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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초대 조선교구장 브뤼기에르27: 앵베르 신부를 후임으로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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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11-05 ㅣ No.936

[초대 조선교구장 브뤼기에르] (27) 앵베르 신부를 후임으로 추천


좌절할 때마다 칠전팔기로 끊임없이 다른 길 모색

 

 

- 산서대목구청 자리에 지어진 구급촌 구서대가 천주당. 2004년에 봉헌된 이 성당은 1901년에 지어졌다가 문화대혁명 때 부서진 성당을 본따 지었다.

 

 

제2대 조선대목구장 앵베르 주교의 편지와 산서(山西)대목구장 살베티 주교의 묘지명에서 산서대목구청의 위치를 오늘날 지도상에서 정확히 찾아낸 이는 조현범(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다. 브뤼기에르 주교를 1년간 자신의 집에 머물게 하며 조선 입국로를 모색하게 했던 살베티 주교의 묘지명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살베티 주교는 북경 서북쪽 5㎞ 떨어진 해전(海甸)에서 산서ㆍ섬서대목구장으로 주교품을 받은 후 7년을 지내다 기현(祁縣) 구급촌(九汲村)으로 가서 1843년 도광 23년 양력 9월 21일에 73세를 일기로 그곳에서 선종했다. 그리고 광서 17년에 태원부의 묘지로 이장됐다.” 

 

살베티 주교의 묘지명과 앵베르 주교의 편지에서 가르치는 산서대목구청 자리가 기현 구급촌으로 정확히 일치한다. 브뤼기에르 주교가 1833년 10월 10일 도착해서 1년을 체류한 바로 장소를 드디어 찾아낸 것이다. 오늘날 이곳 주소는 산서성 진중시 기현 성조진 구급촌 구서대가 천주당이다. 기현은 춘추전국시대부터 형성된 고대 도시로 서역으로 가는 교통 요지였다. 오늘날 북경에서 기현까지 고속철로 3시간 40분이면 당도한다. 고속철은 북경 서역에서 하루에 한 번 있다.

 

- 산서대목구 주교좌성당 부지에 새로 지어진 구서대가 천주당 내부.

 

 

현재 구급촌 천주당은 중국 진중교구에 속해 있다. 2016년 9월 말 현재 신자 수는 500여 명이고 2개의 보육원을 운영하고 있다. 지금의 성당은 2004년에 봉헌했다. 브뤼기에르 주교가 머물던 산서대목구 주교좌성당은 현재 성당의 동북 방향에 자리하고 있었다. 주교관이 있는 부속건물이 딸려 있었다. 산서 제일의 신학교도 1802년부터 1870년까지 이곳에 터했다. 1840~1850년 사이에 주교좌성당을 증축했으나 오래 수리하지 않아 1901년 현재 성당 자리에 성당을 새로 지었다. 하지만 이 성당은 문화대혁명 때 파괴됐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산서대목구에 도착하자마자 산서 북쪽 지방을 거쳐 만리장성을 넘어 만주 지역을 통해 조선으로 입국하는 여행길을 모색했다. 이 길은 훗날 제2대 조선대목구장 앵베르 주교 입국로의 주요 거점이 된다. 또 김대건, 최양업, 최방제 신학생의 마카오 유학길로도 이용된다.

 

브뤼기에르 주교가 만리장성을 넘어 만주 땅으로 들어가기 위해선 북경교구장 서리인 피레스 페레이라 주교의 허가증이 무엇보다 필요했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남경에서 산서대목구까지 오는 동안 이 지역 관할권자인 페레이라 주교가 허락하지 않아 미사를 비롯한 모든 성사를 집전하지 못했다. 그런데 페레이라 주교가 중국 요동 지방 신자들에게 “자신의 편지를 지니고 있지 않으면 그 어떤 신부도 받아들이지 마라”고 지시했다는 소문이 구급촌까지 들려왔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페레이라 주교에게 ‘여행 허가증’을 요청했으나 그 어떤 답도 받지 못했다.

 

1802년부터 1870년까지 운영됐던 산서대목구 신학교 터를 알리는 비석이 구급촌 구서대가 천주당에 세워져 있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1833년 11월 18일 조선 교우들에게 편지를 써서 왕 요셉을 북경으로 보냈다. 편지에는 “이듬해인 1834년 겨울 조선으로 입국할 계획이니 준비하라”는 지시가 있었다. 그러나 조선 신자들은 북경에 오지 않았다. 조선과 중국 사이 국경 도시인 변문에서 여항덕 신부를 만나 조선으로 돌아가 버린 것이다. 이 때문에 브뤼기에르 주교가 1834년 겨울에 조선으로 입국하려는 계획은 어이없게도 물거품이 되고 만다.

 

북경 주교 허락 없이는 중국인 신자들의 도움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절감한 브뤼기에르 주교는 1834년 초부터 중국과 조선의 접경 지역에 연락 거점으로 사용할 집 한 채를 장만할 계획을 세운다. 변문 근처에 프랑스 선교사들에게 협조할 중국인 신자 가족을 정착시켜 조선 신자와의 연락망을 확보할 셈이었다. 

 

산서대목구장 요아킴 살베티 주교는 이 일에 적합한 신자 2명을 추천했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이 둘을 면담했다. 둘 중 능력도 뛰어나고 의지력도 강했던 자는 많은 돈을 요구했다. 의사인 다른 사람은 여행 경비만 대주면 일하겠다고 했다. 그는 “하느님 사업에 동참한다는 열망 한 가지만으로 2~3년간 가족과 떨어져 사는 일도 감수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주교에게 두 가지 전제 조건을 걸었다. 첫째, 조선 신자들이 브뤼기에르 주교를 받아들이겠다는 마음이 확실해야 하며, 둘째, 유럽 선교사가 조선으로 들어가는 일이 가능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주교는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 계획도 마카오 교회의 반대로 무산되고 만다. 마카오의 장상들이 브뤼기에르 주교를 돕겠다고 나선 중국인 신자들을 협잡꾼이라고 반대한 것이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이 계획을 포기하면서 상당히 아쉬워했다. “그들이 착각한 것입니다. 이들은 잘 알려진 사람들이며 산서 주교가 뽑은 사람들이었습니다.”(브뤼기에르 주교 「여행기」에서)

 

브뤼기에르 주교는 마지막으로 서만자(西灣子)에 있는 라자로회 설 마태오 신부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설 마태오 신부는 브뤼기에르 주교가 마카오에서 출발하기 전 라자로회 대표부의 장 바티스트 토레트(1801~1840) 신부에게 추천받은 사제다. 그는 프랑스 라자로회 선교사들이 북경에서 추방당할 때 끝까지 남아 있다가 라자로회 선교부를 서만자로 옮긴 인물이었다. 설 신부는 “서만자에 거처를 마련해 달라”는 브뤼기에르 주교의 요청에 “기꺼이 맞이하겠다”는 답장을 보냈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산서대목구를 떠나기 전 자신의 후임으로 사천(四川)대목구에서 활동하던 앵베르 신부를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장 움피에레스 신부에게 추천했다. “조선 선교지가 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이 아니라면 어찌 제가 앵베르 신부 같은 선교사를 사천에서 빼낼 수 있겠습니까? 앵베르 신부는 모든 점에서 보기 드문 인물입니다. 저는 저희 선교지 중 어떤 곳에서도 그런 사람을 본 적이 없습니다.”(브뤼기에르 주교가 1834년 6월 5일 산서대목구에서 움피에레스 신부에게 쓴 편지에서)

 

[가톨릭평화신문, 2017년 11월 5일, 글 · 사진=리길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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