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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ㅣ복음화

아시아 복음화, 미래교회의 희망18-19: 중국문화와 복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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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03-16 ㅣ No.573

[아시아 복음화, 미래교회의 희망] 가톨릭신문‐동아시아복음화연구원 공동기획 (18) 중국문화와 복음화 (상)


유교, 분명한 상하 질서에도 ‘오직 도리만 따른다’는 정신 중요시

 

 

선교 지역에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 지역의 문화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문화는 그 지역의 전통 가치관과 사회질서 그리고 삶의 양식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동아시아 지역은 오랜 역사 안에서 중국문화의 영향을 광범위하게 받아 왔다. 그러므로 중국문화에 대한 이해는 동아시아 지역 복음화의 선결과제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두 차례에 걸쳐 동아시아복음화연구원 연구위원이자 수원교구 사목연구소 소장인 이근덕 신부의 기고를 통해 중국문화 안에서도 주류를 차지하는 유교 문화의 몇 가지 특징을 살펴봄으로써 중국문화에 대한 독자들의 이해를 돕는다.

 

- 2017년 12월 16일 중국 상하이의 성 이냐시오 대성당에서 신자들이 기도를 하고 있다. CNS 자료사진.

 

 

유교 문화의 이상사회

 

유교 문화의 이상사회는 당연히 대동사회다. 대동사회는 곧 ‘사회의 공공질서가 유지되는’ 사회를 말한다. 이 말은 「예기」의 ‘예운’편에서 유래한다.

 

“큰 도가 행해지면 곧 사회의 공공질서가 유지된다. 어질고 능력 있는 인재를 선발해 사용하며, 신용을 중시하고 화목하게 지내고자 노력한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자기 가족이나 친구들만을 위하는 집단이기주의를 고집하지 않는다. 나이든 노인을 공경하며 젊은이들을 등용하고 어린이들이 잘 자라게 배려한다. 홀로 외로운 이들을 돌보고 병든 이들을 부양한다. 남자들은 본분에 걸맞은 직업이 있고, 여자들은 분수에 걸맞은 배우자가 있다. 재화가 남아돌아 쌓아두지 않으며, 능력이 남아돌아 이기적으로 사용하지 않으니 사회에 도적이 들끓지 않는다. 그러므로 외출을 하여도 문을 잠글 필요가 없으니 이를 일컬어 대동사회라고 한다.”

 

유교의 이러한 대동사회의 이상은 후대 사람들의 공통된 정치적 이상이 되었다. 근현대 시기의 강유위가 무술변법을 제창했을 때에도 바로 이 대동세계를 이상으로 삼았다. 손중산이 민족혁명을 일으켰을 때도 바로 이 대동세계를 목표로 추구하였다. 이 대동세계는 국가와 민족과 계급의 구분이 없는 세계이며,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존중받고 밤에 문을 잠그지 않아도 되는 사회이다.

 

한편 유교는 ‘소강’의 사회도 말한다. ‘소강’의 사회는 군신, 부자 등의 등급 구별이 있는 사회다. 대동사회의 이상은 현실과 너무 동떨어져 있어서 실현 불가능하다. 좀 더 실현 가능한 이상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현실을 고려한 ‘소강’의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우선 사회의 안정을 위해서는 등급이 있어야 한다. 만일 등급이 없다면 그 사회는 곧 혼란을 가져올 것이다. 그래서 순자는 서로 간의 구분을 명확히 함으로써 그 무리를 안정되게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더 나아가 모든 상하 관계의 사람들이 한마음으로 일치를 이루도록 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모든 정책이 민심에 부합하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정책들이 민심에 부합할 때 비로소 상하 관계가 일치를 이룰 것이요 그 사회가 화합을 이루게 될 것이다. 이렇듯 ‘소강’사회는 각각의 집단이 서로 화합을 이루며 공존하는 사회이다. 거기에는 등급과 차별이 분명히 존재한다.

 

 

유교 문화의 인간관계

 

인간관계에 있어서 유교는 장유(長幼)의 서열을 매우 중요시한다. 특별히 오륜으로 대표하는 기본적 인간관계 안에서의 윤리 질서 확립을 강조한다. 「예기」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한 국가를 잘 다스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네 가지 방면을 잘 고려해야 한다. 기본 정서(人情), 본분 의식(人義), 백성의 이익(利), 환난(患).” 이 중에서 본분 의식에 관하여 「예기」는 다음과 같이 부연설명을 하고 있다. “부모는 자애롭고 자녀는 효성스러우며, 형은 선량하여 모범이 되고 동생은 존경하여 따르며, 남편은 의롭고 아내는 순종하며, 노인은 은혜롭고 어린이는 유순하며, 임금은 어질고 신하는 충성스럽다. 이 열 가지를 일러 인의라고 한다.”

 

그런데 이들의 관계는 상호성을 지닌다. 만일 임금이 어질지 않다면 어찌하는가? 유교의 윤리체계에 의하면 신하는 이에 불충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맹자에게 물었다. “주나라의 문왕과 무왕은 모두 이전 왕조의 신하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자신의 임금인 은나라의 주왕을 살해할 수 있단 말입니까?” 맹자가 대답하였다. “나는 일찍이 신하가 임금을 살해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그저 무뢰배 하나를 주살했다는 말을 들었을 뿐이다.” 맹자에게 있어서 포악한 정치를 일삼은 은나라의 주왕은 이미 왕이 아니라 백성의 적이요 한갓 무뢰배에 지나지 않을 뿐이었다. 그렇기에 그러한 왕에게 충성을 바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순자에 이르러 이는 더욱 명확해진다. 순자는 도를 따라야지 군주를 따를 필요는 없다는 원칙을 내세운다. 곧 도리에 근거해서 행동해야지 그저 맹목적으로 군주를 따라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탕왕이 하왕조를 뒤집었고, 무왕이 은왕조를 전복시킨 일이 일어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중국 역사상의 ‘탕무혁명’이었다.

 

당연히 역사상 우국충정을 지킨 충신들과 삼강오륜의 법도가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삼강오륜의 법도 그 자체가 지닌 본연의 사상을 놓고 볼 때 자신의 본분을 다하지 못한 윗사람의 뜻을 무조건 순종하여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역사 안에서 죽음을 불사하고 임금에게 간언하는 신하들이 있었던 것이다. 이들은 황제가 잘못을 하였을 경우 목숨을 내걸고 간언을 하여 잘못을 시정하려 하였다. 바로 여기에 “도리를 따라야지 군주를 따라서는 안 된다”는 이념이 자리하고 있다.

 

우리는 종종 ‘사내대장부’라는 말을 사용한다. 이 말은 「맹자」에 나오는 말이다. 맹자는 대장부가 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세 가지 조건을 지켜야 한다고 말한다. 첫째로 부귀하더라도 음란해서는 안 된다. 둘째로 빈천하더라도 여기저기 빌붙어서는 안 된다. 셋째로 위세와 무력 앞에서 비굴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바로 대장부의 품격이며 유교가 제창하는 사내대장부의 기본준칙이다. 결론적으로 말해 유교의 인간관계는 상하 등급의 질서와 구별을 중요시한다. 하지만 그 질서와 구별 안에는 반드시 권리와 의무가 상호작용을 하고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결국 “오직 도리만을 따라야 한다”는 기본정신이 전체 질서를 유지하는 중심축으로 자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가톨릭신문, 2020년 3월 15일, 이근덕 신부(동아시아복음화연구원 연구위원 · 수원교구 사목연구소 소장)]

 

 

[아시아 복음화, 미래교회의 희망] 가톨릭신문‐동아시아복음화연구원 공동기획 (19) 중국문화와 복음화 (하)


중국 복음화, 유교문화에 대한 이해와 존중 있어야 가능

 

 

아시아주교회의연합회(FABC)는 아시아복음화를 위해서는 다양한 아시아 지역의 문화와 대화할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문화는 그 지역의 전통 가치관과 사회질서 그리고 삶의 양식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은 유교문화를 바탕으로 유지돼 왔다. 중국의 복음화를 위해서는 중국인들의 근간에 있는 유교문화를 제대로 알 필요가 있다. 이에 본지는 지난 호에 이어 동아시아복음화연구원 연구위원이자 수원교구 사목연구소 소장인 이근덕 신부의 기고를 통해 중국 유교문화의 특성을 살펴보고, 이를 어떻게 복음화 활동에 반영해야 할지 유추해 본다.

 

 

유교문화의 인격수양

 

유교는 개인의 인격을 수양하는 것을 기본으로 삼는다. 인격수양이란 한 개인의 전체적 소질을 어떻게 양성해 내느냐 하는 문제이다. 이에 대하여 유교는 교육 특히 가정교육을 강조한다. 사람은 누구나 가정교육으로부터 시작하여 점차 학교교육과 사회교육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모두는 외부로부터 주입되는 교육이다. 유교는 이에 더하여 인간의 내면에 자리하고 있는 도덕적 자각에 주목한다.

 

인격수양은 일종의 자각적이고도 자율적인 과정이다. 공자에 의하면 이는 극기복례의 과정이기도 하다.

 

만일 여기에서의 ‘예’를 과거 봉건사회의 예의질서 체계에 국한하지 않고 그 의미를 모든 사회의 일반적인 도덕규범으로 확대한다면 공자의 이 말은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할 것이다. 만일 우리가 현시대를 살면서 이 사회가 요구하는 규범들과 인간관계의 원칙들을 자각적으로 준수하지 못한다면 아마도 우리는 가는 곳마다 벽에 부딪힐 것이요 자유스럽지 못할 것이다.

 

사실 도덕규범에 대한 자율적 강제는 우리를 도덕의 노예로 빠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도덕의 주인이 되게 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이것을 깨닫는다면 곧 물질의 노예가 아닌 물질의 주인이 될 것이요, 도덕의 노예가 아닌 도덕의 주인이 될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사유방식의 변화에 달려있을 따름이다.

 

이것이 바로 철학에서 이야기하는 자유이다. 올바로 깨달아 안다면 필연적으로 자유로울 것이요, 만일 가는 곳마다 부딪혀 투쟁한다면 영원히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이는 마치 운전을 하면서 교통법규를 준수하는 것과 같다. 만일 교통법규 준수를 거부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수많은 위반통지서가 날아들 것이고 심지어는 구속될 수도 있다. 그 안에 무슨 자유가 있겠는가?

 

유교에서 자신을 수양하는 목적은 ‘안신입명’에 있다. 안신입명이란 사회 안에서 아무런 구속 없이 자유자재로 생활하며 진정으로 자신의 가치와 이상을 실현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하여 종국에 가서는 공자가 말한 “마음 가는 대로 살아도 법도를 벗어나지 않는” 성인의 경지에 다다르는 것이다.

 

중국 칭하이성 시닝의 한 성당에서 한 남성이 세례를 받고 있다. CNS 자료사진.

 

 

유교문화의 인생관

 

유교의 인생관은 낙관적이다. 이는 인생을 고해로 보는 불교와 상반된다. 하지만 결국 추구하는 목적인 성인의 경지에 다다르고자 하는 데는 서로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는다.

 

사실 유교 안에서도 맹자는 성선설을 말하고 순자는 성악설을 말한다. 얼핏 볼 때 이는 상반되는 주장이다. 하지만 맹자의 성선설은 인간의 선한 본성을 더욱 확장함으로써 최고의 경지에 다다르려 하는 것이고, 순자의 성악설은 인간의 악한 본성을 고침으로써 최고의 경지에 다다르려 하는 것이니 결국 최후에 다다르고자 하는 목적은 같다고 하겠다. 게다가 그 방법 역시 나란히 교육과 수양을 통한 방법을 제시하고 있으니 관점이 다를 뿐이다.

 

사람의 본성이 선하다고 해서 가만히 있어도 자연적으로 최고의 경지에 다다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반드시 부단한 교육과 인격수양의 과정을 거쳐야만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반대로 인간의 본성이 악하다고 해서 이를 인정하고 가만히 둔다면 이 사회에 생존해 나갈 수 없게 될 것이다. 반드시 교육과 인격수양을 통해서 이를 고쳐나가야 비로소 최종의 목적에 다다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맹자와 순자의 출발점이 비록 다르다고 하여도 결국 이상적인 인격을 추구하는 귀착점은 같다고 하겠다.

 

이러한 유교의 낙관적인 인생관은 자연히 생명을 귀중하게 여기는 방향으로 전개된다. 맹자는 말하기를 군자는 곧 쓰러질 것 같은 위험한 담장 아래에 서 있지 않는다고 하였다. 곧 넘어질 것을 명백하게 알면서도 고집스럽게 그 담장 아래에 서 있는 것은 결코 용감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저 목숨을 부지하고 살아남는 것이 대단하다는 것은 아니다. 유교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현실을 중시하고 회피하지 말라는 것이다. 현실을 직시하고 힘써 노력하여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라는 것이다.

 

유교는 인간의 노력을 아주 중시한다. 그래서 공자는 인간의 노력을 다 기울인 연후에 하늘의 명을 기다린다고 하였다. 그저 소극적으로 앉아서 하늘이 준 기회만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우선 적극적으로 노력을 하여 기회를 만들고 그 기회가 무르익으면 이를 실현하라는 것이다.

 

 

유교문화의 가치관

 

유교의 가치관은 다음의 세 가지로 종합할 수 있다. 바로 ▲ 의로움을 보면 용감히 행해야 한다(견의용위(見義勇爲)) ▲ 이익 앞에서는 정당함을 생각해야 한다(견리사의(見利思義)) ▲ 올바름을 위해서는 목숨도 버릴 줄 알아야 한다(사생취의(舍生取義))다.

 

「논어」에서 공자의 제자인 자로가 공자에게 물었다. “어떻게 살아야 비로소 진정한 어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공자가 답하였다. “이익 앞에서는 정당한 것인지를 생각하고, 위험한 순간에 마주해서는 과감히 나아가 맞서며, 아무리 오래된 약속이라 하여도 이미 승낙한 일은 반드시 실천한다면 진정한 어른이라고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유교문화가 추구하는 인생의 가치관이라 하겠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복음의 정신을 유교문화에 젖어 있는 동아시아 사람들에게 전파하는 일은 그들의 문화를 이해하고 존중하는 바탕 위에서 가능하다. 그런데 앞서 살펴보았듯이 유교문화는 인간관계의 질서를 중시하고, 도의를 중시하며, 현실을 중시한다. 만일 이를 무시하고 인간의 질서와 하느님의 질서, 도의와 하느님의 뜻, 현세와 내세 등의 개념을 서로 다른 의미로 해석하고 적용한다면 우리가 전하고자 하는 복음은 당연히 유교문화와 충돌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 오히려 하느님의 질서 안에 인간의 질서가 담겨 있고, 하느님의 뜻과 도의가 다르지 않으며, 하느님의 나라가 지금 여기에서 구현되어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하고 적용할 때 우리가 전하고자 하는 복음이 유교문화 안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게 되는 것이다. [가톨릭신문, 2020년 3월 29일, 이근덕 신부(동아시아복음화연구원 연구위원 · 수원교구 사목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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