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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속의 평신도: 오늘날 한국 교회의 평신도는 어디에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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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0-08-14 ㅣ No.28

[경향 돋보기 - 세상 속의 평신도] 오늘날 한국 교회의 평신도는 어디에 있는가?

 

 

한때는 ‘병신도’ 소리를 들었는데…

 

요즘 들어 평신도들에 대하여 우려하는 소리를 자주 듣게 된다. 과거에는 하도 무능하고 수동적이고 답답해 ‘병신도’로 불린 적이 있었다. 무슨 일을 해보려 해도 그야말로 능력이 되지 않고, 모든 일을 사제에게 맡기는 데다 도대체 입장이란 것이 없어 그리 불린 것이다. 전설 같은 이야기지만 이 명칭이 사용되던 시절은 불과 삼십 년도 채 지나지 않았다.

 

1980년대부터 신자들이 급속하게 늘어났고, 이들이 사회 중간층에 속할 확률이 높았다. 이른바 학력, 재력, 사회적 권력 보유 정도에서 중간 이상을 차지하는 이들이 대거 교회로 몰려왔다는 것이다. 이때부터 교회 중산층화 논의가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이때 나온 논의들은 대체로 부정적이었다. 이들이 갖는 물적, 인적 자원 동원 능력이 성당 건축, 부동산 구입, 교회 기관과 시설 운영에 도움을 주리라는 점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일례로, “중산층화되면 신자들이 기득권층이라 교회가 사회문제에 관여하는 것을 싫어할 것이다.” “그들이 가진 물질을 통해 사제나 수도자들을 세속화시킬 것이다.” “이들이 가진 자원 동원 능력을 필요로 하는 사목과제들이 많아 머잖아 이들 중심의 사목이 될 것이다. 그러면 가난한 이들이나 사회적 약자들이 교회에 발붙이기 어려울 것이다.” 등의 우려를 들 수 있다. 물론 중산층화가 부정적인 영향만 준 것은 아니었다. 사회의 다양화가 원인이겠지만 신자 구성이 다양해지다보니 교회 모습도 다채로워졌다. 이 때문에 과거 사회정치적인 영역을 넘어 신자들의 영향력이 문화예술 영역으로도 확대되고 있다.

 

활발한 기부를 통해 사회복지의 양과 질도 크게 높아졌다. 교구 경계를 넘어 봉헌을 하는 탓에 건축도 용이해졌다. 전국적으로 성지개발이 활발한 것도 이 영향일 것이다.

 

해외선교, 해외원조, 북한원조도 가능해졌다. 국제교류도 활발해져 평신도들의 높아진 수준을 실감케 한다. 평신도들의 높아진 교육수준은 교회 봉사를 용이하게 하는 한편, 교구와 수도회의 사도직 영역을 확장하는 데 기여하였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넓어진 교회에 대한 상식과 이해는 평신도 사도직의 수준을 끌어올렸다. 역설적이지만 이로 말미암아 교회 안에서는 과거엔 볼 수 없었던 사제 · 수도자들과 신자들 간의 갈등을 흔히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이외에도 교회에서 달라진 평신도의 모습들을 발견하기는 어렵지 않다. 모든 일에는 이처럼 양면이 있다. 그렇지만 평신도들의 갈 길은 여전히 멀어 보인다.

 

 

요즘에 들은 몇 가지 걱정스러운 사례들

 

하나. 올 6월 있었던 세미나에서 필자의 토론자로 나섰던 유희석 신부님이 논평문에서 이야기한 사례이다.

 

“발표자의 내용은 논평자인 제 짧은 본당사목 시절을 잠시 떠올리게 하였다. … 한번은 대사회적인 측면에서 그리고 지역민들과의 소통차원에서 ‘무료급식소’를 운영하면 어떨까 하고 조심스럽게 제안하면서 방법모색을 (신자들에게 : 필자 삽입) 일임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서 부정적인 그들의 입장을 들어야 했다. 말하자면 아직은 시기상조이며 능력 밖의 일이라는 이유였다. 자세한 이유를 들어보면 이랬다. 냄새나는 노숙자들이 들락거리면 아이들의 교육상 그리고 다른 신자들에게도 불편해진다는 것이다. 혹여 노숙자들이 교회에 찾아와 떼라도 쓰면 어떻게 감당하겠냐는 것이다. 결국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고, 사목자는 세상물정을 모르는 미숙아 신세가 되었다”(“한국그리스도사상연구소 제33차 학술회의 자료집”, 한국그리스도사상연구소, 2010년).

 

둘. 현 정부 들어 사제들이 국가적 의제에 관여하는 빈도가 늘어났다. 문민정부 이후로 전개된 민주화 흐름을 역행하는 정책들에 대하여 사회교리에 입각하여 사목적인 판단을 내리고 실천에 옮기는 경우가 이전 정부들에 비하여 빈번하다는 것이다.

 

현 정부 출범 첫해에 있었던 ‘촛불 시위’, ‘용산 철거민 사태에 대한 관여’, ‘표현의 자유를 비롯한 역사적 퇴행에 대한 비판’, 현재도 진행 중인 ‘4대강 살리기에 대한 반대’ 등이 대표적인 사례들이다. 처음에는 일부 사제가 시작한 일들이, 수도자를 넘어 ‘4대강 살리기’의 경우에는 주교단까지 참여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런 교회의 행위에 대하여 반대 목소리를 높인 평신도들이 적지 않았다. ‘촛불 시위’ 때는 ‘뉴 라이트 천주교 연합’의 이름으로, ‘4대강’에 대하여는 ‘뜻 있는 평신도들’의 이름으로 반대하는 성명서가 높은 광고료를 지불하는 주요 일간지에 실렸다. 본당에서도 유사하게 사제들의 강론에 대하여 시비하는 목소리가 높았다는 이야기를 자주 들을 수 있다. 교회 언론사와 해당 기관에 항의하는 신자들이 많다는 이야기도 흔히 들을 수 있음은 물론이다.

 

셋. 세세하게 열거할 수는 없지만 사제와 수도자들을 물질로 세속화시킨다는 혐의에서부터, 사제와의 갈등에서 비교회적으로 행동하였다는 소식, 교회생활 따로 사회생활 따로인 모습에 이르기까지 평신도들의 문제를 지적하는 이야기들이 봇물을 이루고 있다. 일례로, 주일학교 참여자 수가 인구감소 규모를 훨씬 초과하여 줄어들고 있는 데 영향을 미치는 신자 부모들의 사고방식을 들 수 있다.

 

얼마 전 어느 본당에서 주일학교 교사들을 인터뷰한 적이 있었는데, 교사들은 한결같이 부모들이 보내지 않아서라는 말을 가장 많이 하였다. 이 말에는 초등부와 중고등부의 차이가 없었다. 부모들이 주일학교는 공부 못하는 아이들이 가는 곳이고, “성당 다닐 시간 있으면 공부나 하라.”는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한다고들 하였다.

 

인생에서 돈과 건강이 신앙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시대에 그리 나무랄 일은 아닌 것처럼 보인다. 이외에도 영세 뒤 3년이 지나면 타성에 젖어 본인은 물론 열심히 살려는 신자들도 주저앉히는 하향평준화 태도도 흔히 발견할 수 있는 모습이다. 이렇게 교회 안에서 평신도들은 열심히 살아가기도 하지만 걱정스러운 모습을 많이 노출시키기도 한다.

 

 

왜 이런 일들이 생기는 것일까?

 

앞에 든 사례들을 크게 둘로만 나눠 원인을 생각해 보고 싶다. 먼저, 신자들이 갖는 이중성이다. 가난한 이들을 도와야 한다고 하면서 정작 본당의 시설을 직접 이용하여 도우려 할 때 거부하는 이유이다. 이것은 마치 장애인 시설이 동네에 들어올 때 반대하는 주민들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이들은 자신들 안에 내재된 뿌리 깊은 차별적 시선, 혹시라도 있게 될지 모를 부동산 가격 하락을 우려하는 이기주의가 원인이라는 것을 은폐한 채 아이들을 걱정한다는 명목을 앞세운다.

 

참으로 우리와 비슷하지 아니한가? 그러니 복음을 들었으되 복음을 내면화하지는 못한 신자들이 아예 신앙을 모르는 이들과 다를 것이 없다 하겠다.

 

한국 갤럽의 “한국인의 종교와 종교의식 제4차 조사”(2004년)에서 응답자들은 ‘사람들이 종교를 믿는 가장 큰 이유’에 대하여 ‘마음의 평안을 얻기 위해서’(67.9%), ‘복 받기 위해서’(17.9%), ‘죽은 다음의 영원한 삶을 위해서’(7.8%),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서’(7.0%) 등의 순서로 답한 바 있다. “가톨릭 신자의 종교의식과 신앙생활”(가톨릭신문사, 2007년)에서는 입교동기가 10개 응답 범주 가운데서 41.9%(태중 교우를 포함할 때 32.4%)가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서라고 답하였다.

 

이 둘을 잘 살펴보면 ‘마음의 평화’가 종교적이면서도 동시에 세속적 동기인 것을 알 수 있다. 상당 부분 현세 구복적인 성격을 띤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천주교 신자라 해서 한국인이 갖는 이러한 종교적 성향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실제로 천주교 신자들의 평균 신앙기간은 약 20년 정도에 불과하다. 그만큼 복음화가 요원한 과제이다.

 

둘째, 신자들이 교회의 사목적인 판단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하는 경우이다. 이것은 일차적으로 신자들의 계층구성이 다양해진 것과 관련이 있다. 이미 중산층 담론에서 자주 거론하였던 것처럼 상대적으로 부유한 신자들이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현재 교회의 주 활동 신자층의 평균연령은 50대 중반으로 추정된다.

 

이것은 절반 이상의 신자들 연령이 50대 중반 이상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이것은 최근 투표결과에서 나타났듯이 이 연령층이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입장을 가질 확률이 높다는 것을 뜻한다. 중산층화와 평균연령 상승이 영향을 주었으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이라 하더라도 신자들의 의식이 일반인들과 다르다면 직접 영향을 주지는 않게 된다. 이를테면 사회에서 아무리 교회의 사회참여에 대하여 비판적으로 바라보더라도 신앙인들이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긍정적인 평가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기대에 불과하다. “가톨릭 신자의 종교의식과 신앙생활”(2007년)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신자들의 사회활동 참여의사는 대체로 소극적인 태도를 보인 것이 특징이었다. 그리고 사회활동 참여 의사는 연령이 높을수록 낮아지는 경향을 보였으며… 가톨릭 신자들의 사회의식은 선행 연구결과들과 비교하였을 때 점차 보수적인 성향이 강화되어 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167쪽). 그리고 주요 현안에 대하여 반대 목소리를 낸 신자들의 입장을 분석해 보았을 때도 같은 경향을 읽을 수 있다. 신자들이 일반인들의 비판적인 목소리와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필자는 이에 대하여 오래 전부터 신자들의 사회의식이 성속이원론에 가깝다고 말해왔다. 교회는 어떠한 경우에도 정치, 그리고 정치 영역에 속하는 국가, 세상에 대하여 직접 관여하지 않아야 한다는 주장에 많이 기울어있다는 것이다.

 

한국 천주교회가 ‘예언직 수행’(정치참여)을 통하여 높은 사회적 위신을 얻었고, 그 결과로 자신들이 천주교를 선택하였을 확률이 높음에도 이를 잊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들의 주장이 매우 정치적이라는 사실을 흔히 간과한다.

 

얼마 전 본당 특강에 초대받아 사회교리를 소개하고, 이 가르침에 따르도록 교회가 계속 요구하면 “성당에 다니겠는가?”라고 물었을 때 상당수가 “고려해 보겠다.”고 답변하는 것을 목격한 적이 있다. 이때 신자들은 애초에 사회교리를 모르거니와 설사 가르친다 하더라도 입장이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나의 생각이 현실에 가까울 것이다.

 

신자들은 그런 ‘세속의 갈등이 싫어 마음의 평화를 얻고자 찾아왔는데 왜 여기서 다시 이런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가?’라고 충분히 생각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이처럼 한국인은 물론이고 천주교 신자들에게도 이런 종교관, 성속이원론이 뚜렷하다. 그리고 이 이원론은 사회참여를 넘어서 신앙생활과 사회생활을 분리하는 이중적인 태도에도 영향을 주고 있다. 그러니 이 문제가 해결되기 전에는 앞으로도 앞에서 든 예들이 빈번하게 등장할 것이라 예상할 수 있겠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본래 한국인의 종교의식이 그렇다고 하면 자칫 운명론에 빠져 복음화의 필요성과 그에 대한 노력을 포기하게 되기 쉽다. 그러나 한국 천주교회사를 살펴보면 훌륭한 신자상들을 많이 찾을 수 있다. “복음화가 되려면 교회가 해당사회에서 현존한 역사가 오백 년은 되어야 한다.”는 말이 필요조건이 아니라는 뜻이다. 지금도 얼마든지 신자들의 의지에 따라 훌륭한 복음화의 모범이 될 수 있다.

 

짧은 역사임에도 한국 천주교회는 세계교회사에서 보기 드문 복음화의 사례를 지난 수십 년간 만들어왔고, 김수환 추기경과 같은 인물도 탄생시켰다. 지금도 곳곳에서 이 글에서 우려하는 신자들의 모습과는 거리가 먼 훌륭한 신자들이 자신을 드러내지 않은 채 살아가고 있다. 이처럼 신앙을 받아들이는 것, 새로이 종교생활을 시작한다는 것이 갖는 의미를 진지하게 고려한다면 지금부터라도 신앙인답게 살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또 다른 방안은 이제 ‘믿어야 할 교리’ 중심에서 윤리, 이른바 ‘사회교리’ 중심으로 신자들의 입문교육과 재교육 방향을 수정하는 것이다. 질적인 성숙에 초점을 맞추는 방안이다. 양을 늘리기보다 이미 들어와 있는 신자들을 성숙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윤리 중심의 교육을 통해 ‘무엇을 믿느냐?’ 못지않게 구체적인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하느냐?’도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치자는 것이다. 사실상 윤리교육인 셈이다.

 

신자의 됨됨이는 결국 일상생활 윤리로 드러나게 되어있기에, 신자들이 일상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스스로 판단을 내릴 수 있을 만큼 교육시켜야 한다. 빠른 시일 안에 방향을 전환하지 않으면 고령화와 맞물려 기회를 놓칠 수 있다. 구교우들처럼 엄격하게 교리를 가르칠 수 있는 상황도 아니고, 문화도 변화하였기에, 이제는 새로운 문화에 상응하는 방식으로 접근해야 한다. 사회교리가 지금 시기에 가장 필요하고 적합한 내용이다.

 

[경향잡지, 2010년 8월호, 박문수 프란치스코(한국가톨릭문화연구원 부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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