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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미술ㅣ교회건축

한국 가톨릭 미술, 여성 작가들: 남용우 마리아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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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9-10-29 ㅣ No.679

[한국 가톨릭 미술, 여성 작가들] 남용우 마리아 화백 (상)


유리를 화선지 삼아 동양화 여백과 먹의 농담 잘 드러내

 

 

남용우 화백의 유리 그림. 1971년 작.

 

 

필자가 남용우(마리아, 88) 화백에 대해 알게 된 것은 박사학위 논문을 한창 준비하고 있던 때였다. 우리나라 스테인드글라스 역사에 대한 기존의 연구가 전혀 없다시피 한 상황에서 발로 뛰며 자료를 수집하던 중에 한 지인으로부터 “우리나라 스테인드글라스에 대해 제대로 공부하고자 한다면 남용우 작가를 반드시 만나야 하고, 서울 흑석동성당에 그의 작품이 있으니 직접 가 보라”는 말을 들었다.

 

당시는 ‘스테인드글라스 작품이 있는 곳은 일단 다 가 보자’고 마음먹고 있던 때여서 그 길로 흑석동성당을 방문했다. 그리고 그곳의 스테인드글라스와 모자이크 작품을 살펴보고 작가를 직접 만나기 위해 연락처를 어렵사리 알아냈다. 작품의 스케일로 보나 작가의 이름으로 보나 막연하게 남성 작가일 것으로 생각했는데 막상 통화를 해보니 여성 작가여서 매우 놀랐던 기억이 있다. 그렇게 남용우 화백과의 만남을 통해 우리나라 스테인드글라스 역사의 매우 중요한 부분을 연구하고 서술할 수 있었다.

 

1931년 충북 음성에서 태어난 남용우 화백은 1970년대에 한국의 대표적인 스테인드글라스 1세대 작가로 활약했다. 그는 한국인 처음으로 독일에서 스테인드글라스와 유리 모자이크 기법을 연구했고, 현재까지 국내 가톨릭교회와 개신교회 100여 곳에 스테인드글라스와 유리 모자이크작품을 남겼다.

 

남 화백은 초기작부터 최근작에 이르기까지 유럽 현대 스테인드글라스 양식을 수용하면서 전통적인 요소와 융합시키려는 노력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작품 활동 외에도 국내의 유리 관련 자료 수집과 대학 강의를 통해 당시 초보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던 스테인드글라스에 대한 국내의 인식을 높이기 위해 노력했다.

 

- 남용우 화백과 1955년 작품 ‘머리병풍’. 국전 특선작인 '머리병풍'은 한자를 추상화한 작품이다.

 

 

남용우는 1948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 입학해 응용미술을 전공했다. 그는 재학시절 미술대 학장이었던 장발(루도비코)의 영향으로 기초 구성에 대한 탐구에 몰두했다. 이와 같은 그의 학문적 탐구는 재학 시절과 1954년 졸업 후 이듬해 제1회 개인전에서 선보인 추상적 경향의 구성 작품에 그대로 반영됐다. ‘囍’(1952), ‘후리-홈(Free form)’(1953)과 같은 그의 초기작은 상형문자와 선, 원, 사각형과 같은 기초적 조형 요소의 가능성을 실험한 작품이다.

 

여학생이 많지 않던 시절 미술대학에 입학한 남 화백은 “남학생 못지않게 잘해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그야말로 죽기 살기로 최선을 다해 작업에 임했다”고 한 인터뷰에서 회고한 바 있다. 그래서인지 그의 작품에는 여성 작가로서의 섬세함이 드러나기도 하지만 ‘춘하추동(春夏秋冬)’(1955), ‘무제’(1955), ‘환희’(1955)와 같이 규모 있는 작품에서는 남성 작가 못지않은 힘과 대담함이 엿보인다. 이와 같은 대규모 작품 제작은 훗날 그가 교회의 대규모 스테인드글라스와 모자이크를 제작하는 데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남용우는 1954년 졸업 후에 진명학교 교사로 재직하면서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1954년 성미술전에 ‘성모칠고(聖母七苦)’와 ‘환희(歡喜)’를 출품했고, 1955년 서울 동화백화점 화랑에서 제1회 개인전을 개최했다. 또한, 1955년 국전에 ‘머리병풍’을 출품해 특선으로 입상했다. 당시 그의 작품은 주로 한자(漢字)와 기초 형태를 응용한 추상적 경향을 보인다. 그러나 성미술전 출품작인 ‘성모칠고’와 ‘환희’는 기존의 작품 경향과는 달리 구체적인 인물과 사건을 묘사한 구상작품으로 완성됐다. 성모 마리아가 예수 때문에 겪게 되는 일곱 가지의 큰 고통을 그린 ‘성모칠고’는 남용우가 1954년 성미술전에 출품한 작품으로 앞서 「숨은 성미술 보물을 찾아서」에서 자세히 소개한 바 있다.

 

- 남용우 화백의 1955년 작품인 ‘환희’는 한복을 입은 단아한 성모 마리아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1955년 작인 ‘환희’는 한복을 입은 단아한 성모의 모습을 그린 작품인데 원작의 소재가 불분명하다. 1954년 성미술전을 기획했던 장발은 당시 작가들에게 보다 한국적인 성화를 그리도록 했다. 그 결과 예수와 성모, 성인들을 한국인의 모습으로 표현하거나 동양 화법으로 그린 성화들이 등장했는데 남용우의 ‘환희’ 역시 이러한 한국적인 표현의 한 예이다. 1920년대에 이미 장발이 한복차림의 한국 성인들을 그린 유화를 제작하였지만, 주로 서양인으로 표현되던 예수와 성모, 성인들까지 한국적으로 표현한 것은 1950년대부터이며 1954년 성미술전 출품작을 통해 이와 같은 경향을 잘 파악할 수 있다.

 

기초 구성과 순수 형태에 대한 탐구를 중심으로 한 남 화백의 초기 작품 세계는 1958년 독일 유학길에 오르면서 새로운 전환기를 맞았다. 대학 재학 시절부터 장발에게 스테인드글라스와 모자이크를 배우라는 권유를 받았던 남 화백은 1958년 독일 쾰른 공예학교에 입학해 다양한 재료와 표현 기법을 이용한 벽화와 스테인드글라스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재료의 특성을 살려 화면의 독특한 질감을 표현하고자 했던 남 화백의 노력은 독일 유학을 기념하는 1958년 제2회 개인전에서 엿볼 수 있다. 그는 천에 파라핀을 붓고 굳힌 뒤 구겨서 균열을 만들고 그 사이에 짙은 색 염료를 넣어 착색시키거나 흙색 톤을 만들어 내기 위해 화면에 직접 흙을 붙이기도 하면서 독특한 질감 표현을 위한 다양한 실험을 했다.

 

이후 남 화백은 1960년 뮌헨 미술대학교로 옮겨 1964년까지 오버베르거(Oberberger) 교수에게 스테인드글라스를 사사하면서 스테인드글라스와 글라스 페인팅을 통해 유리 고유의 물성에 대해 지속적으로 연구했다. 유리에 대한 그의 관심은 스테인드글라스 제작 외에도 글라스 페인팅을 통한 회화적 가능성에 대한 모색으로 표출됐다. 그는 안틱크글라스와 납선을 이용한 전통적인 스테인드글라스 기법 외에도 투명 백색 유리에 자유롭게 그림을 그리고 가마에 구워낸 소규모 작품들을 여럿 선보였다.

 

이러한 방식으로 1971년에 제작한 유리그림들은 그가 즐겨 그렸던 동양화의 기법과 유리 특유의 물성을 접목시킨 새로운 시도의 결과였다. 산수화(山水畵), 화조화(花鳥畵), 민화에 등장하는 문자도(文字圖) 등을 연상시키는 작품들은 종이와 먹 대신 유리에 안료를 써서 표현했음에도 동양화의 여백과 먹의 농담(濃淡)을 잘 느낄 수 있게 한다. 남용우는 1970년대에 접어들어 이와 같은 유리그림과 함께 본격적으로 국내에 스테인드글라스 작품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가톨릭평화신문, 2019년 10월 27일, 정수경 가타리나(인천가톨릭대학교 대학원 그리스도교미술학과 교수)]

 

※ 남용우 화백의 1955년 작품 ‘환희’ 원작을 찾고 있습니다. 서울대교구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에 있었다는 증언이 있으나 작품 원본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과 제보를 부탁드립니다.

 

 

[한국 가톨릭 미술, 여성 작가들] 남용우 마리아 화백 (하)


신앙과 영성 바탕으로 성경에 입각한 스테인드글라스 제작

 

 

서울 반포성당 스테인드글라스 작품은 남용우 화백의 1970년 대표작으로 추상적 선묘를 반복하는 구성을 보여주고 있다.

 

 

남용우(마리아, 88) 화백은 1970년대부터 국내 교회 건축물에 스테인드글라스를 제작하기 시작해 시기별로 다양한 작품 경향을 보여주었다. 그의 스테인드글라스 작품은 추상 작품이 주를 이루었던 1970년대, 한국적인 요소에 대한 탐구가 이루어졌던 1980~1990년대, 그리고 이 모든 작품 경향이 종합되어 표현된 그 이후의 시기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남 화백이 국내에 처음으로 선보인 스테인드글라스는 1972년에 완성된 서울 초동교회의 작품이다. 개신교회의 특성에 맞게 중앙의 십자가 외에는 구체적인 형상이 생략되었고 빨강, 파랑, 흰색의 강렬한 색 대비가 강조된 추상적 경향을 보여준다. 비슷한 시기에 제작된 서울 동신교회(1972), 서울 영락교회(1975)의 스테인드글라스 역시 추상적 경향의 작품이다.

 

초기작에 해당하는 1970년대 작품에는 반복되고 꿈틀거리는 다이내믹한 원형의 움직임이 두드러진다. 이처럼 역동적인 느낌은 작가 개인의 성향을 드러낸 것이기도 하다. 힘있고 역동적인 초기 작품 경향에 대해서 작가는 대학 재학 시절 여학생으로서 가졌던 욕심과 본래 대담했던 성격이 반영된 것이라고 이야기한 바 있다.

 

추상 경향의 작품은 개신교회뿐만 아니라 1970년대에 제작된 가톨릭교회의 스테인드글라스에도 공통으로 나타나 있다. 의왕 성 라자로 마을 성당(1975)과 서울 반포성당(1979)의 스테인드글라스가 1970년대의 대표작이다. 이 두 작품은 작가가 독일에 체류하던 시기의 작품으로 독일 데릭스(Derix) 공방에서 제작한 것이다.

 

1975년에 완성된 의왕 성 라자로 마을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는 현재 모습과는 달리 십자고상 뒤편의 긴 창과 왼편의 원형 창에만 설치되었다. 이후 수차례에 걸쳐 스테인드글라스가 추가로 제작되어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작가는 한센병 환우촌 성당이라는 점과 수호성인이 예수 성심, 성모 성심이라는 점을 고려하고 이를 추상적으로 풀어 스테인드글라스에 반영하며 한센병 환우들이 희망을 잃지 않도록 하는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했다.

 

1970년대의 또 다른 대표작인 서울 반포성당 스테인드글라스는 성당 입구 창과 성당 내부 창이 모두 추상 패턴으로 완성되었다. 입구 창은 ‘시작이고 끝이다’라는 성경 말씀을 형상화했으며, 성당 내부 창은 전체적으로 단순하고 추상적 선묘가 반복되는 구성을 보여주고 있다. 환희의 신비를 형상화한 장미꽃 모티프를 단순화해 표현한 2층 성가대석 스테인드글라스는 직선적인 느낌의 구성에 원형의 리듬감을 더해주고 있다. 마치 회화 작품과 같이 다양한 선묘로 완성된 반포성당 스테인드글라스는 1970년대 작가의 추상 경향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 서울 서문교회의 스테인드글라스 작품은 남용우 화백이 1980년대 이후 고민해온 직선과 곡선의 조화를 통한 선의 미를 잘 보여주고 있다.

 

 

남용우 화백은 1970년대 추상 시기를 거쳐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서양화풍에서 더 나아가 보다 한국적인 조형 언어를 찾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1981년 서울 백상기념관에서 개최된 ‘남용우 유리그림 전’에서 강렬한 색채와 표현적인 터치를 특징으로 하는 작품들을 선보였다. 그러나 교회 건축의 스테인드글라스를 제작하는 데 있어서는 이전과 달리 한층 단순하고 정돈된 느낌을 가진 구성과 색감을 보여주었다. 10여 년의 작업 과정을 거치면서 서양의 색을 넘어서 한국의 상황과 정서에 더 잘 맞는 작품을 제시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남 화백은 한국적인 조형 요소를 다름 아닌 ‘선’에서 찾고자 했다. 선에 대한 탐구는 남 화백의 초기 회화 작품에서부터 시작된 것으로 그가 대학 재학 시절부터 꾸준히 동양화를 탐구해온 결과이기도 하다.

 

1980년대에서 1990년대에 걸쳐 남 화백의 스테인드글라스를 제작하면서 성당 안 공간뿐만 아니라 성당 밖의 풍경을 아우르는 경향을 보여주었다. 즉 바깥에 펼쳐진 자연 풍경에서 포착한 선과 태양 광선의 효과를 스테인드글라스 조형 요소에 직접적으로 포함시키고자 했다. 1995년 작품인 서울 서문교회 스테인드글라스는 작가의 이와 같은 조형 의도를 잘 드러낸 작품이다. 낮을 상징하는 구름과 밤을 상징하는 불길의 인도를 받는다는 시편의 말씀에서 영감을 받은 이 작품은 직선과 곡선의 조화가 잘 이루어졌으며 개신교회의 요구에 맞게 구체적인 이미지를 최대한 생략하고 선의 흐름과 색조의 변화를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두 개가 한 쌍을 이루고 있는 긴 창에는 1980년대부터 등장하는 격자 창살 무늬가 도입됐고 그 위로 유려한 곡선의 흐름이 겹쳐지고 있다. 이는 1980년대 이후 작가가 고민해온 직선과 곡선의 조화를 통한 선의 미를 잘 보여준다. 서문교회의 스테인드글라스를 제작하면서 남 화백은 교회 바깥으로 내다보이는 풍경과 스테인드글라스에 표현된 선적 요소들이 하나로 융합될 수 있도록 유리의 투명함을 최대한 살렸다. 그리고 이를 위해 페인팅도 생략했다. 구체적인 이미지나 상징을 최대한 제거하고 오로지 선이 만들어내는 움직임과 색조의 변화만을 이용해 작품에 음악적인 울림을 만들어내고 있다.

 

- 남용우 화백은 스테인드글라스뿐 아니라 유리 모자이크 작품도 남겼다. 사진은 서울 흑석동성당에 설치한 ‘카나의 혼인잔치’ 유리 모자이크화.

 

 

1년 뒤에 제작된 서울 오금동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는 같은 시기 작품임에도 뚜렷한 차이점을 드러내고 있다. 작가는 작품을 구상하는 데 있어 개신교회와 가톨릭교회의 성격에 맞는 차별화된 표현을 보여주고자 했다. 철저하게 성경 내용에 입각한 작품을 고집해온 남용우는 가톨릭교회 스테인드글라스를 제작하는 데 있어 자신만의 뚜렷한 작품관을 드러내고 있다. 그는 가톨릭교회와 개신교회 가장 큰 차이를 성사권의 유무로 보고 그 차이점을 확실히 드러낼 수 있는 작품을 제시하고자 했다.

 

남용우 화백은 1990년대 중반에서 현재까지 초기의 표현적인 성향과 1980년대 이후 선적인 요소의 탐구 그리고 가톨릭의 성사를 특징짓는 상징들의 도입이 모두 종합된 양식의 작품을 보여주고 있다. 서울 흑석동성당, 천진암성지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와 야외 모자이크 작품에서 힘 있는 역동적인 구성과 단순화되고 정돈된 정적인 요소가 적절히 조화된 남 화백의 작품 경향을 잘 느낄 수 있다.

 

남 화백은 스테인드글라스뿐만 아니라 국내 여러 곳에 유리 모자이크 작품을 설치했고 그 규모도 상당하다. 남종삼(요한) 성인의 증손녀이기도 한 남용우 화백은 깊은 신앙심을 바탕으로 아흔이 다 된 지금도 성경에 입각한 교회 미술 작품을 연구하는 데 여념이 없다. 그의 작품에 담긴 신앙과 영성이 보다 많은 이들에게 전해지기를 기대하며 남 화백의 작품 활동이 오래도록 계속되기를 바라본다. [가톨릭평화신문, 2019년 11월 3일, 정수경 가타리나(인천가톨릭대학교 대학원 그리스도교미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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