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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하느님의 종 133위 약전: 정여삼 바오로 · 최천여 베드로와 최종여 라자로 형제 · 고의진 요셉 · 배문호 베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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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9-10-01 ㅣ No.1852

하느님의 종 ‘이벽 세례자 요한과 동료 132위’ 약전


정여삼 바오로 · 최천여 베드로와 최종여 라자로 형제 · 고의진 요셉 · 배문호 베드로

 

 

정여삼(바오로, 1822~1866)

 

정여삼은 충청도 직산 출신으로 일찍이 신앙을 받아들여 생활하다가 용인의 삼배일 점촌(현 경기도 용인시 이동면 덕성리 삼배울)으로 이주했다. 그는 이곳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조카 정덕구(야고보) 가족과 함께 열심히 교리를 실천했다.

 

1866년 11월 26일 광주 포교 세 패가 삼배일로 쳐들어와 천주교 신자들을 잡아갈 때 정여삼도 그의 모친과 조카 정덕구와 정마티아, 예비신자 이화실 등과 함께 체포됐다. 포교들은 이들을 한 방에 몰아넣고는 팔다리를 쇠사슬로 묶은 뒤 폭행을 가했다. 이때 심하게 맞은 정여삼과 정덕구, 이화실은 정신을 잃었다. 포교들은 이어 정덕구의 동생 정마티아에게 술과 고기를 사오라며 쇠사슬을 풀어줬다. 마티아는 포교들이 술과 안주를 실컷 먹고 잠에 빠지자 가족과 함께 뒷산으로 도망쳤다. 혼절했다 새벽에 깨어난 정덕구도 삼촌인 정여삼과 이화실을 흔들어 깨웠으나 일어나지 못하자 혼자서 몰래 빠져나와 도망쳤다.

 

정여삼과 이화실은 이후 경기도 광주로 압송돼 순교했다. 당시 정여삼의 나이는 44세였다.

 

 

최천여(베드로, 1812~1866)ㆍ최종여(라자로, 1825~1866)

 

최천여와 최종여 형제는 경상도 출신으로 부모로부터 일찍이 신앙을 받아들였다. 그는 박해를 피해 이곳저곳 떠돌다가 충청도 목천 소학골 교우촌(현 충남 천안시 북면 납안리)에 정착해 신앙생활을 했다. 1868년 경기도 죽산에서 순교한 최제근(안드레아)이 그들의 조카이다. 또 1910년 사제품을 받은 최문식(베드로) 신부가 그들의 후손이다.

 

최천여와 최종여 형제는 소학골 교우촌에서 교우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자식들을 열심히 가르치고 교회 가르침에 따라 교리를 실천했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기 전까지 그들은 페롱 신부와 칼래 신부로부터 성사를 받았다.

 

박해가 소학골 교우촌에 미친 것은 칼래 신부가 그곳을 떠난 직후인 1866년 11월 14일이었다. 목천 포교들이 들이닥쳐 최천여와 종여 형제를 비롯해 배문호(베드로), 고의진(요셉) 등을 체포했다. 당시 최종여는 병에 걸려 걷기조차 힘들었는데 포교들은 그의 목을 매어 동료들과 함께 목천으로 압송했다. 이들은 목천 관아에서 심문을 받은 다음 공주 진영으로 이송됐고 그곳에서 교수형으로 그해 12월 14일 순교했다. 당시 최천여의 나이는 54세, 최종여의 나이는 41세였다.

 

최천여ㆍ종여 형제와 동료 순교자들의 시신은 강치운이 수습해 소학골 인근에 안장했다. 이들의 무덤은 현재 대전교구 성거산성지 경내에 있다.

 

 

고의진(요셉, 1847?~1866)

 

고의진의 어릴 때 사정은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고의진의 아버지 고시수(야고보)가 홍주 원머리(현 충남 당진시 신평면 한정리)에 살 때 처음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으며, 이후 가족들을 데리고 목천 소학골로 이주해 살았다.

 

고의진은 소학골 교우촌에 살며 배문호와 친하게 지내면서 “박해를 받으면 함께 순교하자”고 약속했다. 고의진은 최천여ㆍ종여 형제와 배문호와 함께 1866년 11월 14일 소학골 교우촌에서 체포돼 목천으로 압송됐다. 그는 옥에서 어떠한 형벌에도 굴하지 않았으며 배문호와 함께 아침저녁으로 기도를 바치면서 서로 순교를 권면했다. 이들의 모습을 본 배교자 두 사람은 통회해 포교들에게 자수한 뒤 함께 공주 진영으로 압송되기도 했다.

 

고의진은 1866년 12월 14일 공주 진영에서 교수형으로 순교했다. 당시 그의 나이 대략 19세였다.

 

 

배문호(베드로, 1843~1866)

 

배문호는 1800년 청주에서 순교한 복자 배관겸(프란치스코)의 4대 후손이고, 1868년 서울에서 순교한 배화첨(베드로) 회장의 손자이다. 그의 집안은 충청도 면천 양제(현 충남 당진시 순성면 양유리)에 살았으나 배관겸이 순교한 후 목천 소학골로 이주해 생활했다.

 

어렸을 때부터 신심이 깊었던 그는 혼인 후에도 아내와 동정부부로 살았다. 1866년 11월 14일 체포된 그는 목천 관아를 거쳐 공주 진영으로 압송된 후 1866년 12월 14일 교수형으로 순교했다. 당시 그의 나이 23세였다.

 

[가톨릭평화신문, 2019년 9월 29일, 리길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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