 모임이나 회합을 반드시 정기적으로 하자는 것이다.

어떤 전례든 전례로서 드라마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다.

한 편의 드라마를 완성하기 위해 각본을 잘 짜고 그 내용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전개되어 나가도록

연출자들이 미리 손발을 잘 맞추자는 것이다.

가끔 본당에서 사목자들이 그 동안의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아무런 사전 모임이나 준비 없이 중요한 전례를 진행하는 경우가 있다.

‘다 그렇고 그런 것’이라는 마음으로 전례를 시작했으니,

그 전례의 분위기는 ‘다 그렇고 그런 것’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특히 해설자를 위한 안내문들의 표본을 어법과 사정에 맞게 준비해 놓을 것이며,

전례부원 모임 등을 가짐으로써 자주 전례 실무를 가르쳐야 할 것이다.

또 그 기회에 준비된 말이나 행동 외에는 해설자나 주례자가 불필요한 설명을 달지 않도록 자주 환기시킬 일이다.


비신자를 위한 배려


전례 역시 하나의 중요한 신앙 고백이다.

교회 역사를 더듬어 보면, 모든 예절이나 기도문(로마 1, 3-4; 필립 2,6-11 등 참조)은

언제나 신앙을 고백하고 증언하는 역할을 해 왔다.

이 사실이 특히 배려되어야 할 때가 바로 비신자들이 많이 참여하는 전례(대개 미사)를 거행할 때다.

좀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자면, 혼인 미사와 장례 미사 그리고 입교 예식 미사 때라 하겠다.

전례의 집전자나 해설자는 반드시 비신자를 염두에 두고 전례를 거행하고 진행시켜야 할 것이며,

특히 비신자의 참석 가능성이 많은 전례의 해설이나 안내문은 좀더 교육적이고 신앙 선포적이어야 한다.

중요한 부분이 시작되기 전 간단한 해설을 덧붙여

비신자들이 그 뜻을 어느 정도 알아들을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또 비신자들이 전례 동작 특히 일어서거나 앉는 것,

봉헌 행렬이나 성체 행렬 때문에 당황하지 않도록 적절히 안내해야 한다.

전례적으로 잘못일지 모르겠지만, 혼인 미사 때 신랑 신부 외엔 모든 참석자가

처음부터 끝까지 정숙히 앉아 있도록 하는 것도 생각해 볼 일이다.

실제로 그렇게 해 본 결과, 참석자를 무리하게 일어서고 앉히려 하는 것보다

훨씬 더 전례 분위기가 좋았고 특히 혼인 성사의 집전자인 신랑 신부를 돋보이게 하는 데 많은 효과가 있었다.

장례 미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불편한 상복 차림의 유가족과 친지(그 중에는 비신자가 늘 있기 마련이다.)들이

일어서고 앉을 때 겪는 어려움을 덜어 주기 위하여

시작부터 끝까지 조용히 앉아 있도록 하는 것이 그렇게도 불경스러운 일일까?


사목자의 지혜


지식과 지혜의 차이는 현실 감각이 있느냐 없느냐에 달렸다 했다.

다시 말해 아무리 아는 것이 많 다 해도 그것을 현실에 알맞게 적용할 줄 모른다면,

그것은 죽은 지식에 그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현실과 동떨어진 이론이나 이상은 그야말로 꿈일 뿐이다.

때로 본당 신부님들이 지나치게 야단을 잘 치신다는 항의(?)를 들을 때가 있다.

특히 미사나 전례 때 말이다. 물론 잘못을 질책해야 할 필요가 있기는 할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질책을 받지 않아도 될 사람들은 어찌 되느냐는 문제다.

예를 들어 미사 시간에 늦은 사람들을 두고 호통을 치는 경우다.

어떤 분들은 아예 성당 문을 닫아 걸기도 한단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사람 성질만 사납게 하는 일일 뿐이다.

신학교 때 어느 신부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본당 신자들 50%가 본당 신부의 사목 방침에 따르면 그저 ‘천주께 감사!’ 하고,

만약 70%가 호응을 한다면 ‘천주께 대단히 감사!’ 하여라.” 하셨다. 참으로 일리 있는 말씀이다.

어느 세상, 어디에서든 겉도는 30%가 있기 마련이다.

다시 말해 인간 세상에 완전함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본당 신부가 제아무리 수를 쓴다 하더라도 여전히 미사에 늦는 사람은 세상 마칠 때까지 있을 것이다.

미사에 늦는 사람들(많아야 30%) 때문에 주례 사제가 난리(?)를 치고

결국 나머지 70%가 그날 미사를 온통 망친다면 과연 잘하는 일일까? 그것이 지혜로운 일일까?

늘 어려운 일이지만, 강론에 대해서도 한마디 하고 싶다.

야단과 호통 일변도의 강론이 주일마다 반복되는 경우다.

우선은 강론 준비를 하지 않는다는 얘기고, 둘째는 하늘 높은 줄 모르는 까닭이다.

언젠가는 떨어질 날이 있을 것이다. 어찌 강론이 언어 폭력의 장이 되어야 하는가?

복음을 선포한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기쁜 소식’을 전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좋은 얘기’를 ‘좋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거친 말과 올바르지 않은 언어로 하느님의 말씀이 전해질 리 없을 것이다.

내친 김에 주례자들의 기도 속도에 대해서도 사족을 달고 싶다.

사목자들이여! 제발 기도문을 천천히 외우시라.

그렇지 않아도 내용이 고상한(?) 기도문들을 고속 도로 달리듯 읽어 나가니

참석하는 신자들이 어찌 그 기도문을 따라 마음을 모을 수 있겠는가?

그야말로 ‘중 염불’하는 격이 되고 만다.

알아들을 수 있게, 또 가슴에 와 닿을 수 있게 기도문을 정성껏 외우는 사목자들의 습관이 참으로 중요할 것이다.


축제로서 전례?


가끔 강조되는 것이 전례 특히 미사가 축제여야 한다는 것이다. 지당한 말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반드시 짚어야 할 점이 있다.

축제 또는 놀이 형식으로 인간이 하느님을 찬미하고 공경할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인간의 경신 행위에는 그 성격상 엄숙성과 정숙성이 필요하다.

다시 말해 제의 형식과 축제(놀이) 형식을 두고 범주의 오류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축제가 제의의 일부일 수는 있지만 전부일 수는 없다는 말이다. 특히 우리 나라의 경우가 그렇다.

그래서 사물 놀이가 제례악(祭禮樂)이 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적어도 우리 나라 사람들 심성에 맞는 전례가 되려면 반드시 정숙하고 경건하게 거행될 필요가 있다.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편안한 마음이 들게 하여야 한다. 들뜨게 만들거나 소란하게 하는 것은 절대로 금물이다.

전례 특히 주일 미사 후 신자들을 편안하고 즐겁게 돌려보내는 무엇인가가 강구되어야 한다.

어떤 신부님의 예를 들어 보고자 한다. 그분은 주일마다 참으로 시의 적절한 유머를 한 가지씩 준비하신다.

그리고 미사 파견 전 공지 사항 시간에 유효 적절하게 활용하신다.

성당 안을 그야말로 한바탕 웃음판으로 만드신다. 모든 이의 얼굴에 넉넉한 웃음이 어린다.

그리고는 강복과 파견 성가. 신자들의 얼굴이 밝다. 세상에 퍼져 나가는 ‘주님의 평화’가 느껴진다.
<사목, 1998년 12월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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