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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철학ㅣ사상

시 읽어주는 신부: 보이는 것을 바라는 것은 희망이 아니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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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1-10 ㅣ No.350

[시(詩) 읽어주는 신부] 보이는 것을 바라는 것은 희망이 아니므로

 

 

사람은 자신의 시대와 자신의 세대를 살아갑니다. 물론 사람은 때때로 다른 시대를 상상할 수 있고 다른 세대와 더 공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대부분 자신의 시대를 자신의 세대와 더불어 느끼며 살아갑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더 그런 것 같습니다. 나와 동년배의 세대들이 무엇을 느끼며 살아 왔는지, 그들이 생을 어떻게 이해하며 살아 왔는지, 또 그들이 어떤 생각으로 이 시대의 생을 지나가고 있는지 궁금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동년배들의 생각을 읽을 수 있는 책에 먼저 손이 갑니다. 저와 비슷한 또래의 철학자 김영민, 소설가 임영태, 이승우, 고종석의 글이 나오면 늘 챙겨 봅니다. 물론 저보다 젊은 세대 사람들의 글도 관심 있게 지켜봅니다. ‘아, 새로운 세대는 또 다른 방식으로 느끼고 상상하며 살아가는구나.’ 하는 느낌을 받을 때 한편으로는 묘하고, 한편으로는 즐겁습니다. 새로운 세대의 감성과 정서와 사유를 훔쳐보는 것도 분명 기쁜 일입니다.

 

일반적으로 보면 청소년 시절에는 시대와 세대를 뛰어 넘는 고전을 읽으며 자신의 생각을 정립합니다. 하지만 세대를 의식하기 시작하는 청년 시절에는 대개 자기보다 조금 앞선 세대의 글을 읽으며 자신의 사유를 키워갑니다. 젊은 시절 저에게 많은 영향을 준 세대는 문학 평론가 김현의 세대, 즉 4.19혁명 세대와 그 이후의 세대였습니다. 그 세대의 소설과 시와 평론을 읽으며 청춘의 시절을 보냈던 것 같습니다. 아직도 여전히 그 세대의 글이 익숙하고 정겹습니다. 또한 저 역시 이제 늙음의 시기로 들어섰기 때문에 저보다 먼저 늙음을 마주했던 그 세대의 생각과 성찰이 궁금하기도 합니다. 그들이 자신의 노년과 생의 후반부를 어떤 느낌과 생각으로 건너가고 있는지 말입니다. 그들의 젊은 시절 상상과 사유가 저에게 어떤 자극을 주었듯이, 그들의 늙은 시절의 상상과 사유가 어떤 깨우침을 주기도 합니다.

 

하나의 문학 작품 안에는 저자의 영역, 작품(텍스트) 자체의 영역, 그리고 독자의 영역이 있다고 흔히 말합니다. 문학지상주의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작품 자체의 의미와 미학이 가장 중요할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작품 자체보다는 작품에 드러난 저자의 느낌과 상상과 사유가 더 궁금합니다. 무엇이 그를 이런 느낌으로 이끌었을까요. 어떤 상상이 이런 사유의 무늬를 그리게 한 것일까요. 또 다른 한편으로 그 문학 작품이 촉발시킨 나의 느낌과 사유를 밀고 갑니다. 저자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텍스트의 맥락과는 별개로 그저 나에게 어떤 감흥과 충격을 준 단어와 문장과 표현들과 이미지들에 더 사로잡히기도 합니다. 결국 작품 자체의 의미보다는 작품에 반응하는 독자인 나 자신의 상상과 느낌을 더 중요시한다는 의미입니다. 어찌 보면 참 이기적인 독법(讀法)입니다. 작품 자체보다 저자와 독자인 나를 더 중요시하는 읽기입니다. 이것은 어쩌면 언어보다도 사람과 삶에 대한 궁금증에서 출발한 독서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시를 읽을 때도 저의 이러한 읽기 성향은 여전히 작동됩니다. 시 자체보다는 시와 시인을 늘 연결시켜 읽습니다. 또한 언어가 갖는 창조적 힘에만 의존하는 시보다 사람과 삶에 대한 깊은 느낌과 성찰을 드러내는 시를 더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1939년생 마종기 시인은 아동문학가 마해송 선생의 아들이며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에서 소아방사선과 의사 생활을 오래한 시인입니다. 그의 시는 대부분 “간절하고 겸손하고 다정하고 순결한”(권혁웅) 특성을 보여줍니다. 따뜻함, 소박함, 깨끗함, 그리움의 단어들이 그의 시 안에는 흘러 넘칩니다. 대중친화적 시가 많습니다. 사실 저는 마종기 시인의 시를 젊은 시절부터 읽은 것이 아닙니다. 제가 마종기 시인의 시를 처음 접한 것은 서품 축일에 어느 수녀님의 축하 카드 안에서였습니다. 마종기 시인의 시 가운데 대중적으로 가장 많이 알려진 ‘우화의 강 1’이라는 시였습니다. 미국에서 귀국한 후 잠시 본당 신부 생활을 할 때 시를 인용하며 강론을 한 적이 많았습니다. 당연히 가톨릭 신앙인인 마종기 시인의 시들을 차용하기가 쉬웠습니다. ‘물빛 1’, ‘눈 오는 날의 미사’ 등 마종기 시인의 시들이 제 강론에 자주 등장했습니다. 특히 “내가 죽어서 물이 된다는 것을 생각하면 가끔 쓸쓸해집니다.”는 구절로 시작해서 “그리고 나는 내가 죽어서 물이 된 것이 전연 쓸쓸한 일이 아닌 것을 비로소 알게 될 것입니다.”라는 구절로 끝나는 ‘물빛 1’은 그리스도교 신앙과 영성의 본질과 특성이 잘 표현된 시로 기억됩니다.

 

하지만 정직하게 말해 저 자신의 문학적 감수성과 취향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마종기 시인의 시가 그렇게 매력적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람과 삶과 세상에 대한 마종기 시인의 따뜻한 시선과 감성은 충분히 공감하고 좋아하지만 말입니다. 아마도 제가 갖고 있는 지적 허영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종기 시인의 시들 안에는 생의 이면과 깊이를 포착해내는 칼날 같은 사유의 날카로움이 없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마종기 시인 역시 정직하게 자신의 시에 대해 고백하고 있습니다. “나는 내 시가 한국의 문학사에 남기보다는 내 시를 읽어준 그 사람의 가슴에 남아주기를 바란다.”, “시는 애초부터 내게 사랑의 대상이었지 분석과 해석을 요구하는 수수께끼가 아니었다.”(『당신을 부르며 살았다』)고 말입니다. 마종기 시인에게 시는 “허름한 목청”과 “구수한 맛들이” 있는 방식으로 “평범한 것은 대개 친절하고 따뜻”하다고 믿는 사람들이 “무리수 없이 감칠맛 나는 정성”으로 노래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연신내 유혹’)

 

 

경상도 하회 마을을 방문하러 강둑을 건너고

강진의 초당에서는 고운 물살 안주 삼아 한잔 한다는

친구의 편지에 몇 해 동안 입맛만 다시다가

보이는 것을 바라는 것은 희망이 아니므로,

향기 진한 이탈리아 들꽃을 눈에서 지우고

해 뜨고 해 지는 광활한 고원의 비밀도 지우고

돌침대에서 일어나 길떠나는 작은 성인의 발.

보이는 것을 바라는 것은 희망이 아니므로,

피붙이 같은 새들과 이승의 인연을 오래 나누고

성도 이름도 포기해버린 야산을 다독거린 후

신들린 듯 엇싸엇싸 몸의 모든 문을 열어버린다.

머리 위로는 여러 개의 하늘이 모여 손을 잡는다.

보이는 것을 바라는 것은 희망이 아니므로,

보이지 않는 나라의 숨, 들리지 않는 목소리의 말,

먼 곳 어렵게 헤치고 온 아늑한 시간 속을 가면서.

 

 

“보이는 것을 바라는 것은 희망이 아니므로”라는 시입니다. 마종기 시인의 시 가운데 저에게 가장 인상적인 시입니다. 시인의 품성과 신앙심과 삶의 태도가 자연스럽게 배어있는 시입니다. 마음으로 소리 내어 읽기만 해도 괜히 몸의 어느 한 구석이 따뜻해지는 느낌이 들게 하는 시입니다. 시인은 시의 제목이기도 한 로마서 8장 24절의 구절을 후렴구처럼, 3·3·4의 구절들 속에 세 번이나 반복해 읊조리고 있습니다. 묘한 울림으로 다가옵니다. “보이는 것을 바라는 것은 희망이 아니므로.”

 

우리가 무엇을 바라며, 무엇을 부르며, 무엇을 그리워하며 살아가고 있는지 시인이 묻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아직도 서로 부르고 있는 것일까.”(‘이름 부르기’) “같이 늙어 가는 사람아,/ 들리냐.//…같이 저녁을 맞는 사람아,/ 들리냐.//…같은 길 걸어가는 사람아,/ 들리냐.”(‘길’) 시인은 “오랜 세월 당신을 부르며”(『당신을 부르며 살았다』) 살아온 것 같습니다. 시인에게 당신은 장소이기도 했고, 사람이기도 했고, 자연이기도 했습니다. 하회마을과 강진의 다산초당은 서울에서 멀리 있는 곳입니다. 중심에서 벗어나 있는 변두리의 공간이며 일상의 삶과 유배의 공간입니다. “돌침대에서 일어나 길떠나는”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은 가난과 겸손의 사람입니다. 그리스도교 역사 안에서 어쩌면 가장 예수님을 닮은 사람입니다. 새들과 야산과 하늘은 그저 우리 곁에 언제나 선물로 주어진 자연입니다. 시인에게 이처럼 당신은 중심에서 밀려난 허름한 변두리의 공간이며, 가난하고 겸손한 사람이며, 소박하고 욕심 없는 자연입니다. 시인의 삶의 태도가 잘 드러납니다.

 

시의 제목으로 사용된 로마서 8장은 개인적으로도 참 좋아하는 성경구절입니다. 물론 로마서 8장 전체의 내용은 시련과 환난 속에서도 성령을 통한 구원에의 희망을 드러내는 사도 바오로의 힘찬 증언이지만, 우리네 삶의 실제 현실에 대한 정직한 성찰과 문학적인 표현을 담고 있어 늘 마음이 끌리는 내용입니다. “피조물이 허무의 지배 아래 든 것은 자의가 아니라 그렇게 하신 분의 뜻이었습니다.”(20절)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지금까지 다 함께 탄식하며 진통을 겪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22절) 우리 생의 운명과 삶의 여정에 대한 사도 바오로의 놀라운 통찰이 담겨져 있습니다. 또한 신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로마서 8장은 그리스도교 종말론의 핵심 사상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가볍게 말하면 종말론은 주님께 대한 희망에 기초하여 삶을 끊임없이 신앙적 방식으로 살아내라는 일종의 그리스도교적 세계관이며 실존의 윤리학입니다. 신앙적 삶의 태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 신앙적 삶의 태도를 마종기 식으로 설명하면, 호들갑스럽지 않고 담담하게 우리에게 주어진 생의 운명을 견뎌내며 평범한 일상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작은 사랑을 실천하며 사는 태도일 것입니다. 사실 구원은 우리의 노력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 생의 운명을 잘 견뎌내며, 세속의 물질적 성취라는 거짓 희망이 아닌 하느님께 참된 희망을 두는 일입니다. 그러나 현실에서 참 아득하게 보이는, 그래서 보이지 않는 것처럼 여겨지는 하느님께 대한 희망의 실낱을 놓치지 않도록 노력하는 일은 무척 어렵습니다. 시인 역시 “보이는 것을 바라는 것이 희망이 아니므로”라는 말을 세 번이나 다짐합니다. 반복해서 의지를 표현한다는 것은 그 태도를 견지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반증입니다.

 

하지만 힘듦에도 참된 희망이 갖는 힘을 노년의 마종기 시인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내가 세상과 작별할 때에도 나는 희망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 희망은 아마 날개가 되어줄 것이다. 내가 가진 작은 희망들 때문에 나는 누구라도 용서할 힘이 생겼다. 내 손을 보라, 허영이 치유되는 침묵의 소리. 손해보고 상처 받았다고 괴로워하던 남루한 내 생을 안아주면서 당당하게 가벼워지라고 희망은 오늘도 내게 말해준다.”(‘희망에 대하여’)

 

[월간빛, 2018년 1월호, 정희완 요한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조직신학 교수, 안동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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