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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 식별력과 책임의 성교육7: 미디어가 주입하는 사랑의 공식, 믿어도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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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1-13 ㅣ No.1462

[이광호 소장의 식별력과 책임의 성교육] (7) 미디어가 주입하는 ‘사랑의 공식’, 믿어도 될까?


영화 같은 사랑 꿈꿨는데… 남은 건 후회와 눈물

 

 

정교하게 조종당하는 연애 방식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연애 경험이 있을 것이다. 커플들은 ‘사랑의 공식’을 따른다. 처음 만나 커피숍에 가서 이야기를 하고, 영화를 보고, 눈 내리는 날 가로등 밑에서 키스를 하고, 성관계를 가지는 이 ‘사랑의 공식’은 대중매체가 우리 무의식에 각인시킨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사실을 알지 못한다. 대중매체는 교묘하게 우리 가치관 속으로 스며들어 온다. 우리는 점점 대중매체가 전해주는 ‘사랑의 공식’을 받아들이고 자연스럽게 생각하게 된다. 

 

나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이 수업을 듣기 전까지만 해도 이 과정을 당연시여기며 그래야만 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매주 강의를 들으면서 내가 대중매체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피해자가 되어 버린 사람 중의 한 명이라는 것을 알았다.

 

연인과 스킨십을 할 때 여성은 분위기에 약하다는 것은 누구나 다 잘 아는 사실일 것이다. ‘아 여기서 거절하면 분위기가 정말 이상해질 텐데, 날 싫어하면 어쩌지?’ 하는 걱정 때문에 원치 않는 스킨십을 거절하지 못한 적이 많았고, 결국에는 내 모든 것을 허락하게 되어 버렸다.”

 

대학교 1학년 여학생이 지난 5월에 제출한 보고서다. 언제 성관계를 했는지를 물어보니, 수능 마치고 곧바로 소개팅을 해서 만난 남자친구와 만난 지 한 달 만에 했다고 말했다. 지극히 평범한 가정에서 성장한 대학 신입생의 사례다. 비판과 식별의 과정이 전혀 없이 상업적 영상물을 통해서만 성의식을 형성하면, 이런 성행동을 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처음에는 혼란스럽고 온갖 걱정이 다 들었지만 그것도 잠시, 주변 친구들을 보니 나만 이런 경험한 것도 아니고, 한 번 두 번 횟수가 늘어날수록 당연하게 생각하게 됐다. 그러나 어느날 나는 현재 남자친구에게 대중매체 수업을 듣고 진지하게 얘기를 꺼내 보았다. 정말 만약에 내가 임신을 하게 되면 어떻게 할 것이냐고, 그러자 남자 친구는 걱정하지 말라고 자기가 다 책임진다고 했다.” 

 

대학교 1학년 남학생이 무슨 책임을 어떻게 진다는 것일까? 이 책임진다는 말은 성관계를 지속하기 위한 허풍에 불과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예전이면 안심하고 넘어갈 나였지만 현실적인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아이를 낳을 경우, 학교는 어떻게 다니며 양육 문제는 어떻게 할 것이고 부모님에게 죄스러운 마음 또한 네가 책임질 것이냐고. 낙태를 할 경우라면 내 몸에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기면 책임질 수 있는 능력이 있냐고. 그러자 남자 친구는 말문이 막혔고 할 말을 잃었다.”

 

 

주입된 생각에서 주체적인 생각으로

 

필자가 ‘미디어와 성’을 주제로 수업을 할 때 “성관계를 하지 말라”든가 정결이라는 단어는 말하지 않는다. 거센 저항과 무익한 대립이 생기기 때문이다. 다만, 성관계는 대학생의 주체적 결정에 의한 자유이지만 성관계가 시작되면 깊이 고민해봐야 할 여러 문제가 있다고 슬쩍 정보를 흘려준다. 이 여학생은 이를 속기사처럼 받아적었고, 모텔방에서 남친에게 청문회하듯이 하나하나 따져물었는데, 남친은 그 어떤 질문에도 제대로 된 답을 하지 못했다. 여학생은 정신이 번쩍 들었고, 뭔가 자신의 눈을 깜싸고 있던 막이 벗겨지는 체험을 했다.

 

 

책임의 가치를 배울 수 없는 남자 청소년들

 

그렇다면 이 남학생은 아주 나쁜 청년일까? 그렇지 않아 더 문제다. 우리나라에서 남자 아이들이 평범하게 크면 딱 이 남친처럼 된다. EBS 프로그램 ‘노래방 엄마의 우리 아이 진짜 성이야기’에 나온 열여섯 살 중3 남학생 네 명의 대화를 보자.

 

“너희는 하고 싶은 나이가 언제야?” 

“나는 솔직히 지금 할 수 있다면 할 거야.”

“나는 고1이나 고2 때 많이 하고 고3 때 공부해서 좋은 대학에 갈 거야. 그게 내 목표야.”

“네가 고딩일 때 누구랑 해보고 싶어?” 

“내가 보기엔 ○○는 여자친구랑 했을 것 같아 .” 

“이 나이에 그걸 왜 해?” 

“할 수도 있지. 이미 한 것 같은데?”

“여친이 못 하게 해. 내가 하려고 했는데, 여친이 거부해.”

“만약에 네 여친이 하자고 했어. ‘나랑 한 번 하자’ 이러면 할 거야?” 

“한 번씩은 해야지. 할 건데 이 나이에 할 건 아니라는 거지. 이 나이에 하긴 좀 무섭긴 해.”

“난 한 번 해보고 싶어. 꿈이야.” 

“했는데 임신이 됐어. 그러면 어떡해. 그러니까 무서워서 못하는 거지.”

“그건 그래. 뒷감당이 없다는 조건하에 한다면 지금이라도 할 거야.”

“그럼 난 열네 살때부터 했겠다.”

 

평범한 중3 남학생들의 성의식이 여과없이 드러난 대목이다. 아들들의 대화를 몰래 촬영하고 엄마들은 옆방에서 실시간으로 아들들의 대화를 들었다. 아이들 입에서 나오는 말을 들은 엄마들의 아연실색하는 표정이 세대간 성의식의 메울 수 없는 격차를 보여준다. 

 

여기서 확인한 것처럼 남자 청소년들이 대중문화와 포르노그래피 등을 통해서만 성을 배우게 되면 책임이라는 가치가 머릿속에서 완전히 망각된다. 왜 그럴까? 상업적 영상물이 보여주는 성의 세계에는 책임의 내용이 모두 다 의도적으로 삭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집밥 먹고 집에서 크는 아이나 집 밖으로 나간 아이나 이 시대에는 성적 가치관이 똑같다. 같은 선생(상업적 영상물)에게 성을 배우기 때문이다. 

 

이런 상태의 남학생들에게 콘돔으로 대표되는 피임 교육을 시킨다면 그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가뜩이나 희박한 책임 의식을 교육자가 지우개로 빡빡 지워주는 것이다. 그러니까 피임, 즉 책임을 피하는 기술은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질 수 없는 악덕이며, 교육자가 할 일이 아닌 것이다.

 

 

방향을 바꾸게 하려면? 깨닫게 해줘야 

 

“그동안 남자 친구에 의해 내가 이런 사람과 사랑으로 둔갑한 섹스를 해온 것이구나 하는 허망한 느낌이 들며 사랑의 공식에서 벗어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정신이 번쩍 들면서 나는 더 이상 육체적 사랑을 추구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그러나 남녀 관계에서 ‘전진은 있지만 후진은 없다’는 말대로 남친은 쉽게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고, 결국 나는 헤어지려고 준비 중이다.”

 

이 여대생은 결국 헤어졌다. 깨지지 않았다면 이 커플은 어떤 길을 갔을까? 학기가 끝나고 방학을 되니 이 둘은 모텔에 더 자주 갔을 것이다. 또 여행도 갔을 것이다. 영화와 드라마에서 연애하면 여행 가라고 줄기차게 배웠기 때문에 여행을 안 가는 것이 더 어렵다. 여행가면 임신할 가능성이 상당히 높아진다. 얼마 안 가 임신 확인하고, 남친의 대다수는 도망친 상태에서 낙태하는 것이 적지 않은 여대생들이 겪는 고통이다. 미디어가 주입하는 ‘사랑의 공식’에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 실제 삶이다.

 

“무심결에 신청하여 듣게 된 교양수업이 나의 가치관을 다시 정립시켜 줄 것이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한 일이다. ‘뭐 어때, 남들도 다 그러는데, TV 보니까 연예인들이 그러던데’라는 사고방식을 가진 채 연애를 하다 보니 죽음의 문턱 바로 앞에까지 왔으면서 그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이 시대의 성교육은 ‘덮어놓고 순결’,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순결’이 되어서는 안 된다. 성의 진실과 실체를 깊이 있게 깨닫게 해주는 방식으로 진행돼야만 한다. 그래야만 여대생처럼 가던 길을 돌리는 방향 전환(메타노니아)을 하게 된다. 이런 교육이 가능하려면 교육자가 준비돼야 하는데, 교육자 양성이 결코 쉽지 않다. 장기적인 교육 투자가 절대적으로 요청되지만 미디어 리터러시 성교육 전문가 양성을 위한 투자는 극미한 수준이다.

 


자랑과 부러움으로 환상만 증폭시키는 소셜 미디어

 

천주교 청년들은 좀 다를까. 대학생 교리교사들도 연애하면 똑같이 모텔 가고 여행 간다. 또 그 사진을 페이스북에 올린다. 그러면 친구로 연결돼 있는 성당 청소년들은 그 사진에 “선생님 부러워요. 축하해요” 등의 댓글을 단다. 교리 선생님이 여행 가서 애인과 재미있게 노는 사진을 본 청소년들은 ‘나도 연애해서 저렇게 여행 가야지’ 하는 소망을 품는다. 자랑과 부러움이 실시간으로 결합되면서 ‘이성 교제=성관계’라는 학습이 순식간에 이뤄지는 것이다.

 

여행 후 임신을 확인하는 교사가 적지 않다. 결혼으로 책임지기보다는 낙태하고 깨지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그러면 수술 후 회복실에서 사진 찍어서 “내가 여행가고 성관계가 포함된 연애를 하다가 지금 이렇게 헤어지고 낙태한다”라는 솔직한 글을 페이스북에 올릴까? 이런 걸 올려야 친구로 연결된 청소년들이 ‘아! 저렇게 살면 잠시는 재미있지만 싸우고 깨지고 낙태하고 결국 불행하게 되는구나!’하고 깨달을 수 있는데, 이런 고통스러운 진실은 페이스북에 절대 안 올린다.

 

그러니까 영상이 주도하는 소셜 미디어에서는 욕망과 환상만 유통될 뿐, 진실과 진리는 은폐된다. 영상매체를 통해서는 청소년들이 진실을 접하고 진리를 깨닫기가 상당히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대에는 영상물이 주입하는 ‘사랑의 공식’이 얼마나 허황된가를 깨우쳐주는 미디어 리터러시 성교육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가톨릭평화신문, 2018년 1월 14일, 이광호 베네딕토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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