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0일 (토)
(백) 부활 제3주간 토요일(장애인의 날)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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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부] 성 아우구스티노의 행복으로 가는 길: 나는 행복해지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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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6-04 ㅣ No.483

[성 아우구스티노의 행복으로 가는 길] 나는 행복해지고 싶습니다

 

 

사람마다 자신이 추구하는 인생의 목적이나 가치가 조금씩 다릅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마침내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를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행복’이라 할 수 있습니다. 행복에 대한 추구는 인간에게 자연스러운 욕구라고 말할 정도로 인간 본성 안에 깊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 누구도 불행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경제 형편이나 정신 상태가 아무리 어렵다 해도, “나는 불행해지고 싶다”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모든 이가 “정말 행복해지고 싶습니다. 나는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고 싶습니다” 하고 말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행복에 대한 보편된 의지를 드러냅니다. 이는 우리가 이 세상을 사랑하고 있다는 표현입니다. 이 세상의 삶이 다툼, 폭력, 억압, 아픔, 질병, 고통으로 점철되어 있다 해도 우리는 세상을 사랑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세상을 사랑한다는 점과 우리가 세상에 속해 있다는 점을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태어난 이상 우리에게는 세상을 사랑해야 할 의무와 사랑할 권리가 있습니다.

 

 

행복이란 무엇일까요, 무엇이 행복일까요?

 

우리는 세상에 대한 사랑을 바탕으로 저마다 행복이 무엇인지 정의합니다. 어떤 사람은 삶의 풍요와 여유로움이 행복이라고 여겨 세상의 명예와 부를 얻고자 노력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자기의 삶을 나누는 것이 진정한 행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이 글을 읽으시는 한 분 한 분께 “행복이 무엇일까요?”라고 묻는다면, 모두 다른 대답을 하실 것입니다. 취업을 앞둔 대학생은 “제가 원하는 직장에 취업하는 것이 행복이겠죠”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공부하는 청소년은 “원하는 대학의 학과에 들어가 열심히 공부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형편이 어려운 사람은 “경제적 어려움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라고 이야기할 것입니다. 이렇게 행복에 대한 정의는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몇 뼘밖에 안 되는 인생에서 현세의 삶을 희망합니다

 

그러나 세상에 대한 사랑의 이면에는 현세의 삶이 끝나는 데 대한 두려움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사랑하고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살기를 바란다 해도, 이 세상의 삶이 끝난다는 사실을 결코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인간 삶의 무상함에 대해 성경은 “모든 인간은 풀이요 그 영화는 들의 꽃과 같다. 주님의 입김이 그 위로 불어오면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든다. 진정 이 백성은 풀에 지나지 않는다”(이사 40,6-7)라고 고백합니다. 인간은 본인이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매일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존재입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순간부터 죽음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이 세상에 태어난 순간부터 ‘시간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고, 그 시간의 소용돌이는 인간을 잡아당기고 한순간도 내버려두지 않으면서 마침내 죽음으로 몰아갑니다.

 

유아기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또는 죽음에 이르기까지 얼마 안 되는 짧은 인생에 대해 시편은 이렇게 외칩니다. “보소서, 당신께서는 제가 살 날들을 몇 뼘 길이로 정하시었습니다”(시편 39,6). 다른 시편에서도 인생은 기껏해야 70년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저희의 햇수는 칠십 년 근력이 좋으면 팔십 년, 그 가운데 자랑거리라 해도 고생과 고통이며 어느새 지나쳐 버리니, 저희는 나는 듯 사라집니다”(시편 90,10).

 

요새는 ‘100세 시대’라고 이야기하며 예전에 비해 인간의 수명이 늘었다고 하지만, 시편이 ‘몇 뼘밖에 안 되는 삶’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인간의 삶은 짧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토록 짧은 삶을 이 세상에서 지내는데도 우리는 현세의 삶을 사랑합니다. 짧은 생애 동안 고통 가운데 행복한 날들을 찾으며 끝모르는 장수를 바라고 있는 것이 우리 인간의 모습입니다.

 

 

행복 선언에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완성케 하는 계명이 담겨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다시 한 번 묻게 됩니다. ‘과연 행복은 무엇인가?’, ‘우리가 행복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인간의 행복에 대한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 마태 5-7장에 나오는 산상 설교, 특별히 5장에 등장하는 ‘행복 선언’에 주목하게 됩니다.

 

오래전부터 사람들은 산상 설교를 신약성경의 핵심 메시지 또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장 핵심적 가르침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노(354-430년)도 “산상 설교에서 그리스도인 삶의 완전한 양식을 발견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을 완전하게 형성하는 모든 계명이 그 안에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산상 설교는 사람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길을 여덟 가지 단계로 보여줍니다. 우리는 이를 ‘행복 선언’이라 부릅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행복 선언이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에 맞게 형성된 새로운 인간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이 행복 선언을 통해 하느님께 어떻게 나아가고 그분을 소유할 수 있는지 제시합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 이전에 이레네오 성인(140-202년경)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 인간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는 하느님을 향유하기 위해서이다. 곧 하느님을 느끼고 사랑하고 그분을 소유하기 위해서이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그분의 뜻에 맞게 살면서 그분을 느끼고 사랑하고 향유하는 방향으로 우리의 신앙생활이 나아가야 하겠지요. 그러기에 우리는 행복이 무엇인지, 행복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다시 한 번 찾아야 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행복을 바랍니다. 그런데 ‘행복하기를 바란다’와 ‘나는 행복하다’의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나는 행복하다’고 말하면 지금 이 순간이 정말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나는 행복해지기를 바란다’고 말하면 지금 덜 행복하거나 불행하기에 행복을 찾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참으로 행복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 변종찬 신부는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에서 교부학과 고대·중세 교회사를 가르치면서 학생들과 함께 하늘을 바라보며 산다.

 

[성서와 함께, 2014년 1월호(통권 454호), 변종찬 마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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