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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초대 조선교구장 브뤼기에르20: 왕요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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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8-05 ㅣ No.917

[초대 조선교구장 브뤼기에르 주교] (20) 왕요셉


선교 열정 충만한 중국인 청년과 함께 조선으로 향하다

 

 

조선 입국을 준비하며 페낭에 머물고 있던 브뤼기에르 주교는 1832년 7월 25일 장 앙투안 뒤브와 신부가 보낸 편지로 조선대목구가 설정됐고 자신이 초대 조선대목구장으로 임명됐음을 알게 됐다.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이 조선대목구를 설정한 지 10개월 만이다.

 

장 앙투안 뒤브와(Jean Antoine Dubois, 1766~1848) 신부는 파리외방전교회 회원으로 1792년 인도 퐁디셰리의 말라바르 선교지에 파견됐다가 1823년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 지도 신부로 부임한 후 1836년부터 1839년까지 신학교 교장 신부로 활동했다.

 

자신이 조선대목구장으로 임명된 것을 알게 된 브뤼기에르 주교는 더 망설이지 않았다. 편지를 받은 그날 오후 5시에 샴대목구 부대목구장의 권한으로 동료 신부들을 소집해 싱가포르 교우들에 관한 자치권이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보호권이 아닌 파리외방전교회에 있음을 분명히 하고, 싱가포르 총독을 만나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오후 7시 클레망소 신부와 함께 배로 싱가포르로 갔다. 페낭에 함께 머물던 샤스탕 신부가 조선 선교를 자원하면서 그와 동행을 희망했으나 브뤼기에르 주교는 승낙하지 않았다.

 

1832년 8월 17일 브뤼기에르 주교 일행은 싱가포르에 도착했다. 싱가포르는 1819년부터 영국의 식민지였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영국인 총독을 만나 “교황께서 싱가포르 교회의 사목권을 프랑스 선교사들에게 주셨는데 고아 참사회의 선교사(포르투갈 선교사)들은 이 결정을 맹렬히 비난하고 있다”면서 “파리외방전교회가 싱가포르 사목의 전권을 갖고 있다”고 분명히 했다. 그러면서 클레망소 신부를 싱가포르 사목 전담자로 소개하면서 성당을 지을 부지 한 곳을 총독에게 요청했다. 영국인 총독은 브뤼기에르 주교의 요청을 받아들여 ‘교황청의 결정을 따른다’는 협정에 서명했다.

 

피에르 쥘리엥 마르크 클레망소(Pierre Julien Marc Clemenceau, 1806~1864) 신부는 파리외방전교회 출신으로 1831년 샴대목구에 파견됐다. 그는 1832년 몇 개월 동안 싱가포르에 체류하다가 방콕으로 가서 사망할 때까지 그곳에서 사목했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싱가포르 사목권 문제를 해결한 후 곧바로 교황청과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가 있는 마카오로 갈 계획이었다. 그래서 페낭에서 떠날 때 조선까지 중국의 길을 안내할 길잡이 한 명을 선발해 여행 동반자로 삼았다. 그가 바로 왕요셉이다.

 

청년 왕요셉은 중국 쑤저우 사람이었다. 그의 성은 왕(Ouang), 도(Tao), 밤(Vam) 등으로 불렸다. 사진은 왕요셉의 고향인 쑤저우의 한 풍경. 리길재 기자.

 

 

왕요셉은 페낭신학교 신학생이었으나 병으로 학업을 그만둔 중국인 청년이었다. 샤스탕 신부가 페낭의 중국인사회 전교회장으로 그를 브뤼기에르 주교에게 추천할 만큼 왕요셉은 화교들 사이에 대단히 활동적인 교리교사로 알려져 있었다. 페낭신학교 교장 신부인 미셀 샤를 롤리비에(Michel Charles Lolivier, 1764~1833) 신부도 “이 청년은 절대로 쫓겨난 것이 아닙니다. 신학교를 그만둔 것은 건강상의 이유였습니다. 그는 신앙심이 깊고, 신학교에서 가장 우수한 학생 중 하나입니다. 그는 한자를 잘 알고 있으므로 주교님께서 말을 배우시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브뤼기에르 주교 여행기」 중에서)라며 적극적으로 추천했다. 

 

왕요셉 자신도 브뤼기에르 주교와 동행하기를 원했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그를 직접 면담했다. 

 

“내가 어디로 가는지 알고 있습니까?” 

 

“네,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은 것 같군요. 나는 중국으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더 멀고 더 위험한 선교지로 파견되었습니다. 그대가 나를 따라가겠다고 고집을 부린다면, 얼마 못 가서 죽게 될 수도 있습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다 알고 있습니다. 주교님께서는 조선으로 가십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입어 저는 이와 같은 여행에 따르는 위험을 무릅쓰고, 또 이 선교 임무 중 생기는 위험에 맞설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무엇보다 하느님을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내어 놓는 것은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열망해야 하는 운명입니다.”(「브뤼기에르 주교 여행기」 중에서)

 

이 말을 들은 브뤼기에르 주교는 왕요셉에게 “나를 따라와도 좋다”고 허락했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여행기에서 왕요셉을 이렇게 평했다. “이 젊은이는 나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가 병약한 관계로 내가 출발하기 바로 며칠 전에 신학교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던 것은 주님의 특별한 뜻에 의한 것이다. 그는 매우 활동적이고 자기 동족들 가운데서는 범상치 않게 결심이 굳세다. 그는 여행 내내 걷거나 혹은 아주 열악한 장비를 이용한다. 건강이 매우 쇠약해진 상태인데도 나를 돕겠다고 벌써 북경에서 파리로 가는 길보다 더 먼 길을 다녔다. 아주 야윈 몸으로 거의 죽어 가는 한 중국인 청년이 내게 그토록 도움이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1832년 9월 12일 왕요셉과 함께 싱가포르에서 마카오로 가기 위한 첫 기착지 마닐라를 향해 배를 타고 출항했다.

 

[가톨릭평화신문, 2017년 8월 6일, 리길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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