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0일 (토)
(백) 부활 제3주간 토요일(장애인의 날)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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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부] 교부들의 사회교리14: 주님의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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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9-03-27 ㅣ No.514

[교부들의 사회교리] (14) 주님의 평화


비폭력을 위한 양심적 저항 지지

 

 

“군인의 선서(sacramentum)를 거룩한 성사(sacramentum)보다 우위에 두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겨야 하겠습니까? …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고 선언하시는 주님께 칼을 들이대는 것이 합당하겠습니까? 말다툼조차 어울리지 않는 평화의 아들이 전쟁을 치러야 하겠습니까? 자신이 겪는 모욕에도 보복하지 않는 이가 쇠사슬과 감옥, 고문과 형벌에 심부름해야 하겠습니까? 

 

평화의 아들이 그리스도 말고 다른 이들을 위해 더 많은 경계 근무를 서고, 심지어 주님의 날에도 그리스도가 아닌 것에 복무해야 하겠습니까? 세례 때 이미 끊어버린 신전을 위해 경비를 서야 하겠습니까? 

 

바오로 사도가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던 우상의 신전(1코린 8,10)에서 저녁밥을 먹어야 하겠습니까? 낮에 구마예식으로 쫓아냈던 그자들이 그리스도의 옆구리를 찌른 창에 기대어 잠을 자는 밤중에 그들의 불침번을 서야 하겠습니까? 

 

그리스도께 맞서는 깃발을 들고 다녀야 하겠습니까? 이미 하느님께 성사의 표지(標識, signum)를 받고서도 황제에게 문장(紋章, signum)을 청해야 하겠습니까? 천사의 나팔소리에 죽은 이가 되살아나기를 바라듯 군악대의 나팔소리에 죽은 이가 들썩이기를 바라야 하겠습니까? 

 

우상 앞에 분향하는 것조차 불법인 그리스도인, 그리스도께서 불의 형벌을 면제해 주신 그리스도인이 군대 규율에 열정을 불태워야 하겠습니까? 군대 보직 가운데 하느님의 법을 거스른다고 판단되는 불법들을 얼마나 많이 볼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달고서 빛의 진영에서 어둠의 병영으로 내려가는 것 자체가 불법입니다.”(테르툴리아누스, 「화관」 11,1-4)

 

 

타협을 모르는 복음적 열정

 

카르타고에서 태어난 테르툴리아누스(160~220년경)는 라틴어로 저술한 최초의 그리스도인이다. 타협할 줄 모르는 그의 기질은 교회에 빛과 그림자를 동시에 안겨 주었다. 2000년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엄격주의 교회론의 선구자이기도 했지만, 세속적 절충주의에 맞서 복음의 급진성과 혁명성을 지키는 용맹한 선봉대장 노릇도 했다. 말년에는 제도 교회를 비판하고 성령의 은사를 강조하는 몬타누스주의에 기울어진 독특한 이력을 지닌 교부다.

 

 

양심적 병역 거부

 

테르툴리아누스는 요샛말로 하면 ‘양심적 병역 거부’를 주장한 최초의 교부다. 그는 주님께서 남겨 주신 평화는 세상의 평화와 다르다는 사실을 철두철미하게 알아들었다. 십자가에 매달리시기까지 온갖 형태의 폭력을 거부하신 스승의 길을 에누리 없이 걸어가는 것이 제자들의 본분이라 여겼다. 모름지기 그리스도인은 국방의 의무를 짊어져야 하는 현실에서도 비폭력 평화의 신념을 굽히지 말아야 한다고 믿은 까닭이다. 

 

교부들 가운데 가장 투철한 평화주의 사상을 지녔던 테르툴리아누스의 복음적 이상은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제국 교회가 시작되면서 ‘정당한 전쟁’(bellum iustum) 논리에 오랜 세월 묻혀버렸다. 그러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래 비폭력을 위한 양심의 저항을 존중하고 권고하는 현대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은 중세의 거룩한 전쟁론과 정당한 전쟁론을 넘어 ‘거룩한 평화’와 ‘정당한 평화’의 길로 나아가라고 재촉하고 있다.(「간추린 사회교리」 502)

 

[가톨릭평화신문, 2019년 3월 24일, 최원오(빈첸시오, 대구가톨릭대 유스티노자유대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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