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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5‧18 민주화 운동 40주년에: 5‧18과 한국 천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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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06-24 ㅣ No.1750

[경향 돋보기 – 그날처럼 살고 있습니까: 5‧18 민주화 운동 40주년에]


5‧18과 한국 천주교회

 

 

한국 민주화 운동사에서 역사적인 전환점을 제공한 것으로 평가되는 5·18 광주 민중 항쟁은 그 이전의 민주화 · 통일 운동의 성과와 한계를 총괄하였으며, 그 이후의 운동에 방향과 과제를 제시하였다.

 

한국 천주교회는 1980년의 항쟁 당시부터 5·18 광주 항쟁에 깊이 참여하였다. 정보가 차단되었던 항쟁 시기부터 진실을 증언하였으며, 해마다 진실을 기억하고 진상 규명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 노력은 주로 항쟁의 중심지였던 광주대교구에서 광주 사제단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광주 사제단은 5‧18 광주 항쟁을 기억하고 증언하였다. 항쟁 초기 광주대교구장이 주교회의에 진실을 증언하였지만 소극적인 태도와 반응을 받은 때문인지 이후 광주 사제단은 타 교구와의 협력 모색에 주력하지 않았다. 광주대교구 외의 한국 천주교회는 대부분 광주를 외면하고 광주 문제에 침묵하였다. 정확한 정보 부재, 교회의 사회 참여 활동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 교회 일치에 대한 이해 부족 때문이었다.

 

5‧18 광주 항쟁은 학술 발표회를 통하여 더 정확하게 이해되고, 광주 항쟁의 정신도 확산되었다. 광주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등이 주최한 5·18 광주 민중 항쟁 기념 심포지엄은 5·18 광주 항쟁을 정확하게 조사, 분석하고 민중 항쟁이 나아갈 방향 모색의 토대가 되었다. 5‧18 기념일과 기념 성당 지정은 민족사적 사건을 교회 내적, 영성적으로 자리매김하였다.

 

 

기억과 증언

 

1980년 5월 25일 광주대교구장 윤공희 대주교는 특별 서한 ‘십자가를 통한 부활의 승리를 믿으며’를 발표하였다. 5·18 광주 항쟁에 대한 한국 천주교회의 첫 공식 입장 표명이었다. 그러나 항쟁의 진상, 살인 행위에 대한 규명보다는 구호가 강조되었다. 6월 1일 광주대교구 사제단이 ‘광주사태의 진상’을 작성하여 항쟁의 원인이 계엄군의 무자비한 탄압 때문이었음을 밝히고, 한국 천주교회의 모든 교구에 인편으로 발송하였다. 그리고 6월 23일 광주 사제단이 항쟁으로 고통받은 이들을 위한 특별 공동 미사를 광주 계림동성당에서 봉헌하였다.

 

1982년 5월 18일 광주대교구 사제단이 성명서 ‘광주 항쟁 2주기를 맞는 우리의 결의’를 발표하여 5‧18 광주 항쟁에 대한 진실 규명, 구속자 석방, 부상자 대책, 책임자 문제 등을 구체적으로 거론하였다. 그리하여 천주교회가 5‧18 광주 항쟁을 어떻게 인식하고 기억하는지, 해결 원칙과 방법은 무엇인가를 보여 주었다. 1984년 5월 18일 광주대교구 사제단은 그동안 ‘광주사태’라고 하였던 5·18 광주 항쟁을 ‘광주의거’로 정의하였다. 1980년의 항쟁 이후 끊임없이 기억하고 진상 규명을 위해 펼쳤던 증언 활동의 결과였다.

 

1985년에는 광주대교구 사제단에 속하지 않은 사제가 5·18 추모 미사 강론을 하였다. 5월 17일 남동성당에서 거행된 ‘5‧18 광주의거 추모 미사 및 추도식’에서 서울대교구의 함세웅 신부가 5·18 광주 항쟁 당시 광주대교구와 전주교구 외에는 침묵하고 외면하였던 한국 천주교회의 태도를 반성하였다. 그리고 ‘속히 광주 시민 항쟁의 진실을 밝혀 화합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해야 한다며 진상 규명을 강조하였다.

 

1980년대 한국 천주교회는 기념 미사를 통하여 5·18 광주 항쟁 희생자를 기억하고 증언하였으며 정권 관계자들을 향하여, 5·18 가해자들을 향하여 진실과 진상 규명을 촉구하였다. 이러한 자세는 1982년 5‧18 광주 항쟁 2주기에 정립된 한국 천주교회의 5·18에 대한 일관된 자세였다.

 

1997년에는 평신도협의회가 사제단과 함께 5·18 광주 항쟁 기념 미사를 주최하였다. 그동안은 기념 미사에 신자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있기는 하였지만 사제단이 주도하고 신자들은 따라가는 자세를 보였는데, 신자들의 주체성에 돋보이기 때문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또한 5·18 광주 항쟁의 교훈을 ‘생명의 존귀함’이라고 규정하여 5‧18 광주 항쟁의 가치와 교회의 생명 존중 가치의 공동 가치 지향, 곧 교회가 왜 5‧18 광주 항쟁에 계속 참여하고 참여해야 하는지를 알려 주었다.

 

한국 천주교 주교단은 1980년 5월 23일, 전국 신자들을 향하여 5월 25일 주일 미사 때 ‘십자가를 통한 부활의 승리’라는 윤공희 대주교의 사목 서한을 낭독하고 기도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5‧18 광주 항쟁이 정치적 견해차로 빚어진 것이니 책임을 따지기에 앞서 단식과 기도로 하느님께 애원하자고 하였다. 그러나 광주의 참담한 비극에 예언자적 발언은 하지 않았다. 모두가 회개하고 화해를 위해 기도하자고 할 뿐이었다. 이는 5‧18 광주 항쟁의 진실과 아픔을 외면한 것이었고,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 교회의 의무를 외면한 것이었다.

 

주교회의의 요청에 따라 전국적으로 기도와 특별 헌금이 이루어졌는데 왜 기도와 구호품이 필요한지, 왜 광주를 위해 기도와 구호품 모집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은 없었다. 5·18 광주 항쟁을 직접 겪지 않은 사람들에게 진실을 증언하고 진상 규명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해야 했다. 그래서 그것이 광주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게 하고, 그런 뒤에 문제 해결 방법을 찾고 행동하는 것이 순서였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기도와 구호품 모집’으로 가려졌다.

 

1980년대 광주대교구 외에 한국 천주교회는 대부분 5‧18 항쟁을 외면하였고 진실을 증언하지 않았다. 기도와 물질적인 도움을 강조하였을 뿐이다. 그러나 정확한 사실을 알지 못하면서 마음을 다하는 진정한 기도를 기대할 수는 없다. 1987년 6월 항쟁을 토대로 6‧29 선언이 있었지만 1990년대에도 한국 천주교회는 광주대교구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여전히 5‧18 광주 항쟁을 외면하였다.

 

1990년 5월 18일, 정의구현사제단이 성명서 ‘우리의 고백과 기도’를 발표하여 광주의 아픔을 한국 천주교회 대부분이 외면하였음을 비판하였다. 또한 “‘광주는 스스로 비극을 자초했다. 교회는 현실 문제에 관심을 갖지 말고 내세에 대하여 관심과 희망을 가져야 한다.’는 식의 전근대적이고 반(反)복음적인 주장”도 서슴지 않는 성직자도 있었음을 고백하였다(기쁨과희망사목연구원,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정의구현사제단은 광주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와 함께 1995년 9월 18일 명동성당에서 5‧18 특별법 제정과 특별 검사제 도입을 촉구하는 12만여 명의 서명부를 공개했다. 그리고 국회의장을 방문하여 서명부와 5·18 특별법 입법 청원서를 전달하며 특별법 제정을 요청하였다.

 

 

연구와 기념

 

5‧18 광주 항쟁 연구는 5‧18 광주 항쟁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증언하고 기념하는 토대이다. 1994년 11월 17일 광주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가 ‘5‧18 역사적 해결 방안의 모색’을 주제로 심포지엄을 개최하였다. 5‧18 광주 항쟁을 연구의 장으로 끌어올린 것은 기념 미사, 그리고 기념 미사 · 기념식에서의 문건(거의 선언적인)을 통하여, 기억과 증언의 단계에 머물렀던 5‧18 광주 항쟁과 천주교회의 관계, 의미 등을 규명하고 정립하는 것이었다. ‘5·18 광주 항쟁에 한국 천주교회가 왜 1980년부터 계속하여 참여하고 있는가?’, ‘일치를 추구한다는 천주교회임에도 왜 한국 천주교회가 아니라 광주대교구만의 역할과 의미로 한정되었는가?’, ‘5‧18 광주 항쟁과 천주교회가 추구하였던 공통의 가치는 무엇이었는가?’ 등을 밝히는 것이다.

 

 

기념일과 기념 성당 지정

 

2005년 5월 16일, 광주대교구가 5월 18일을 광주대교구의 5‧18 기념일로 선포하고, 남동성당을 5‧18 기념 성당으로 지정하였다. 이는 역사적 · 민족사적 관점에서 조명되어 온 5·18 광주 항쟁이 교회사적 · 구원사적으로 새롭게 자리매김하였다는 의미였다. ‘광주대교구 5·18 기념일’ 지정은 해마다 5월 18일에 광주대교구의 모든 본당에서 5·18 광주 항쟁 기념 미사를 봉헌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정부나 일부 민간단체 중심으로 행해지던 5·18 행사가 교회 전례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여져 5·18 광주 항쟁을 교회 차원에서 좀 더 영성적으로 승화시켜 나간다는 의미였다.

 

5‧18의 전례화와 영성화란 5·18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외적 행사를 통해서뿐 아니라 삶과 신앙 속에서 5·18 정신을 새롭게 기억하고 체험하는 것이었다. 그리스도교 영성 생활은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삶으로서 하느님을 중심에 모시고, 역사 안에서 강생을 통하여 하느님의 모습을 인간에게 제시하신 그리스도의 삶을 본받는 생활이다. 전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천상 성부께 드리는 공적 경배인 동시에 신자 공동체가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께 드리는 공적 경배이다. 이러한 영성 생활과 경배에 5‧18 기념일이 자리하는 것이 전례화 ‧ 영성화이다.

 

5‧18 기념 성당 지성은 장소에 대한 기억, 기념이었다. 남동성당은 1980년 5월에 열두 명의 민주 인사가 처음으로 수습대책위 회의를 열었던 역사적 장소로, 이후 5‧18 관련 추모 미사와 시국 집회, 특별 강연회 등이 열리면서 민주화 운동의 보루 역할을 하였다. 남동성당은 5‧18 기념 공간으로 5‧18 광주 항쟁 때, 그리고 그 이후에 함께하였던 천주교회와 광주 지역민들의 경험을 기억하고 그 정신을 재현하는 장소가 되었다. 천주교회와 시민들의 소통이 이루어지는 곳, 5‧18 광주 항쟁 경험의 공감대가 형성되는 곳이었다. 따라서 희망의 공간이었고, 5‧18 광주 항쟁의 정신과 이상이 교회의 전례를 통하여 구현되는 곳이었다.

 

2006년, 광주대교구에서 ‘5‧18 민중 항쟁 기념일 미사 기도문’을 확정하였다. “정의와 평화의 원천이신 하느님, 파스카의 신비가 저희 안에서 언제나 살아 움직이게 하시고 5·18을 맞는 저희가 신앙의 빛으로 새롭게 되어 다툼보다는 일치를, 분노와 미움보다는 화해와 용서로 지난날의 상처를 극복하고 정의와 평화의 열매를 거두는 기쁨에 이르게 하소서”(본기도), “저희로 하여금 5‧18을 파스카의 신비로 새롭게 기념하며, 참된 정의와 평화를 일구며 살다가 마침내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소서.”(영성체 후 기도)라고, 이날의 미사 기도문에 5‧18이 기록되었다.

 

2010년 10월 25일 출범한 광주인권평화재단의 설립 목적도 5‧18 광주 항쟁과 긴밀한 관계가 있다. ‘5‧18 희생자들에 대한 감사와 보은의 정신을 담아 지금 고통받고 있는 이웃 형제들의 아픔에 동참하고 연대,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 인권 증진 프로그램과 조사, 연구 활동 지원’이 설립 목적이기 때문이다. 이후 평화재단은 설립 목적 달성을 위해 심포지엄 개최, 인권 평화 교육, 국외 봉사 활동 및 국외 지원 사업을 펼치고 있다.

 

5‧18 광주 항쟁 40주년을 맞이하는 오늘, 광주대교구를 중심으로 전개되던 5‧18에 대한 기억과 기념은 한국 천주교회의 기억과 기념으로 확장되고, 진실을 말하고 진리를 위해 행동해야 하는 교회의 의무와 역할을 깨우치고 있다.

 

* 윤선자 도미니카 – 전남대학교 사학과 교수. 한국 독립운동에 일생을 바친 여성 독립운동가의 생애를 다룬 「한국 최초의 여류비행사 권기옥」을 펴냈으며, 한국 근현대사와 관련한 다수의 저서와 논문을 냈다.

 

[경향잡지, 2020년 5월호, 윤선자 도미니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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