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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리랑카4: 갈교구 마타라 성모 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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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04-19 ㅣ No.562

[서울대교구 순교자 현양위원회 공동기획 아시아 교회 복음화 길을 따라서] 스리랑카 (4·끝) 갈교구 마타라 성모 성지


쓰나미에 양팔만 남은 예수님께 기도하며 상처 치유에 앞장서다

 

 

신자들은 2004년 쓰나미 충격으로 팔만 남아있는 십자고상에 손을 대고 간절히 기도한다.

 

 

박해와 내전 그리고 테러. 스리랑카 교회가 겪은 모든 아픔을 이제 다 알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인재(人災)가 아니라 천재(天災)가 빚어낸 또 다른 비극이 있었다. 2004년 12월 26일 일어난 인도양 지진해일(쓰나미) 참사다. 스리랑카에서만 3만여 명의 희생자가 났다. 스리랑카 최남단 갈교구(교구장 레이먼드 위크라마싱하 주교)는 인도양과 맞닿아있어 유독 피해가 컸다. 교구 남쪽 끝에 위치한 ‘마타라 성모 성지’는 그 참상의 기억을 생생히 간직하고 있다.

 

그날 오전 7시 30분경, 인도네시아 맨 서쪽 도시 반다아체 인근 해상에서 규모 9.1 강진이 발생했다. 곧 30m 높이 쓰나미가 인도양 연안을 덮쳤다. 진앙에서 5000㎞ 떨어진 아프리카 동쪽 소말리아까지 강타할 정도의 위력이었다. 쓰나미는 1시간 반 만에 스리랑카 남해안을 덮쳤다. 그때 마타라 성모 성지 성당에서는 주일 아침 미사가 봉헌되고 있었다. 성지가 자리한 곳은 인도양에서 불과 100m 떨어진 바닷가. 영성체하려고 신자들이 줄을 선 순간, 격랑이 성당을 집어삼켰다. 바닷물이 성당 안에 4m나 차올랐다. 주차장에 있던 자동차가 파도에 휩쓸려 들어와 성상을 부수고 벽을 들이박았다. 신자들은 살기 위해 2층 성가대석으로 몰려갔다. 미처 피하지 못한 24명은 목숨을 잃었다. 희생자 가운데는 본당 수녀도 있고, 한 살배기 아들과 28세 어머니도 있었다. 희생자들의 이름과 나이를 새긴 추모 동판이 현재 성당 한쪽 벽에 붙어 있다. 차가 박혔던 그 벽이다. 희생자들의 이름 아래에는 기도문이 새겨져 있다. ‘주님, 이들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성당은 참사 3년 뒤 복구를 마쳤다. 그러나 모든 것이 제모습을 되찾지는 못했다. 제대 오른편에 있던 십자가는 참사 당시 모습 그대로 남겨 뒀다.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해서다. 예수님의 형체는 없고 주님의 양팔만 십자가에 덩그러니 달려 있다. 쓰나미에 휩쓸려 부서진 나머지 몸체는 흰 천에 싸인 채 십자가 밑 유리함에 고이 모셔놓았다. 그렇게 십자가는 백 마디 말보다 강렬하게 그날의 참상을 증언하고 있었다. 십자가 앞에는 신자들이 촘촘히 줄을 지어 서 있었다. 그들은 차례로 손을 위로 쭉 뻗어 십자가 밑동을 잡고 간절히 기도했다. 십자가를 우러러보는 그들의 눈빛이 하나같이 촉촉했다. 십자가가 걸린 파란색 벽은 바닷물을 연상시켰다. 그래서 마치 십자가가 바다 위에 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미사를 드리던 신자들에게서 물 밖으로 빠져나오기 위해 십자가를 부여잡은 모습이 비쳐 보였다. 십자가에 팔만 온전히 남은 데는 숨은 의미가 있을지 모른다. 그 어떤 비극이 닥쳐도 예수 그리스도는 끝까지 우리 인간을 위해 손을 내미신다는 그런 뜻은 아닐까?

 

- 찰스 히와와삼 신부(가운데)가 보살피고 있는 다종교, 다민족 청년들과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다.

 

 

갈교구 총대리 찰스 히와와삼 신부는 쓰나미 참상이 있던 당시 마타라 성모 성지 담당이었다. 쓰나미가 덮칠 때 미사를 주례하고 있던 사제가 바로 그였다.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그는 가족처럼 지내던 신자들을 잃어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무너지지는 않았다. 성지 재건을 위해 스리랑카 정부 부처를 바쁘게 찾아다녔다. 교황청을 비롯한 세계 교회와 불교ㆍ이슬람교 등 이웃종교에도 도움을 호소했다. 이에 응답해 많은 교회와 구호단체가 손을 내밀었다. 이탈리아 밀라노대학교에서는 피해자 심리 치료를 위해 의료팀을 보내기도 했다. 히와와삼 신부는 “당시 한국에서도 많은 봉사자가 왔던 걸로 기억한다”고 말했다.

 

2007년 복원을 마친 성당은 건립 100주년 행사를 순조롭게 치를 수 있었다. 오늘날 성지는 평온한 모습이다. 마당에 돗자리를 깔고 앉아 웃고 떠드는 신자들을 보면 휴양지에 온 기분이 든다. 회색과 흰색이 조화를 이뤄 하얀 포말이 섞인 바다를 닮은 성당. 햇살에 반짝이며 잔잔히 일렁이는 에메랄드빛 인도양 바다가 그 앞에 끝없이 펼쳐져 있다.

 

히와와삼 신부는 희생자 유가족을 위한 자립시설 ‘삶을 위한 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2005년에 시작했으니 벌써 15년째다. 남편을 잃은 아내와 부모를 잃은 아이들은 이곳에서 도미니코회 수녀들에게 양초 만드는 기술을 배웠다. 일솜씨가 좋은 10명은 상주 직원이 됐다. 삶을 위한 학교는 마타라 성모 성지에서 서쪽으로 20여㎞ 떨어진 ‘치유자 그리스도 성지’에 있다. 히와와삼 신부가 담당하고 있는 순례지다. 이름에 걸맞게 아픈 사람들, 특히 암 환자가 많이 찾는 곳이다. 히와와삼 신부는 이곳 사제관에서 어려운 환경에서 자란 청년을 보살피며 13년 동안 기술을 가르쳤다. 청년들은 싱할라족과 타밀족, 가톨릭과 이슬람, 불교 등 저마다 민족과 종교가 달랐다. 하지만 히와와삼 신부에겐 모두가 형제요, 식구였다. 그는 “다 같은 하느님의 아들이라 돕는 게 당연하다”며 “이 또한 치유의 과정”이라고 덤덤하게 말했다.

 

갈등과 아픔을 떨쳐내고 자립의 꿈을 향해 전진할 수 있는 곳. 치유자 그리스도 성지는 진정 스리랑카의 모든 상처를 치유하는 공간이었다.

 

마타라 성모자상.

 

 

마타라 성모자상

 

히와와삼 신부는 쓰나미 참사가 일어났을 당시 눈을 의심할 만한 광경을 봤다고 했다. “제대 위에 있던 성모자상이 저절로 함에서 나왔어요. 그리고 똑바로 선 채 배처럼 앞으로 나아갔어요. 마치 성난 바다를 달래려 다가가는 모습처럼 말이죠.”

 

하지만 놀라움도 잠시, 히와와삼 신부는 400년 된 성상을 잃었다는 괴로움에 시달렸다. 밤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였다. 그로부터 사흘 뒤인 12월 29일 새벽, 한 남자가 헐레벌떡 그를 찾았다. “신부님, 마타라 성모님을 찾았습니다!” 해변에서 발견한 성모자상은 거친 바다에 휩쓸렸는데도 크게 훼손되지 않았다. 성모님과 아기 예수가 쓴 왕관이 그대로 남아 있을 정도였다. 복원을 거친 성모자상은 중앙 제대 위 제자리로 돌아갔다. 이후 성모자상에 대한 신자들의 사랑이 더 깊어졌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마타라 성모자상은 400년 전 마타라 바닷가에서 우연히 발견돼 성당에 안치됐다. 17세기 포르투갈에서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46㎝ 크기의 작은 목각상이다. 발견되고 얼마 안 돼 이 지역에 콜레라가 창궐했다. 주민들은 전염병 퇴치를 위해 성모자상을 앞세우고 행렬 기도를 하며 하느님께 간구했다. 다행히 얼마 안 가 콜레라가 종식되면서 성모자상은 ‘기적의 성모자상’이라 불리게 됐다.

 

[가톨릭평화신문, 2020년 4월 19일, 갈=이학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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