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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48: 12세기 (2) 영성 생활에 스콜라학이 끼친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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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11-05 ㅣ No.1055

[전영준 신부의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 (48) 12세기 ② 영성 생활에 스콜라학이 끼친 영향


이성에 쫓겨 수도원 담장 안에 갇힌 ‘영성 생활’

 

 

중세 후기로 접어들면서 유럽 전역에서 일어나기 시작한 학문의 발전은 교회 안팎에 ‘신앙과 이성’ 사이의 조화와 갈등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따라서 서방 교회는 그리스도교 신앙을 재조명하는 가운데 영성 생활을 축소시키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이 당시 교회에서 일어난 새로운 학문의 흐름을 ‘스콜라학(Scholasticism)’이라고 불렀습니다.

 

 

대학의 출현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재발견

 

12세기 전후로 유럽 사회에는 대학을 설립하고 학문을 연구하는 풍토가 급속도로 확산되었습니다. 1088년 이탈리아 북부 볼로냐(Bologna)에 중세 유럽 최초의 대학이 설립되었습니다. 당시 볼로냐 대학은 법학을 중심으로 운영한 대학으로서 교회법과 시민법을 가르쳤습니다. 1109년 파리(Paris)에 프랑스 최초의 대학이 설립되었습니다. 파리 대학은 인문학을 중심으로 운영한 대학으로서 철학과 신학의 주요 과목을 가르쳤기 때문에, 파리 대학이 중세 유럽 최초의 대학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실제로도 파리 대학은 유럽 전역에 많은 영향을 끼쳤으며, 중세 중기 이후에 서방 교회에서 활발하게 학문 활동을 했던 신학자들 대부분이 파리 대학에서 공부했습니다. 12세기 중반에 잉글랜드 남부 옥스퍼드(Oxford)에 또 하나의 중요한 대학이 설립되었습니다. 옥스퍼드 대학은 파리 대학에서 공부했던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 설립한 대학으로서 늦게 설립된 만큼 신학, 법학, 의학, 교양 과목 등 다양한 학문을 가르쳤습니다. 이러한 대학들은 처음에 교회 밖에서 설립되어 세상 학문 발전에 기여했지만, 서방 교회도 차차 대학의 운영과 학위 수여에 교회의 권위를 부여함으로써 신학을 연구하는 교회 대학으로서 지위도 인정받았습니다.

 

그리스도교는 이미 교부 시대부터 그리스 철학을 활용해 영성 생활을 조명했습니다. 교부들은 성경을 주해하면서 플라톤(Plato, 기원전 428/27~348/47) 사상으로 그리스도인의 영적 여정을 설명했습니다. 하지만 플라톤 철학은 그리스도교 교리가 수용할 수 없는 오류를 담고 있었기 때문에 그 활용이 제한적이었습니다. 그런데 12세기에 유럽 사람들은 마침 라틴어로 작품이 번역된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기원전 384~322) 사상에 눈을 돌렸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은 이성과 경험 및 자연의 원리를 근거로 현상과 사태를 설명하기 때문에 신앙과 이성의 모호함을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었습니다. 중세에 이러한 철학 연구 경향을 ‘스콜라 철학’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중세 지성인들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맹목적이라고 생각하고 비판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교는 선교를 위해서라도 신앙을 합리적으로 설명할 필요를 갖게 되었습니다. 특히 계시 진리에 기반을 둔 신앙을 맹목적으로 믿으라고 강요할 수 없었기 때문에, 중세 신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과 형이상학을 활용해 이성과 조화를 이루면서 신앙을 설명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계시 진리를 객관적인 진리로 설명하는 학문 경향을 ‘스콜라 신학’이라고 불렀습니다.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과 문답을 통한 신학 교육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354~430) 사상에서도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이라는 주장이 있었습니다. ‘스콜라 철학의 아버지’라고 불린 켄터베리의 안셀무스(Anselmus Cantuariensis, 1033/34~1109)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가르침을 참고해 스콜라 철학을 발전시키면서 신앙을 이성으로 논증하는 신학을 발전시켰습니다. 안셀무스는 저서 「프로슬로기온(Proslogion)」에서 신앙인이 자신의 신앙을 이해하고 싶어 한다는 의미에서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fides quaerens intellectum)’이라는 주장을 하면서 ‘나는 이해하기 위해 믿는다(credo ut intelligam)’라는 공식(公式)을 언급했습니다. 또한 안셀무스는 저서 「모놀로기온(Monologion)」에서 삼위일체 교리 논증의 근거를 성경에서 찾지 않고, 오로지 이성을 통해서 찾으려고 시도했습니다. 결국 이러한 변화는 고대 교부 신학을 끝맺고 중세 교의 신학을 시작하는 변곡점이 되었습니다.

 

안셀무스의 학문 방법을 보다 체계화한 사람은 한때 ‘스콜라 신학의 아버지’라 불린 페트루스 아벨라르두스(Petrus Abaelardus, 1079~1142)였습니다. 아벨라르두스는 철학의 ‘보편(普遍) 문제’를 정리했습니다. 아벨라르두스는 플라톤의 관념(觀念)을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재(實在)에 적용시켜 온건한 실재론을 주장하면서 신앙의 가르침도 조직적으로 체계화시켰습니다. 그런데 보편이 개별적인 사물에 앞서지 않고, 개별적인 사물 속에 존재한다는 아벨라르두스의 주장은 신앙 문제에서 비판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두스(Bernardus Claraevallensis, 1090~1153)는 아벨라르두스가 모든 것을 면전에서 직접 볼 수 있다고 함으로써 인간 이성으로 하느님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는 교만한 주장을 한다고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결국 1141년 상스(Sens) 교회 회의에서 아벨라르두스는 단죄되었습니다.

 

중세 스콜라 신학자 중에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은 ‘명제의 대가’라고 불린 페트루스 롬바르두스(Petrus Lombardus, 1095~1160)였습니다. 처음에 롬바르두스는 성경 주석에 매진했습니다. 이후 롬바르두스는 신학을 교육하는 데 필요한 새로운 방법론 및 교재가 필요하다는 점을 느끼고 「명제집(Libri Sententiarum)」을 저술했습니다. 롬바르두스는 저서에서 삼위일체 하느님, 창조주 하느님과 피조물, 육화하신 예수 그리스도 및 성사에 대해 대부분 아우구스티누스의 작품들을 인용하며 설명했습니다. 수수하다 못해 지루하기까지 했던 이 작품의 출현으로 당분간 서방 교회는 성경 교육보다 신학 교육에 더 매달리는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신앙이 이성 중심으로 조명받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베르나르두스는 저서 「아가 강론(Sermones super Cantica Canticorum)」에서 안셀무스의 주장을 빗대어 ‘말씀을 추구하는 영혼(anima quaerens Verbum)’이라고 언급하면서 인간 영혼은 인간의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말씀을 향유할 뿐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또한 카르투지오회 제9대 원장이었던 귀고 2세(Guigo II, ?~1188)는 저서 「수도자들의 사다리(Scala Claustralium)」에서 정감적인 묵상 중심으로 실천하는 ‘거룩한 독서(Lectio Divina)’라는 기도 방법을 소개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대부분 사람들은 사변적인 이성 중심의 신학 방법론을 추종했으며, 일부 수도원 담장 안의 수도자들만 성경 묵상 중심의 신학 방법론을 가까스로 유지할 뿐이었습니다. 결국 이성 중심의 신학 방법론은 지적인 호기심을 채우는 데 급급했을 뿐, 영성 생활을 홀대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가톨릭평화신문, 2017년 11월 5일, 전영준 신부(가톨릭대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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