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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안중근의 인권 사상과 공동체 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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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5-02 ㅣ No.884

안중근의 인권 사상과 공동체 의식*

 

 

국문 초록

 

안중근(安重根)의 인권 사상(人權思想)은 그가 배운 유학(儒學)과 천주교(天主敎)의 가르침을 통해서 체득한 겸손(謙遜)과 용서(容恕)의 덕행(德行)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이러한 인권 사상은 공동체 의식(共同體意識)의 변화와 함께 성장해 갔다.

 

안중근의 공동체 의식은 1897년 천주교 세례와 이에 따른 교회 활동을 통해서 변화했다. 기존의 가문과 마을에만 머물던 그의 소속감은 빌렘 신부가 사목하던 황해도 전 지역의 천주교 신앙 공동체로 확대되었다. 이 시기 그에게 있어서 천주교 신자의 경우에는 황해도 내의 어떤 다른 마을이나 고을에 살아도 다 같이 천주님의 축복을 받고 기본적인 인권을 누려야 할 공동 운명체(共同運命體)였다. 또 천주교를 믿지 않더라도 관가와 권세가들에게 부당하게 압제당하고 수탈당하는 불쌍한 백성들은 그가 도움을 주어야 할 대상이었다. 그래서 그는 이 시기에 옹진군(甕津郡) 신자 이경주(李景周)와 핍박받는 옹진군민을 위해서 해주부 위관 한원교나 서울의 세력가 김중환을 찾아가 해결사와 같은 담판을 벌였던 것이다.

 

안중근은 해서교안(海西敎案)으로 피폐된 교회와 러일전쟁으로 위기에 놓인 조국의 운명을 직시하면서 그가 전력을 다해 헌신해야 할 공동체를 기존의 교회 공동체에서 민족 공동체로 과감하게 바꾸게 된다. 그는 더 이상 가톨릭 공동체의 울타리 내에 머물지 않았고, 청계동과 황해도 교회를 벗어나 진남포로 이주해서 삼흥학교와 돈의학교의 재건과 같은 민족혼(民族魂)을 일깨우는 교육 계몽 운동(敎育啓蒙運動)에 매진했고, 석탄회사 운영과 국채보상운동 참여 등을 통하여 민족경제(民族經濟)의 자립(自立)과 부흥(復興)을 도모했다. 그러나 이마저 일제의 방해로 여의치 않게 되자, 일제 침략 세력을 직접 몰아내기 위한 의병 운동(義兵運動)과 의열 투쟁(義烈鬪爭)에 차례로 뛰어들었고, 그 과정에서 인명 존중(人命尊重)의 인권 사상을 실천함으로써, 민족의 울타리를 벗어난 동양 평화(東洋平和)와 전 세계 인류의 공존공영(共存共榮)을 위한 세계적인 인권 사상을 확립할 수 있었다.

 

 

1. 머리말

 

1) 안중근의 신앙과 사상에 대한 기왕의 연구 성과들

 

안중근(安重根, 토마스, 1879~1910)의 가톨릭 신앙에 대한 연구사 정리는 지금까지 5~6차례에 걸쳐 가톨릭 신자 내지 교회사 연구자들에 의해서 수행되어 왔다. 1980년대 이후 안중근의 사상을 천주교와 관련하여 집중적으로 설명한 최초의 연구자는 이주호이다. 이주호는 안중근을 한국의 천주교인으로서, 애국자였으며, 평신도 사도직 운동의 관점에서도 모범적인 선구자이자 토착화의 모델로 설명했다.1) 1990년대에 와서는 안중근 의거에 대한 교회 내 부정적 견해를 일소하고 독립운동가로서의 정당한 명예를 회복해 주려는 한국 천주교회의 움직임과 맞물려 한국 교회사 연구자들의 집단적 연구 성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최석우 신부를 비롯하여 노길명, 조광, 홍순호 교수 등이 안중근의 가톨릭 신앙과 애국 계몽 운동, 의병 항쟁, 동양평화론, 교회의 반응 등에 대한 상관성을 고찰하는 논문을 발표했다.2) 이 중에서 노길명 교수는 <안중근의 가톨릭 신앙>이란 논문에서, 안중근의 가정적 배경과 가톨릭 입교 과정, 교회 활동, 신앙과 영성, 제도 교회와의 관계 등에 대해서 고찰하였는데, “안중근의 신앙은 국수주의적(國粹主義的)인 것이 아니라 가톨릭교회의 보편주의적 세계관과 민족주의 의식을 조화한 것으로서, 민족의 수난과 고통을 외면한 채 현실에 안주하고자 하는 제도 교회의 선교 정책을 비판하고 인간의 영혼과 육신, 현세와 내세, 개인과 사회를 총체적으로 구원하고자 하는 신앙을 구체적인 행동으로 연결시켜 생활화하고 있었다”고 서술했다.3) 안중근 의사의 신앙심에 대한 교회사학계의 관심은 2000년 11월 4일 명동 가톨릭회관 7층에서 개최된 학술 심포지엄 “2,000년 대희년과 안중근 토마스”를 통해서 다시 한 번 재조명되었다. 이때 발표된 논문들은 한국 천주교회가 불행했던 지난 200년 역사의 오점을 성찰하고 민족 앞에 고해성사를 하는 심정으로 새로 시작되는 3,000년기를 새롭게 맞이하려는 ‘교회 쇄신’의 관점에서 안중근의 신앙과 민족정신 등을 재조명하게 된 것이었다.4) 이 발표에서 차기진은 <안중근의 천주교 신앙과 그 영향>에서 안중근의 교리 인식은 정약종의 《주교요지》(主敎要旨)와 정하상의 <상재상서>(上宰相書) 등의 인식 체계를 계승한 것임을 구체적 교리의 내용 분석을 통해서 조목조목 설명을 전개했다.5) 장석흥은 <안중근의 대일본 인식과 하얼빈 의거>에서 안중근의 문명개화론적 지향, 국권회복 운동의 전개, 동양 평화의 구도 등과 관련된 대일본 인식의 상관성을 고찰하고 하얼빈 의거의 배경이 된 이토 히로부미의 죄상에 대한 안중근의 견해를 분석했다. 그는 안중근 구국 운동의 특징으로서 언제나 정의(正義)와 인도(人道)에 바탕을 둔 점을 지적하고, 안중근은 “제국주의 침략을 배척해도 일본인을 미워하지 않음으로써 자유와 정의를 향한 높은 정신세계에서 구국 운동을 전개하였고 이러한 기초 위에서 동양 평화를 구상했다”고 평가했다.6) 전달수는 <안중근 토마스의 신앙과 덕행>에서, 안중근이 실천한 덕행으로서 그의 신앙심에서 우러나온 항목들을 대범함과 용기(勇德, virtus fortitudinis), 천주를 흠숭하는 경신덕(敬神德, virtus religionis), 의덕(義德, justitia), 효경(孝敬, pietas), 애국심(愛國心, patriae amor), 평화애호가 등으로 나누어 설명했다.7) 정인상은 <안중근의 신앙과 윤리>를 통하여, 안중근에게 있어서 종교 활동은 그 자체가 민족운동의 하나였으며, 민족운동 또한 가톨릭 신자로서의 신앙에 그 뿌리를 두고 있었는데, 서유럽 중심주의 내지 서유럽 문화우월주의적이지도, 국수주의적이지도 않고, 민족 주체의식에 바탕을 둔 보편주의 세계관을 지향했다고 평가했다. 또 안중근은 전교 활동, 민권 수호 활동, 애국 계몽 운동, 독립 전쟁 등의 활동을 하느님의 사랑과 정의와 평화를 이 땅에 이루기 위한 평신도 사도직의 실천으로 판단했으므로, 그의 조국애 또는 애국심도 신앙에서 나온 덕행이었다고 보았다. 또 안중근에게 있어서 조국애, 세계주의, 신앙심은 항상 동시적으로 이해되어야만 하는 상호 긴밀성을 갖는 것으로 이해했다.8) 변기찬은 <안중근의 신앙과 현양에 대한 비교사적 검토>를 통하여, 공동선에 위배된 공권력은 압제로 변질되는데, 이 “압제에 맞서 난폭하고 무자비한 행위를 포기하고 인간의 권리를 옹호하기 위해서 가장 약한 사람들이 취하는 방어 수단을 택하는 사람들은 복음의 사랑을 증언하는 것이다”라는 《가톨릭 교회 교리서》(1903항, 2306항)를 인용하면서 안중근의 의거를 프랑스의 성인 잔다르크(Jeanne d’Arc)의 활동이나 라틴아메리카의 독립 전쟁 등과 비교할 만한 탁월한 신앙심과 애국심의 발로라고 보았다. 그는 무력을 통한 방위를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첫째 공격자가 국가나 국제 공동체에 가한 피해가 계속적이고 심각하며 확실해야 하고, 둘째 이를 제지할 다른 방법이 실행 불가능하거나 효력이 없음이 명백해야 하고, 셋째 성공의 조건들이 수립되어야 하며, 넷째 무력 사용으로 제거되어야 할 재난보다 더 큰 재난과 폐해가 초래되지 않아야 한다는 등의 네 가지 조건에 비추어 안중근의 의거는 이러한 조건들에 위배되지 않는 의전(義戰)이었다고 평가했다.9)

 

안중근의 교리 인식과 신앙심의 관계에 대해서 신학자 황종렬은 안중근의 천명론(天命論)을 주목하고 《안응칠역사》에 나오는 안중근의 교리 이해와 관련된 부분을 ‘안중근편 교리서’라고 평가했다. 그는 이 평가에서 전반적인 관점에서는 《주교요지》와 상통하지만, 관점에 있어서 차이가 난다고 보았다. 즉 《주교요지》는 천주론 중심의 체계적 교리 진술로 기획되고 그렇게 작용했지만, ‘안중근편 교리서’는 인간 존재의 존귀함에 근거하여 그 존귀함의 근원으로서 천주께 대한 본분을 구현할 것을 설득함으로써 도덕-태평 시대와 영세영복의 구원을 열어가도록 초대되고 선포되었다고 평가했다.10) 신운용은 스스로 ‘안중근의 사상을 천주교와 관련지어 본격적으로 기술한 연구자’라고 자부하고 1993년의 석사 논문과 2005년의 발표 논문을 통해서 안중근을 천주교 토착화의 전범(典範)으로 보았으며, 안중근 의거의 사상적 배경을 천명론에서 찾았다. 그는 안중근이 종교인으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천명’(天命)을 ‘한국의 독립’과 ‘동양 평화’임을 깨닫게 되었고, 그 천명을 실천한 결과가 바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것이었다고 강조했다. 동시에 안중근이 일본 천황을 긍정적으로 본 이유는 군주(君主)를 소천주(小天主)로 보는 천주교의 왕권신수설에 근거한다고 주장하면서 안중근이 죽는 순간에도 종용자약(從容自若)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천명을 실천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11) 김수태는 신운용의 박사 논문을 단행본으로 만든 《안중근과 한국근대사》에 대한 서평12)과 이를 확대 · 심화하여 작성한 논문 <안중근과 천주교의 관계에 대한 비판적 검토>13) 등을 통하여 신운용이 말한 안중근의 천명관에 대한 해석을 달리했다. 즉 신운용은 안중근이 말한 천명이야말로 그의 의병 항쟁과 의열 투쟁을 의미한다고 하였으나, 김수태는 안중근이 언급한 천명은 개인의 인권과 존엄성을 지켜주는 평등사상으로 정리되며, 이 평등사상은 개인에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민족과 국가, 세계라는 공동체로 확산되는 것이라고 해석하였다.14) 윤선자는 구한말부터 통감부기와 일제 강점기에 이르는 한국 교회사를 한국사상사의 범위 내에서 연구하면서, 안중근의 계몽 운동, 의열 투쟁과 신앙의 상관관계 등을 해명해왔다. 또 빌렘 신부와 안중근 신앙 및 활동의 상관관계, 안중근 전교활동의 특징들을 파악하는 데 노력해왔다.15)

 

2) 인권(人權), 안중근 사상의 기초

 

필자는 1993년 안중근에 관심을 가진 뒤부터 ‘안중근의 생애와 활동’에 대해 소논문을 작성하였고, 이어서 1994년 <안중근 연보>를 작성하였으며, 2010년 안중근의 황해도 전교 활동 및 교리 인식과 신앙 실천의 측면에 대한 일련의 연구 작업을 진행해왔다.16) 이러한 일련의 작업을 통해서 필자는 안중근의 천주교 교리 인식이 박해 시대 이래 천주교회의 대중적인 교리서였던 정약종 순교 복자의 《주교요지》와 그 아들 정하상 성인의 <상재상서> 등의 영향을 받아 이단배척(異端排斥), 보유론적(補儒論的) 설명, 토착화된 비유로 천주(天主)의 존재와 속성을 설명하는 부분 등을 계승하고 있음을 파악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안중근의 교리 인식은 1901년에 기술된 같은 황해도 출신의 김기호(金起浩, 요한, 1824~1903)의 《봉교자술》(奉敎自述)에 기록된 신앙심과 마찬가지로 박해 시대에는 볼 수 없었던 근대적 인권 개념[天賦人權論]을 도입하여 교리를 설명하거나 믿음을 권유하는 신앙 실천의 측면을 보여준다고 이해했다.

 

본고는 안중근 의사에 대한 기존의 연구자들이 그를 진정한 애국심의 소유자 내지 모범적인 가톨릭 신자, 애국심과 가톨릭 신앙이 혼연일체가 된 영웅, 위인 등으로 평가한 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안중근의 신앙과 신심의 이모저모를 새롭게 해석하거나 짚어보면서 안중근의 사상과 활동은 민족, 국가, 동아시아, 전 세계를 아우르는 보편적인 인권 사상(人權思想)에 기초하여 있으므로 안중근이야말로 하느님 흠숭과 겸손과 용서의 덕을 통하여 공동체 의식(共同體意識)을 확대시켜 나감으로써 인류애를 실천한 인권사상가(人權思想家)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음을 논증하고자 하였다. 오늘날 인권(人權, human rights)의 개념은 그 범위가 계속 확대되고 있지만17), 대체로 “인간에 있어서 기본적이며 양도할 수 없는 핵심적인 권리”18)로 정의된다. 본고에서는 “국가의 횡포로부터 개인인 인간의 자유 및 기본적 권리를 보호하는 데 주안점을 두는 시민적, 정치적 권리”로 규정되는 제1세대 인권 개념뿐만 아니라, 이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권리’ 등 국가의 적극적 개입만이 효율적인 권리의 향유를 보존하는 제2세대 인권 개념 및 개발에의 권리(right to development), 평화추구권(right to peace), 깨끗한 환경추구권(right to a safe environment) 등 국제 사회의 연대에 호소하는 집단적 차원의 제3세대 인권 개념까지도 망라하는 광의의 인권 개념을 사용하고자 한다.19) 아울러 이러한 개념에는 1948년 UN에 의한 세계인권선언과 1968년 테헤란 국제인권회의(International Conference on Human Rights) 및 1993년 비엔나 세계인권회의(World Conference on Human Rights)에서 거듭 확인된 ‘소수자의 보호’와 관련, “소수자가 자신의 문화를 향유하고, 신앙의 자유와 종교 활동의 자유를 행할 수 있다”고 하는 규정까지도 본고 전개의 주요한 이론으로 고려해 두고자 한다.20) 본고의 작성에는 앞서 본문과 각주 7, 8번에서 언급한 전달수, 박재만, 이동호 신부 등의 덕행의 실천, 인권론적 문제 제기 등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음을 밝혀둔다.

 

 

2. 천명(天命) 인식과 인권(人權) 사상

 

1) 교리(敎理) 이해와 천명(天命) 인식

 

안중근은 19세 때인 1897년 1월 중순, 빌렘(Wihelm, 홍석구) 신부에게서 그의 일가 32명과 함께 집단 세례를 받았는데, 세례명은 토마스(Thomas, 多?)였다.21) 세례를 받은 후의 상황에 대해서 안중근은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성서[經文]를 강습(講習)하고, 교리[道理]를 토론(討論)하면서 여러 달이 지나 신앙이 차츰 굳어지고 독실하게 되어 의심이 사라졌다. 천주(天主) 예수 그리스도[耶?基督]를 숭배(崇拜)하면서 날이 가고 달이 가서 몇 해가 지나자, 그때 교회 사무(敎會事務)를 확장하고자 나는 홍 신부[洪敎師]와 함께 각지를 왕래하며 사람들을 권면하여 교리를 전했다[勸人傳敎].22)

 

안중근은 교리서와 함께 성경[經典]을 직접 강습하고 토론하면서 교리를 배웠으며, 그 결과 불과 몇 개월 만에 천주교리와 관계된 의심이 사라졌다고 고백했다. 안중근이 이때 주된 참고로 한 교리서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정하상의 <상재상서>와 정약종의 《주교요지》였을 것이며, 그 외에도 《성교요리문답》, 《천주실의》, 《천주성교공과》, 《칠극》, 《치명일기》 등 최소한 모두 8종 이상의 교회 서적을 읽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여기에는 문답교리서와 기도서, 각종 위인전 및 성경해설서 등이 포함되었을 것으로 본다.23)

 

안중근은 이러한 교리서들을 통해서, 그의 아버지 안태훈과 마찬가지로 조선 후기 이래 양반 계층의 유학자들이 천주교에 입교할 때의 전형적인 형태였던 보유론24)적 사고에 입각하여 천주교리를 학습했을 것으로 보는데, 이는 자신이 익힌 교리를 동포들에게 전달하는 과정을 서술한 다음과 같은 자서전의 구절을 통해서 구체화된다.

 

ⓐ 한 나라의 임금이 정치를 공정히 하고 백성들의 생업을 보호하며 모든 국민들이 태평을 누릴 수 있게 되었는데 백성이 그 명령에 복종할 줄 모르고 전혀 충군애국(忠君愛國)하는 성품이 없다면 그 죄는 가장 중한 것이라 할 것이요. 그런데 이 천지간에 큰 아버지요, 큰 임금이신 천주께서 하늘을 만들어 우리를 덮어주시고, 땅을 만들어 우리를 떠받쳐주시고, 해와 달과 별을 만들어 우리를 비추어주시고 또 만물을 만들어 우리로 하여금 쓰게 하시니 실로 그 크신 은혜가 그같이 막대한데 만일 사람들이 망녕되이 제가 잘난 척, 충효를 다하지 못하고 근본을 보답하는 의리를 잊어버린다면 그 죄는 비할 데 없이 큰 것이니 어찌 두려운 일이 아니며, 어찌 삼갈 일이 아니겠소. 그러므로 공자도 말하기를 “하늘에 죄를 지으면 빌 데가 없다”25)고 했소.

 

ⓑ “오늘 우리들은 죽을 지경을 면하기가 어렵게 되었으니 속히 천주 예수의 진리를 믿어 영혼의 영생을 얻는 것이 어떻소. 옛글에도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26)고 하였소. 형들은 속히 전일의 허물을 회개하고 천주님을 믿어 영생하는 구원을 받는 것이 어떠하겠소?” 하고는 천주가 만물을 창조해 만드신 도리와 지극히 공변되고 지극히 의롭고 선악을 상벌하는 도리와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내려오셔서 구속하는 도리를 낱낱이 권면했더니 두 사람이 다 들은 뒤에 “천주교를 믿겠소”라고 하므로 곧 교회의 규칙대로 대세(代洗)를 주고 예를 마쳤다.

 

위 인용문 ⓐ, ⓑ를 통해서 보면, 《논어》 등 유교의 경전 구절들을 인용하거나 유교의 종지인 충효(忠孝)를 강조하면서 대군대부(大君大父)이신 하느님[天主]을 마땅히 흠숭해야 한다는 식의 논리를 전개하고 있는데, 이는 안중근의 전교가 전형적인 보유론적 교리 이해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안중근은 그가 읽은 <상재상서>의 영향도 있었겠지만, 빌렘 신부와 황해도 천주교회 전교회장들의 가르침 때문에 유교식 제사를 폐지하고 집안의 신주를 불사르는 등 보유론적 이해와는 상충되는 교회 가르침에 처음부터 적응해 갔으며, 《천주실의》 등 이른바 전형적인 보유론적 교리서에서는 잘 등장하지 않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代贖)과 구원(救援), 부활(復活)의 가르침을 보유론적 설명과 거의 동시에 학습해 갔다.

 

ⓒ 지금으로부터 1800여 년 전에 지극히 어진 천주님이 이 세상을 불쌍히 여겨서 만인의 죄악을 속죄하여 구원해 내시고자 천주님의 둘째 자리인 성자(聖子)를 동정녀 마리아의 뱃속에 잉태케 하여 유태국 베들레헴에서 탄생시키니 이름하되 예수 그리스도라 했소.

 

ⓓ 그 당시 유태국 예루살렘 성중에서 옛 교를 믿던 사람들이 예수의 착한 일하는 것을 미워하고 권능을 시기하여 무고로 잡아다가 무수히 악형하고 천만 가지 고난을 가한 다음 십자가에 못 박아 공중에 매어달았을 때, 예수는 하늘을 향해 만인의 죄악을 용서해 주십사 기도한 뒤에 큰소리 한 번에 마침내 숨이 끊어졌소.

 

ⓔ 예수는 사흘 뒤에 다시 살아나 무덤에서 나와 제자들에게 나타나 같이 지내기를 40일 동안에 죄를 사(赦)하는 권한을 전하고 무리들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셨소.

 

ⓕ 예수께서 미리 제자들에게 예언했으되, “뒷날 반드시 위선하는 자가 있어서 내 이름으로 민중들을 감화시킨다고 할 것이니, 너희들은 삼가서 그것의 잘못에 빠져들지 말라. 천국으로 들어가는 문은 다만 천주교회의 문 하나밖에 없다.”

 

위의 교리 설명 중에서 ⓒ, ⓓ, ⓔ는 각각 예수 그리스도가 동정녀 몸에서 탄생한 사실[降生救贖], 십자가 죽음과 대속, 부활과 승천(昇天) 등에 대해서 안중근이 설명하는 내용인데, 보유론적 교리서인 《천주실의》 등에서는 중국인들에게 매우 생소한 이 같은 내용을 아예 생략하거나 매우 축약된 형태로 약간만 언급하는 데 그쳤다. 따라서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확고한 인식은 전형적인 보유론적 인식에서 볼 수 없는 내용으로, 안중근이 교리를 배울 처음부터 강습했다는 성서[經文], 즉 복음해설서와 정약종의 《주교요지》에 그 내용을 두고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또 ⓕ의 경우 그가 구원을 위한 유일한 방법은 천주교회 내에서 구해야 한다는 생각을 지니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는 엄밀한 의미에서 보유(報儒)의 단계를 넘어서는 초유(超儒) 내지 탈유(脫儒)의 경지를 보여주고 있는 점이다. 그러나 안중근은 그의 천주교회 내 전교 봉사활동을 마친 1904~1905년 무렵부터는 애국 계몽 운동에, 1908년부터는 의병 항일 투쟁에 종사하면서, 같은 그리스도교 형제인 개신교[裂敎] 신자들과도 잘 화합하며 그들의 신앙을 비판하지 않았던 특징을 보여준다.

 

이른바 ‘안중근편 교리서’, 즉 안중근이 자서전에서 언급한 교리 학습 및 신앙 체득 과정을 기록한 마지막 부분은, 그의 교리 인식의 귀결점이자 그가 교회 활동과 개인적인 신앙생활을 통해서 실천해 나가고자 했던 결론에 해당되는 부분으로, 평신도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당연한 의무이자 권리인 복음화(福音化, 傳敎)에 대한 안중근의 강렬한 결심이 담겨있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원컨대 우리 대한(大韓)의 모든 동포, 형제, 자매들은 크게 깨닫고 용기를 내어 지난날의 허물을 깊이 참회함으로써 천주님의 의자(義子)가 되어, 현세(現世)를 도덕 시대로 만들어 다 같이 태평을 누리다가 죽은 뒤에 천당에 올라가 상을 받아 무궁한 영복(永福)을 함께 누리기를 천만번 바라오.

 

이처럼 현세를 도덕 시대로 만들고자 하는 사회복음화에 대한 강렬한 결심은 천주의 의자로서 거듭난 신자들이 지켜나가야 할 하느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사명[天命]으로 귀결될 수 있다. 이 같은 천명사상(天命思想)은 인간의 존엄함과 평등에 대한 특별한 가치 인식을 통해서 뒷받침되었다. 그런데 안중근은 인간의 영혼이 불멸한다[靈魂不滅]는 사상과 이런 영혼을 지닌 인간 존재의 고귀함과 존엄함에 대해서 교리 학습 기간 중에 이미 자각을 했음이 드러난다.

 

대개 천지간 만물 가운데서 오직 사람이 가장 귀하다고 하는 것은 혼(魂)이 신령하기 때문이오. 혼에는 세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생혼(生魂)이고…둘째는 각혼(覺魂)이요. …셋째는 영혼(靈魂)이니 그것은 능히 도리를 토론하고, 능히 만물을 맡아 다스릴 수 있기 때문에 오직 사람이 가장 귀하다는 것이오. …허다한 동물들이 사람의 절제[다스림]를 받는 것은 그것들의 혼이 신령하지 못하기 때문이요, 그러므로 영혼의 귀중함은 이것을 미루어서도 알 수 있는 일인데, 이른바 천명(天命)의 본성이란 것은 그것이 바로 지극히 높으신 천주께서 사람의 태중에서부터 부어 넣어 주는 것으로써 영원무궁하고 죽지도 멸하지도 않는 것이오[夫天地之間 萬物之中 惟人最貴者 以其魂之靈也 魂有三別 一曰生魂…二曰覺魂…三曰靈魂 此人之魂 能生長 能知覺 能分辨是非 能推論道理能管轄萬物 故惟人最貴者 魂之靈也…然許多動物 雖人所制者 其魂之不靈所致矣 故靈魂之貴重 推此可知而 卽所謂天命之性 此尊天主 賦卑于胎中 永遠無窮不死不滅者也].

 

이 같은 천부영혼설(天賦靈魂說)은 비단 안중근의 교리 인식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정약종의 《주교요지》나 정하상의 <상재상서> 등에서도 명백하게 서술되어 있다. 다만 동포들에게 전교할 때, 이러한 영혼의 소중함과 불멸함을 앞부분에 내세워 인간으로서의 권리[人權]가 소중하고 고귀하며 이는 마땅히 보호받아야 한다는 의식을 일깨워준 것에서 안중근의 독특함이 있었다.27) 안중근이 인간 영혼의 고귀함과 영원불멸에 입각한 인권의 소중함을 늘 전교나 교리 교육의 서두에 드러낸 것은 외교인들에게는 인간다운 품위 있는 삶을 위해서 영혼을 부여해 주신 하느님께 대한 신앙이 필요함을 강조하기 위함이었고, 신자들에게는 하느님이 맡겨주신 고귀한 신앙적 의무[사회복음화]를 다하도록 촉구하기 위해서였는데, 후자는 곧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신자가 하느님께로부터 부여받은 사명, 즉 민족과 국가, 나아가 인류 사회를 도덕적으로 개조하라는 천명(天命 : 천주의 명령)을 늘 잊지 않고 일상생활에서 실천하도록 일깨워준 것이었다.

 

2) 공동체(共同體) 의식의 확대와 인권(人權) 사상의 발전

 

이 절에서는 안중근이 전개한 인권 활동의 신앙적, 사상적 배경이 된 공동체 의식의 발전 과정과 이에 따른 인권 의식(人權意識)의 성장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안중근의 인권 의식은 그가 세례받은 이후 일상의 삶 속에서 실천되어 갔다. 그러나 안중근에게도 입교한 후 교회 공동체 내에서의 다양한 체험을 통해서 인권 의식의 폭이 확대되고 그 내용도 점차 변화되어 간 측면이 드러난다.28) 안중근이 천주교에 입교하게 된 것은 그 부친 안태훈의 정치적 입지를 확보하고 가문의 생존권을 해결하기 위한 양대인 자세적(洋大人藉勢的 : 서양인의 세력에 의존하는) 경향이 분명하게 드러나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29) 따라서 부친의 절대적 영향력 안에서 가문 전체가 집단 개종한 상황 속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안중근도 그 초창기 교회 활동의 범위가 부친과 선교사 빌렘의 전교 담당 지역을 넘어서지 못했음은 당연하다. 또한 자신이 전교하던 황해도 신천(信川)의 청계동을 비롯한 이웃 고을 해주(海州), 옹진(甕津) 등지의 천주교 신자들의 어려운 사정을 해결해 주고자 총대가 되어 나섰던 경험이 지역, 향촌, 동일 종교 집단 등의 매우 제한되고 배타적인 범위 내에서 그의 인권 의식을 키워갔고 실천해 나갈 수밖에 없었다.30) 안중근은 1897년 1월 영세 입교한 후 수개월 이상의 교리 학습 기간을 거쳐서 신앙심을 다진 후, 늦어도 약 1년 후인 1898년 4월경부터 그의 본당 신부가 된 빌렘 선교사를 수행하면서 전교회장, 복사 등의 조력자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해서교안(海西敎案)의 결말이 난 1903년 11월 이전까지 약 5년간 평신도 봉사자로서 전교 활동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이 기간 중에 안중근은 그가 순방하는 지역 내의 천주교 신자들과 관련된 억울한 일들을 바로잡아주고 신자들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해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안중근은 자서전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그 무렵 두 가지 사건이 있었다. 한 가지는 옹진군민(甕津郡民)이 돈 5천 냥을 경성에 사는 참판 김중환(金仲煥)에게 빼앗긴 일이요, 한 가지는 이경주(李景周)의 일이다. …그때 옹진군민이나 이 씨가 모두 천주교회에 다니던 사람이라 내가 총대로 뽑혀서 두 사람들과 함께 상경하여 두 가지 일에 관여하게 되었다….

 

안중근은 거의 적수공권으로 전 참판 김중환을 찾아가서 옹진군민에게서 꾸어간 5,000냥을 갚으라고 채근했지만, 김중환의 수하 노릇을 하는 정명섭이란 한성부 검사와 예절 문제 등을 두고 날 선 공방을 벌여야 했다. 또 천주교 신자 이경주에게서 재산과 아내를 약탈해 간 해주부 지방대(地方隊) 위관(尉官)인 한원교(韓元校)가 모략으로 이경주를 고발하여 수감하고 이경주를 도우려던 안중근마저 수감될 처지에 놓였지만, 한성부 재판관 정명섭과 설전을 벌이면서 기싸움을 벌여 겨우 수감되는 위기를 모면하고 결국 재판정에서 물러 나오는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두 가지 사건을 해결해 주려는 안중근의 취지는 좋았지만, 당시 안중근의 활동은 소영웅주의(小英雄主義) 내지 해결사(解決士)와도 같아서, 불법적이고 폭력적인 불한당들과 무력으로 충돌할 가능성이 다분했고, 실제로 활동의 효과도 거의 없었던 패배의 경험만을 안중근에게 안겨주었다.31) 안중근은 1903년 이후 해서교안에서 천주교 측이 완전히 패소를 당한 후 자신이 빌렘 신부와 함께 노력해서 확장시켜 놓은 교세가 형편없이 몰락하는 광경을 지켜보아야만 했다. 1902년 5월~1903년 4월까지 8개 본당에 약 2,004명의 신자가 활동했던 빌렘 신부의 황해도 교회는 그 이듬해 4개 본당의 약 878명으로 축소되고 만다. 본당 수는 반토막이 나고 신자 수는 약 43% 수준으로 줄어들었던 것이다. 이 당시의 일에 대해서 안중근은 그의 자서전에서 비록 일부 신자라고 표현했지만, 상당수의 신자가 현실적인 이익[지역의 利權 등]을 얻기 위해 천주교에 입교함으로써 신자들과 외교인들 간에 불필요한 마찰과 갈등이 심화되어 갔다. 그리하여 해서교안이 완전히 천주교회 측의 패소로 확정된 1903년 11월 천주교 신자는 전년도의 1/3 정도로, 선교사는 3/4이 호출되거나 타지로 전출되었다.

 

이러한 참담한 결과에 낙심한 안중근은 1904년 발발한 러일전쟁의 결과로 일본 제국주의의 조선 침략 의도가 명백해진 것을 확인하고 황해도 신천을 떠나 1905년에는 중국 상해로 갔고, 1906년에는 삼화항(진남포)으로 이사 가서 본격적인 애국 계몽 운동, 특히 교육 계몽 운동에 나섰다. 이렇게 하여 안중근은 프랑스 선교사의 세력에 의지한 선교 활동을 완전히 청산하고 동시에 지역 신자들을 위한 권익 옹호 투쟁도 마감하게 되었다. 계몽운동기 그의 관심은 더 이상 좁은 지역 내 천주교 신자들만을 대상으로 하지 않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전 국민을 대상으로 국민의 계몽을 통해서 민족의 주권을 수호하려는 운동으로 관심을 돌리게 되었다.32) 따라서 이 시기(1904. 7~1907. 8) 약 3년간 안중근이 관심을 가졌던 인권 운동의 대상은 전 대한국민이었고, 구체적인 활동은 보안회를 방문하여 하야시 처단을 건의한 1904년의 의열 투쟁 계획부터 시작되었다. 이후 안중근은 1906년 3월경부터 진남포에 이주하여 그곳의 삼흥학교(三興學校, 초등 교육 기관) 재건과 돈의학교(敦義學校, 중등 야간 교육기관, 영어학교)의 재정 등을 담당함으로써, 교육 계몽 운동에 매진했다. 또 1907년 3월부터는 미곡상과 석탄판매회사 운영을 통해서 민족운동의 자금을 마련하고자 식산흥업(殖産興業)에 손을 대었으나 일제의 방해로 실패하고 말았다.

 

이후 안중근은 1907년 8월 원산, 간도 등지를 거쳐 러시아령 블라디보스토크[海蔘威]로 망명하여 국내에서의 애국 계몽 운동을 완전히 청산하고 국외에서의 계몽 활동과 본격적인 의병 항쟁의 길로 접어들었다. 1908년 6~8월경 안중근은 엄인섭 등과 함께 의병 부대를 이끌고 두만강 최하단인 경흥군 노면 상리에 주둔 중이던 일본군 수비대를 급습하여 일본군 2명을 사살하고 여러 명에게 부상을 입히는 전과를 올렸다.33) 그러나 인간 생명을 존중하는 인류애(人類愛)에 입각하여 일본군 포로를 놓아주면서 부대 위치가 노출되어 적에게 공격을 당하고 결국 안중근 의병부대는 적전 의견 분열과 부대원이 궤멸당하는 심각한 패전을 경험하게 된다. 이 같은 결과는 안중근이 지향하는 공동체 의식이 민족의 좁은 울타리를 벗어나 보편적인 인류 사회로 확대되어 갔기 때문이었다. 곧 안중근은 의병 항쟁 기간 중에 만국공법에 대한 인식이 심화되고, 민족의 울타리를 넘는 동양인 내지 전 세계인의 구원(救援)을 그 대상으로 하는 보다 넓은 범위의 인권 사상의 틀을 자연스럽게 갖추게 된다. 그리하여 의병 전쟁에 대한 목적의식이 명확해지며, 다수의 죄 없는 인명의 살상을 초래하는 의병 전쟁의 한계성에 대한 성찰을 하게 되면서 외교적, 언론홍보적 측면에서 보다 효과적이고, 인명을 존중하는 항일 투쟁의 방법으로 일찍이 1904년 7월에 시도했던 보안회를 통한 매국노 처단과 같은 성격의 의열 투쟁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던 것이다. 1909년 10월 하얼빈에서 이토를 포살한 것은 바로 이 같은 안중근의 민족운동의 변화와 이에 상응하는 인권 의식의 확대를 반영한 것으로 해석된다.

 

 

3. 공동체(共同體) 의식과 인권(人權) 운동

 

1) 신심(信心) 형성과 공동체 의식

 

안중근의 인권 의식은 그가 소속 의식을 갖는 공동체에 대한 범위가 확대되면서 그 대상도 자연스럽게 확대되어, 향촌 사회의 천주교도에서 출발하여 대한제국의 전 국민의 범주를 거쳐, 한국, 일본, 중국을 포함한 동아시아 전 주민으로 점차 변화되었다. 이러한 안중근의 인권 의식은 그의 공적 활동을 통해서 공적으로 드러난 인권 운동 외에도 사적 일상생활 속에서 끊임없이 실천된 덕행을 통해서 확인된다. 이 장에서는 먼저 사적 영역에 속하는 덕행의 실천이란 측면에서 이러한 덕행의 실천을 가능하게 한 신심의 형성 과정을 확인하고자 한다. 이렇게 평소에 형성된 사적 영역에서의 신심과 그 결과물인 덕행이 축적되면서 특정한 시기에 맞이하게 된 공적 사건을 통하여 그의 인권 의식이 인권 활동으로 표출되기 마련이므로, 먼저 사적 영역에 속하는 주요 신심(信心)의 형성과 일상적으로 반복되는 덕행(德行)의 실천에 대해서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안중근의 천주교리 인식은 정약종의 《주교요지》 및 《성경직해》 등 복음해설서의 학습을 통해서 형성된 천주 흠숭 신앙, 성모와 성인들의 전기를 읽으면서 형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성모신심과 순교자 신심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신심들은 천주, 성모, 성인들의 신앙과 덕행에 대한 반복적인 학습을 통해서 형성될 수 있으므로 자연스럽게 그 학습자인 안중근에게도 일상적인 삶의 순간마다 본받고 싶은 덕행의 실천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안중근의 덕행에 대해서 선행 연구자들은 대신덕(對神德, 敬神禮)과 윤리덕(倫理德, 四樞德)의 측면에서 구체적인 분석의 성과를 남겼는데34), 필자는 본고에서 특히 용서(容恕)와 겸손(謙遜)의 미덕이 그의 일상적인 삶을 관철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안중근의 천주관(天主觀) 내지 하느님 인식은 그의 입교 후에 진행된 교리 학습 및 교회 봉사활동 등을 통하여 자연스럽게 형성되어 갔는데, 그 특징은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림 없는 하느님에 대한 강인한 믿음, 대군대부로서 인간을 사랑하고 존중해 주시는 하느님 인식을 골자로 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안중근은 그의 자서전을 통하여 1897년 1월 영세 직후 성경해설서를 비롯하여 문답교리서, 기도서, 수덕서, 전기 등의 다양한 교회 서적에 대한 강습과 토론 등을 통하여 불과 수개월 만에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확고하게 다졌기에 더 이상 의심이 사라지게 되었다고 표현했다. 안중근이 인재 양성을 위해 교회에서 민립대학을 설립하자는 건의는 뮈텔 주교의 철저하고도 거듭된 거절로 완전히 무산되었는데, 그때 안중근은 “교(敎)의 진리는 믿을지언정 외국인의 심정은 믿을 것이 못 된다”고 하면서 배우던 프랑스어 학습을 중단하였다.35) 이 유명한 일화를 통해서 안중근은 상당수의 천주교 신자들에게서 보이는, 성직자와 갈등을 통해서도 그의 믿음이 흔들리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많은 경우, 평신도들은 그의 직속상관인 본당 신부는 말할 것도 없이 교구장 주교에게 억울한 무안을 당하게 되면 냉담자의 길을 걷게 되는데, 안중근은 결코 교구장 뮈텔 주교로부터 받은 정신적 상처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에 대한 믿음은 변치 않았음을 잘 보여준다. 이러한 믿음에서 안중근은 하얼빈 의거 후 뮈텔 주교에게 성사를 집행할 사제를 여순으로 보내달라는 그의 요청이 일언지하에 거절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뮈텔 주교를 원망하는 일언반구도 그의 자서전에는 남기지 않았다. 그리고 사형 선고를 받고 마지막 집행을 앞두고서 뮈텔 주교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결코 원망이 아닌, 오히려 용서를 구하고 화해를 요청하는 겸손하고도 너그러운 태도를 취하고 있다. 이러한 겸손하고 너그러운 태도는 당시 천주교회에 대한 일제의 감시와 통제 속에서 교회의 안전과 유지에만 급급하던 뮈텔 주교의 공적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였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찬미 예수. 인자하신 주교께옵서는 죄인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 죄를 용서해 주시옵소서. 그리고 죄인의 일에 관해서는 주교께 허다한 배려를 번거롭게 하여 황공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성모의 홍은, 주교의 은혜는 이루 감사할 말씀을 다할 수 없사오며…주교님과 여러 신부님께서는 다 같이 일체가 되어 천주교를 위해 진력하시고, 그 덕화가 날로 융성하여 머지않아 우리 한국의 허다한 외교인과 기독교인들이 일제히 천주교로 귀화하여 우리 주 예수의 자애로운 아들이 되게 할 것을 믿고 또 축원할 따름입니다.36)

 

성직자와의 갈등을 겪으면서도 결코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믿음이 변치 않고, 오히려 하느님 안에서의 축복을 기원하고 화해를 요청하기 위해 자신을 용서해달라는 이 같은 겸손하고 열린 자세는 일찍이 안중근이 그의 관할 본당 신부였던 빌렘 신부로부터 무지막지하게 구타를 당한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동안 나는 홍 신부와 더불어 크게 다툰 일이 있었다. 홍 신부는 언제나 교인들을 압제하는 폐단이 있었기 때문에 여러 교인들과 상의하되, “거룩한 교회 안에서 어찌 이 같은 도리가 있을 수 있겠는가?” …홍 신부가 이 말을 듣고 크게 성이 나서 나를 무수히 때렸기에 나도 분하기는 했으나 그 욕스러움을 참았다. 그랬더니 뒤에 홍 신부가 나를 타이르며, …서로 용서하는 것이 어떤가 하므로 나도 역시 감사하다 하고 전일의 우정을 다시 찾아 서로 좋게 지내게 되었다.

 

안중근의 성직자에 대한 공경의 태도와 겸손한 표양은 그의 변함없는 하느님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안중근은 또한 남다른 성모 발현 체험을 통해서 볼 때 성모신심도 매우 깊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여순 감옥에 갇혀 일제의 법정에서 심문을 당하고 공판을 받던 시절, 안중근의 통역을 담당했던 원목말희(園木末喜)가 1910년 3월 15일 통감부 총무장관 석총영장(石塚英贓)에게 제출한 보고서에는 안중근이 처형을 앞두고 빌렘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안중근이 의병에 투신할 결심을 할 즈음 성모 마리아가 찬란한 무지개 곁으로 접근하면서 안중근의 가슴을 어루만져 주고, “놀라지 말라, 염려하지 말라”고 하면서 위로와 용기를 북돋워 주었다고 한다.37) 이 같은 성모신심 또한 루카 복음 1장 38절의 “주님의 종이오니 말씀하신 대로 제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용감하게 신앙고백을 한 동정녀 마리아의 용덕(勇德)을 본받는 것으로 연결될 수 있다.

 

안중근은 순교 신심도 갖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가 교리를 배우면서 정독했을 《주교요지》와 <상교우서>의 저자가 모두 순교자였고, 자서전에는 천주교의 진리를 증거하고 천주님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 사람들이 몇 백만인지도 모른다고 한 진술 및 사형 집행일을 예수의 수난 성금요일로 해달라고 요청한 일 등을 통해서 볼 때 이러한 추정이 가능하다. 그는 분명히 순교자에 대한 인식을 토대로 순교자를 공경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어쩌면 그 자신을 조국의 독립을 위해 예수님께 봉헌하는 제물로 인식하고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보다 구체적인 순교신심의 증거는 현 단계에서 찾아지지 않는다.

 

안중근은 이상에서 언급한 하느님께 대한 변함없는 흠숭의 자세, 성모신심 등을 통해서 뿐만 아니라, 일상적인 삶을 통하여 용서와 겸손의 덕을 실천해 나갔다. 이를 종합적으로 정리하면 아래와 같이 되는데, ⓐ~ⓓ의 인용 근거는 그가 기술한 《안응칠역사》이다.

 

ⓐ 부친 안태훈의 선종 무렵 전후에 서울에서 연안을 향해 말을 타고 오다가 마부에게 모욕을 당하고 채찍으로 맞았지만 그냥 웃고 넘겨준 일화

 

ⓑ 1908년 연해주 해삼위에서 한인청년회 사찰을 수행할 때 귀뺨을 맞아 한동안 귓병을 앓았지만 때린 사람을 용서하고 화해한 일

 

ⓒ 러시아령 연추 부근에서 한국인 일진회원들에게 잡혀 구타를 당하고 죽을 위기에 처했으나 좋은 말로 설득하고 석방된 일

 

ⓓ 성사를 줄 사제 파견을 거부한 뮈텔 주교와 마구 구타를 한 빌렘 신부를 용서한 일

 

ⓔ 여순 감옥에서 쓴 유묵들, <百忍堂中有泰和>, <忍耐> - 인내와 용서의 덕행 강조

 

이상에서 언급한 일상생활 속에서의 용서와 인내는 안중근의 겸덕(謙德)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2) 계몽 운동과 의병 항쟁 중의 인권(人權) 운동

 

안중근의 평소 신심과 덕행은 그가 공적으로 행한 사건들을 통해서 인권 사상의 실천으로 드러났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본고에서는 “국가의 횡포로부터 개인의 자유 및 기본적 권리를 보호하는 데 주안점을 두는 시민적, 정치적 권리”로 규정되는 제1세대 인권 개념뿐만 아니라,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권리’ 등 국가의 적극적 개입만이 효율적인 권리의 향유를 보존하는 제2세대 인권 개념, 개발에의 권리, 평화추구권, 깨끗한 환경추구권 등 국제 사회의 연대에 호소하는 집단적 차원의 제3세대 인권 개념까지도 망라하는 광의의 인권 개념을 사용하여 안중근이 행한 공적 활동, 즉 애국 계몽 운동과 항일 의병 투쟁의 과정에서 보여준 인권 활동의 사례를 제시하고자 한다.

 

안중근은 1904~1905년의 성찰과 모색기를 거쳐 1906년 진남포에서 천주교회에서 운영하다가 거의 문을 닫았던 초등 교육 기관인 삼흥학교를 재건하고, 영어를 가리키는 야간 중등 교육 기관인 돈의학교 등의 운영에 집안의 재산을 모두 투자하였다. 이러한 교육 계몽 운동은 비록 진남포의 한 모퉁이에서 실시되기는 했지만, 당시 대한국민 전체를 대상으로 교육을 받을 권리를 실현시켜 주기 위한 제2세대 인권 개념에 입각한 인권 활동의 하나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아울러 1907년 3월경부터 실시한 미곡상과 석탄회사 운영은 민족운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식산흥업 운동의 성격을 띠고 있으므로, 제2세대 인권 개념에 입각한 당시 대한국민 모두를 대상으로 한 생존권적 권리를 적극적으로 실천해 간 인권 활동의 하나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한편 1908년 이후 간도와 연해주를 거점으로 삼아 국내에 진격하여 일본군 수비대에 타격을 가한 의병 항쟁과 그 의병 항쟁의 연속선상에서 추진된 1909년 10월의 하얼빈 의열 투쟁에서는 제1세대와 제3세대 인권 개념에 입각한 인권 활동의 측면을 상정해 볼 수 있다. 1908년 6월 안중근은 살려달라고 간청하는 일본군 포로들을 석방하면서 그의 동료 의병들과 다음과 같은 논쟁을 벌였다.

 

▷ “어째서 사로잡은 적들을 놓아주는 것이요?”

▶ “현재 만국공법에 사로잡은 적병을 죽이는 법은 전혀 없다.”

 

▷ “저 적들은 우리들을 사로잡으면 남김없이 참혹하게 죽일 것입니다. 또 우리들도 적을 죽일 목적으로 이곳에 와서 풍찬노숙(風餐露宿)해 가면서 애써 잡았는데 놈들을 몽땅 놓아 보낸다면 우리들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 “그렇지 않다. 적들이 그렇게 폭행을 일삼는 것은 하느님과 사람들이 다함께 분노하는 것인데, 이제 우리들마저 야만의 행동을 하고자 하는가? 또 우리가 일본의 4천 만 인구를 모두 다 죽인 뒤에 국권을 도로 회복하려는 계획인가? …충성된 행동과 의로운 거사로서 이토의 포악한 정략을 성토하여 세계에 널리 알려서 열강의 동정을 얻은 다음에라야 한을 풀고 국권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안중근의 자서전 《안응칠역사》에 기록된 이 같은 대화를 통해서 안중근은 그의 의병 항쟁이 목표로 하는 것은 국제 여론을 통한 대한제국 국권 회복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데 있음을 분명히 하였고, 또한 야만적인 살인 행위를 따라 하지 말고 도덕적이고 정정당당한 만국공법에 따라서 전쟁을 수행함으로써 의병 전쟁의 정당성을 확보하자는 주장이 설득력 있게 펼쳐져 있다. 동시에 의병 동료들의 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일본인 포로들에 대한 생명 존중의 정신을 실천에 옮겨 석방해 준 일은 비록 안중근의 고지식함과 이에 따른 패전의 책임에 대한 전술적 오류를 지적할 수는 있겠지만, 의병 전쟁을 통해 인권 존중의 정신을 실천에 옮겼다는 점에서 의병 전쟁의 도덕적 정당성을 추가할 수 있었고, 이를 통해서 한국 독립에 대한 국제 여론의 긍정적 환기를 초래할 가능성도 있었음을 우리는 추정해 볼 수 있다.

 

안중근은 1908년 백두산 부근에서의 의병 투쟁에서 일본에 완전히 패한 이후, 죄 없는 무수한 인명(군인)들의 희생(죽음)을 초래하는 의병 전쟁의 피해가 심각하고, 그 효과도 미미하다는 것에 대한 성찰을 통해서, 의열 투쟁으로 그 투쟁의 형태를 변경하게 되었다. 1909년 3월 정천동맹(正天同盟, 단지동맹)은 이 같은 의열 투쟁을 결의한 것으로, 인권론적 관점에서 보더라도 무고한 다수 인명의 희생을 방지함으로써 의병 투쟁보다 인권 존중의 정신에 한 단계 보다 더 가까이 접근하는 훌륭한 국권수호 운동 내지 인권 활동의 전략이었다고 해석된다. 안중근은 1909년 10월 하얼빈 역두에서 진행된 의열 투쟁에서 이토 히로부미와 그 일행을 향해 백발백중 권총을 발사하던 중에 다음과 같은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저것이 필시 늙은 도적 이또오일 것이다’ 하고 곧 권총을 뽑아들고 이또오의 오른쪽을 향해서 네 발을 쏜 다음, 순간 생각해보니 십분 의아심이 머릿속에서 일어났다. 내가 본시 이또오의 모습을 모르기 때문이다. 만일 내가 잘못 쏜다면 큰일이 낭패가 되는 것이라. …그리고 다시 생각하니 만일 무죄한 사람을 잘못 쏘았다고 하면 일은 반드시 불미스러운 일이라고 잠깐 정지하고 생각하며 머뭇거리는 사이에 러시아 헌병이 와서 붙잡혔다.

 

안중근의 자서전에 나오는 이 같은 기록은 그가 실제로 권총에 장전한 7발의 총알 중에서 6발만 쏘고 한 발을 그냥 남겨둔 채로 러시아 헌병에 체포됨으로써 그의 인권 사상을 생사의 갈림길에 놓였던 일본인들을 대상으로 한 전쟁터[의열 투쟁]에서 마지막으로 실현했던 셈이다. 안중근 의사가 수행했던 하얼빈 의거의 정당성은 이처럼 그의 높은 인권 의식, 즉 생명 존중 의식에서 찾을 수 있다고도 할 수 있다. 비록 당대에는 필자와 같은 평가를 한 이가 없었다고 하더라도 안중근의 의거가 역사책의 한 페이지를 계속해서 장식하는 무궁한 세월 동안 안중근의 이 같은 의롭고 신중한 행위는 그의 의거에 도덕적 정당성을 부여해 주는 동시에 그의 의거가 인권 운동의 실천적 결과물이었다고 해석할 여지도 남겨주는 것이다. 안중근이 하얼빈 의거가 끝난 이후 여순 옥중에서 동양평화론을 작성하게 된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그는 의병 항쟁과 하얼빈 의거를 통해서 국가와 민족 간의 생존 경쟁 속에서 희생당하는 자국과 타국 국민들의 인권 실상을 체험하게 되었다. 그래서 인명 희생을 최소한 줄이면서 전쟁 중인 적대국 국민들끼리도 용서와 화해의 정신으로 협력해 나간다면 동양 평화 내지 세계 평화를 이룰 수 있을 것이란 도덕적 신념과 이를 하느님이 적극 지원하고 인도해 주실 것이란 믿음이 생겼기에 이런 동양평화론을 제기한 것이다. 안중근이 작성한 미완의 동양평화론은 앞서 서술한 바와 같은 안중근의 인권 사상이 천주교 신앙 안에서 구체화되고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 실천된 용서와 겸손의 덕행이 교육 계몽 운동, 식산흥업, 의병 항쟁, 의열 투쟁 등 일련의 국권 회복 운동에도 자연스럽게 반영된 역사적 경험을 통해서 작성된 것이다.

 

 

4. 맺음말

 

안중근 의사의 인권 사상은 그의 가톨릭 신앙에 기초를 둔 것으로 애국 계몽 운동과 의병 항쟁, 의열 투쟁의 전 과정을 일관되게 관철하는 중심 원리이자, 배경 사상이었다. 그리하여 인간 존중의 의식에 바탕을 둔 덕행의 실천과 적극적인 인권 구호 활동은 그의 공동체 의식이 성장할 때마다 한 단계씩 인권 활동의 대상이 확대되는 커다란 진전을 보여주었다. 그 결과 안중근은 향촌에서 천주교 신자들만을 대상으로 다분히 해결사적 인권 운동을 벌이던 수준에서, 황해도라는 좁은 울타리를 벗어나고 천주교회라는 특정 종교 집단을 탈피한 애국 계몽 운동 기간 중에는 온 대한제국의 국민들이 정당한 개화 교육, 민족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권리[교육 인권]를 추구하였고, 곡물상과 석탄회사 등의 경영을 통한 식산흥업 운동과 국채보상운동을 통해서는 온 대한국민이 경제적으로 자립하여 민족경제를 되살릴 수 있는 생존권적 인권을 추구하였다. 그 후 안중근은 국내에서의 애국 계몽 운동의 한계를 깨닫고 국외로 망명하여 계몽 운동과 의병 항쟁, 의열 투쟁 등을 추진할 때 국권 수호(國權守護)라는 민족 성원을 위한 인권 투쟁에 매진하면서도 민족적 이기주의에 매몰되지 않고, 국가 간, 민족 간의 화해와 진정한 동양 평화, 세계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 적국의 인민에 대한 생명의 존중 정신까지도 발휘함으로써 그의 의병 항쟁과 의열 투쟁의 도덕적 정당성과 국제 여론 환기의 효율성을 도모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안중근의 이 같은 인권 활동은 겸손과 용서를 바탕으로 한 그의 평소 신심과 이 신심에 따른 자연스러운 덕행의 실천 결과였다. 안중근의 굳건한 흔들림 없는 하느님 사랑과 성모신심, 순교자 신심 등에 대해서는 그의 자서전과 공판 기록 등에 나오는 덕행을 베푼 수많은 일화를 통해서, 또 그가 여순 감옥에서 남긴 도덕적 지향과 애국적 신심을 담은 유묵의 의미를 통해서 하나씩 밝혀지고 있다.

 

* 이 논문은 2014년 10월 24일 대구가톨릭대학교에서 개최된 제4회 안중근연구소 국제학술대회에서 발표된 글 <안중근의 가톨릭 신앙과 인권사상>을 보완한 것이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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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주호, <신앙인 안중근론 - 평신도사도직운동의 선구자>, 《최석우신부화갑논총》, 1982 ; 신운용, 안중근 평화연구원 편, 《안중근과 한국근대사 2》, 채륜, 2013. 3. 26, 27~71쪽(안중근 연구의 현황과 쟁점)에서 재인용.

 

2) 《교회사연구》 9(안중근 토마스 의사 특집호), 한국교회사연구소, 1994에 실린 다음과 같은 4편의 논문은 1993년 8월에 실시되었던 제100회 교회사 연구발표회 겸 안중근 의사 기념 심포지엄에서 발표된 논문들이었다. 노길명, <안중근의 가톨릭 신앙> ; 홍순호, <안중근의 동양평화론> ; 조광, <안중근의 애국계몽운동과 독립전쟁> ; 최석우, <안중근의 의거와 교회의 반응>.

 

3) 위의 책, 한국교회사연구소, 1994, 5~30쪽 ; 이에 대해 신운용은, “노길명은 1990년대 안중근 사상을 연구한 대표적 연구자로 안중근의 전교 활동, 민권 수호 활동, 애국 계몽 활동과 독립 전쟁이 모두 하느님의 사랑과 평화를 이 세상에 구현시키려는 종교적 동기와 깊이 관련이 있음을 파악했으나, 천주교의 어떠한 사상이 안중근의 민족운동을 추동시켰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까지 발전하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신운용, 앞의 글, 2013, 46쪽 ; 한편 노길명 교수와 함께 안중근 심포지엄에 참석했던 조광 교수는 안중근의 생애를 종교운동기, 애국계몽운동기, 독립전쟁기의 3시기로 나누었는데, 이러한 시기 구분은 본고의 구상과 전개에도 적지 않은 참고가 되었다. 조광, <안중근의 애국계몽운동과 독립전쟁>, 《교회사연구》 9, 한국교회사연구소, 1994.

 

4) 이때 심포지엄에서 발표된 글들은 《교회사연구》 16, 한국교회사연구소, 2001, 9~143쪽에 실렸고, 관련 종합토론도 다시 정리되어 실렸다(같은 책, 145~175쪽). 구체적 논문들은 차기진, <안중근의 천주교 신앙과 그 영향> ; 장석흥, <안중근의 대일본 인식과 하얼빈 의거> ; 전달수, <안중근 토마스의 신앙과 덕행> ; 정인상, <안중근의 신앙과 윤리> ; 변기찬, <안중근의 신앙과 현양에 대한 비교사적 검토> 등 모두 5편이다.

 

5) 약정토론자 최기영은, 발표자가 안중근 신앙의 구체적인 교리 지식을 성공적으로 추출했다고 평가하면서, 아무런 자료 없이 감옥에서 기억에 의존하여 기술된 《안응칠역사》에만 지나치게 의존하지 말고 구술사를 비롯한 흩어진 자료 모으기에 힘써야 하고, 안중근이 실력양성론에서 무장투쟁론으로 전환한 독보적 민족운동가였다는 점과 그 사상적 배경으로서 문명개화론 등을 지적했다. 위의 책, 한국교회사연구소, 2001, 145~175쪽.

 

6) 이에 대해 약정토론자 윤경로는 안중근의 이토 포살을 히틀러 암살단에 들었던 미국 신학자 본회퍼의 발언, “술 취한 운전사가 버스를 운전하고 있을 때는 승객들을 구출하기 위해서 술 취한 운전사를 빨리 내리게 해야 한다”는 말을 인용하면서 안중근의 의거야말로 본회퍼의 말에 비유될 수 있는 굉장히 종교적인 행위라고 평가했다. 앞의 책 참고.

 

7) 이에 대해 토론자 박재만은, 발표자가 안중근의 덕행을 윤리덕(倫理德)의 측면에서만 고찰하지 말고 향주덕(向主德 : 믿음, 소망, 사랑)의 측면에서도 분석하면 좋았을 것이라고 평했다. 아울러 안중근의 하얼빈 의거는 윤리신학적으로 살인 혐의가 아닌 것이 충분히 입증되는데, 그의 이토 포살 행위가 신앙적 결단인가 아니면 단순한 인간적 신념의 결단인가를 따져보았을 때 틀림없이 신앙적 결단이었으므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순국자(殉國者)였고, 교황 바오로 2세의 회칙 <제삼천년기>에서 말한 ‘새로운 순교자’(novus martyr) 또는 현대의 순교자였다고 평가했다.

 

8) 토론자 이동호는, 안중근이 주도한 동의단지회의 결의 내용 중에 만약 거사가 실패할 경우 3년 안에 자살을 결행한다는 항목이 있음을 볼 때, 안중근이 과연 생명의 주인이 하느님임을 제대로 인식하고 있었는지 의문이라고 평가하면서 안중근이 과연 빌렘 신부를 도와 활발한 전교 활동을 할 정도로 교리 지식이 해박했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했다. 또한 안중근의 하얼빈 의거에 대해서도 “단 한 번으로 끝나지 못하고 계속해서 사용해야 하는 무력의 상황이라면 폭력의 악순환을 초래한다는 점에서 정당성을 확보하기 어렵다”고 전제하고 안중근의 의식에 문제가 있다고 비판했다. 이에 대해 발표자 정인상은 안중근 의거를 통해서 생명 존중 문제, 살인 문제, 정당한 전쟁 등의 문제로 토론자의 문제 제기를 분석한 후, 안중근의 의거는 무엇보다도 민족 구원을 상위의 가치로 보고 민족 구원을 선택한 행위였다고 답변했다. 필자는 이동호 신부의 문제 제기를 인권의 관점에서 본격적으로 분석하여 안중근의 신앙심과 덕행이 교회 내의 교리와 어긋나지 않고 생명 존중 정신을 구현한 것이었다고 평가한다. 또 안중근은 그 자서전에서 3년 내에 자살을 한다는 말을 기록하지 않았다. 이는 그의 생명관을 반영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본고의 내용 참고.

 

9) 토론자 윤민구는, 안중근 의거를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하얼빈 의거를 전쟁의 한 부분으로 평가해야만 한다고 말했다. 그것은 교회의 십계명 중에서 제5계명에도 불구하고 살인이 허용되는 경우가 사형, 정당방위, 전쟁 등 세 가지 경우밖에 없기 때문이라고 보고, 안중근 자신이 의병의 참모중장으로서 독립 전쟁을 수행하는 중에 이토를 사살한 것이라는 진술을 한 점을 존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안중근이 교회에서 현양되기 위해서는 안중근의 성덕이 단순한 애국심 이상의 것임을 밝혀야 하는 과제가 주어졌다고 했다.

 

10) 황종렬,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편, <안중근편 교리서에 나타난 천 · 인 · 세계 이해>, 《안중근과 그 시대》, 2009. 3.

11) 신운용, <안중근 의거의 사상적 배경>, 《한국사상사학》 25, 2005

 

12) 김수태, <‘안중근학’의 출발을 바라는 노력의 한 결실 - 신운용, 《안중근과 한국근대사》, 채륜, 2009 ->, 《대구사학》 101, 대구사학회, 2010. 11.

 

13) 김수태, <안중근과 천주교의 관계에 대한 비판적 검토>, 《한국독립운동사연구》 38,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11. 4.

 

14) 김수태, 위 논문, 2011. 4, 37쪽. 아울러 김수태는 이 논문에서 안중근의 이러한 천명관은 한국 초기 교회 때부터 정약종과 정하상을 거쳐 온 평화 사상을 계승한 것으로 안중근에 의해 보다 강조된 것일 뿐이며, ‘안중근의 천명관이 한국 가톨릭의 토착화나 민족화의 시초가 된다’고 하는 신운용의 주장은 안중근의 천명관과 그의 사상적 배경을 지나치게 협소화시키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김수태는 안중근의 사상적 스펙트럼이 다양함에 대해, 안중근의 천주교 신앙뿐만 아니라 그의 유교적 지식 토대와 개신교에 대한 포용적 인식 측면까지 아울러 살펴보아야 올바로 파악할 수 있다고 보았다. 또 근대 서구 문물의 발전과 국제정치 질서에 대한 안중근의 개안(開眼)은 당대의 신문을 읽고 이를 통해 이해를 심화한 결과라고 보았다. 김수태, <안중근의 독립운동과 신문>, 《진단학보》 119, 진단학회, 2013. 12.

 

15) 윤선자, <안중근 의사의 천주교 신앙과 애국계몽운동>, 《안중근의 義烈과 동양평화론》(안중근의사 의거 89주년 학술 심포지엄), 안중근의사숭모회, 1998 ; - - -, <‘한일합방’ 전후 황해도 천주교회와 빌렘신부>, 《한국근대사와 종교》, 국학자료원, 2002 ; - - -, <안중근의 민족운동>, 《종교계의 민족운동》(한국독립운동의 역사 38), 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2008. 8 ; - - -, <해방 후 안중근 기념사업의 역사적 의의>, 《안중근의사 하얼빈의거 100주년기념 국제학술대회》,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2009.

 

16) 원재연, <안중근의 생애와 활동>, 《교회와 역사》 218~221, 1993 ; - - -, <安重根 年譜>, 《교회사연구》 9(안중근 토마스 의사 특집호), 한국교회사연구소, 1994 ; - - -, <안중근의 선교활동과 황해도 천주교회 - 김기호와 비교연구를 중심으로 ->(안중근 의거 100주년 기념 심포지엄 발표문), 2009. 10 ; - - -, 안중근기념사업회 편, <안중근의 선교활동과 황해도 천주교회>, 《안중근 연구의 성과와 과제》, 2010. 9 ; - - -, <구한말 안중근의 천주교 교리인식과 신앙실천>, 《교회사학》 7, 수원교회사연구소, 2010. 12.

 

17) 인권 개념과 국제인권법의 범위가 확장되는 추세와 관련해서는 박기갑, <21세기 국제인권법의 과제와 전망>, 《21세기 국제인권법의 과제와 전망》, 삼우사, 1999, 10~12쪽 참조.

 

18) 박기갑, 위의 책, 10쪽.

 

19) 박기갑, 같은 책, 13쪽. 이와 관련하여 제2세대 인권은 사회주의 이념에 영향을 받은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권리’ 등 국가의 적극적 개입만이 효율적인 권리의 향유를 보존하는 권리로, 제3세대 인권은 개발에의 권리, 평화추구권, 깨끗한 환경추구권 등 국제 사회의 연대에 호소하는 집단적 차원의 인권으로 설명하고 있다.

 

20) 이상의 인권 개념에 대해서는 원재연, <황사영 백서의 인권론적 고찰>, 《법사학연구》 25, 한국법사학회, 2002. 4를 참고 · 인용하였다.

 

21) 최석우, <안중근의 의거와 교회의 반응>, 《교회사연구》 9, 한국교회사연구소, 1994.

 

22) 안중근, <安應七歷史>, 《安重根傳記全集》, 국가보훈처, 1999. 이하 본 장의 인용문들은 모두 이와 동일한 곳이므로 출전에 대한 별도의 언급을 생략한다.

 

23) 차기진, 앞의 글, 2000 ; 하정호, <안중근의 천주교 신앙연구>, 가톨릭대 역사신학 전공 석사학위 논문, 2008. 6 등에서는 대략 7종 정도로 추정하고 있다. 필자는 여기에 《성경직해》나 《성경광익직해》 등 박해 시대부터 신자들의 주일 공소 모임 교재로 활용되어온 성경 해설서류가 바로 안중근이 자서전에서 말한 ‘성서’[經文]를 가리킨다고 본다.

 

24) ‘보유론’(補儒論)이란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가 중국에 전교할 때 취한 선교지 문화 적응주의적(適應主義的) 선교 방식을 말한다. 리치는 유명한 유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그리스도교를 중국 전통의 지배 사상인 유교(儒敎)의 논리에 부합(符合)되게 하면서 유학자들의 부정적인 편견을 배제하고 천주교에 관심을 갖도록 유도했으며[合儒], 유교의 부족한 종교적인 측면을 보완(補完)한다고 하는 과정[補儒]을 거쳐서, 마침내 천주교의 교리가 유교의 수준을 초월하는 것임을 중국인들에게 설득력 있게 제시하는 단계[超儒]를 거치는 3단계적 선교 방식을 말한다. 이에 대해서는 금장태, 《조선후기 儒敎와 西學 - 교류와 갈등 -》, 서울대출판부, 2003, 204쪽 참고. 그러나 대체적으로 학계에서는 천주교를 전교할 때 유교의 가르침과 부합되는 방법으로 교리를 설명하거나 최소한 유교와 서로 어긋나지 않는 방식을 취함으로써 천주교에 대한 편견과 거부감을 불식시키는 방법들을 보유론이라고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해 왔다. 보유론과 관련된 국내 학자의 연구로는 금장태, <東西交涉과 近代 韓國思想의 推移에 關한 硏究>, 성균관대 박사학위 논문, 1978 및 이의 보완서인 동인(同人)의 《東西交涉과 近代 韓國思想》, 성균관대 출판부, 1984 ; 김옥희, 《曠菴 李蘗의 西學思想》, 가톨릭출판사, 1979 ; 최기복, <儒敎와 西學의 思想的 葛藤과 相和的 理解에 關한 硏究 - 近世의 祭禮問題와 茶山의 宗敎思想에 關聯하여 ->, 성균관대 박사학위 논문, 1989 ; 최소자, 《東西文化交流史硏究》, 삼영사, 1987 등이 있다.

 

25) 獲罪於天 無所禱也(《論語》, <八佾篇>).

26) 朝聞道 夕死可矣(《論語》, <里仁篇>).

 

27) 원재연, 앞의 글, 2010. 12, 137~141쪽. 이에 의하면 안중근은 김기호와 마찬가지로 교리교육이나 전교 활동 시에 인간 영혼의 고귀함을 강조하면서 설명을 하고 있는데, 이는 박해 시기인 정약종과 정하상의 활동 시기에는 볼 수 없었던 일로서, 자칫 반란을 도모한다는 오해를 살 수 있는 인권과 관련된 언급을 피하였던 것과는 자못 달라진 시대 분위기를 반영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개항기 이후의 안중근과 김기호의 시대에는 서구 문물의 영향을 받아 인권의 소중함에 대해 개안(開眼)하고 이를 당당하게 역설하면서 외교인들에게는 인간의 고귀한 품위에 맞는 도덕적 삶을 위해서 가톨릭 신앙이 필요함을 알려주었고, 기존 신자들에게는 올바른 신앙인으로서의 교회적, 사회적 의무를 강조하기 위해서 이 같은 인간 존재의 고귀함과 천부인권의 소중함을 새삼 강조했던 것이다 ; 황종렬, 앞의 글, 2009. 3, 315쪽. 이에 의하면, 《주교요지》는 천주론 중심의 교리 진술로 기획되었고 또 그렇게 작용하였으나, 안중근편 교리서에서는 인간론에서 천주론으로 옮겨가는 체제를 취하고 있는데, 이는 인간 존재의 존귀함에 근거하여 그 존귀함의 근원으로서 천주에 대한 본분을 구현할 것을 설득하여 도덕-태평 시대와 영세영복의 구원을 열어가도록 하는 초대로 선포되었던 것이라고 하였다.

 

28) 기존의 연구자 중에는 안중근의 교회 활동이 민권(民權)을 중시한 활동이었다고 본 견해가 더러 있었다. 앞서 언급했던 노길명, 조광의 연구논문들(1994)과 윤선자(1998), 차기진(2000), 신운용(2009. 3) 등이 바로 그것이다. 이들 연구자는 안중근이 활동하던 기간에 만난 백성들의 생존권을 보호하고 지켜주려는 노력 등에 대해서 언급했지만, 안중근의 공동체 의식의 변화에 따라 인권 존중 내지 보호의 대상이 변화되고 인권의 개념도 점차 확대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지적하지 않았다.

 

29) 이에 대해서는 노길명, 앞의 논문, 1994, 28쪽 및 차기진, 앞의 논문, 2000, 14쪽 등 여러 연구자가 언급한다.

 

30) 자세한 내용은 원재연, 앞의 글, 2010. 9, 307~348쪽 참고. 이 글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걸치는 기간 중 황해도의 전교 상황에 대해 지역별 연례 교세통계표상의 변화를 분석하면서 안중근 일가와 빌렘 신부에 의해 진전된 황해도 교회의 교세 확장 과정을 구체적으로 분석 · 설명했다. 또 이 글에서는 안중근의 인권 활동을 광의의 선교 활동으로 설명하면서 신자들의 권익을 보호한 일로 3가지를 설명했으나, 금광 감리 주가를 찾아간 일의 경우 신자들에 대한 주가의 침탈 행위가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지 않아서 본고에서는 생략했다.

 

31) 보다 구체적인 내용은 원재연, 앞의 책, 2010. 9, 328~333쪽 참고.

 

32) 신운용은 이와 관련하여, 안중근의 활동이 천주교인들의 문제 해결에 진력하던 사적 영역에서 민족 문제의 구체적 해결 방안을 강구하는 공적 영역으로 전환되었고, 의열 투쟁의 방안이 1904년 하야시와 부일세력 처단 계획에서 비롯되었으며, 나중에 하얼빈 의거도 그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자리매김했다. 또 해외 이주와 무력 투쟁 노선도 이 무렵부터 고민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신운용, 앞의 글, 2013. 3, 392~393쪽.

 

33) 조광, 앞의 글, 1994, 65~93쪽.

34) 전달수, 앞의 글, 2000 및 정인상, 앞의 글, 2000 참고.

35) 앞의 책, 《안응칠역사》.

36) 안중근, <민주교 전상서>, 1910년 경술 2월 15일.

37) “第1回 公判始末書”,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7》, 327쪽 ; 노길명, 앞의 글, 1994, 17~18쪽에서 재인용.

 

[교회사 연구 제46집, 2015년 6월(한국교회사연구소 발행), 원재연(전주대학교 한국고전학연구소 연구교수)]

 

※ 본문 중에 ? 표시가 된 곳은 현 편집기에서 지원하지 않는 한자 등이 있는 자리입니다. 정확한 내용은 첨부 파일에서 확인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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