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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신학ㅣ사회윤리

[사회] 트라우마, 그 가운데에도 하느님이 함께 계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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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4-04 ㅣ No.1377

[새로봄] 트라우마, 그 가운데에도 하느님이 함께 계시니

 

 

‘사랑의 종소리’를 기억하십니까? 1970-80년대에 밤 10시가 되면 라디오에선 “청소년 여러분 밤이 깊었습니다.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 되었습니다”라는 방송과 함께 사랑의 종소리가 흘러나왔습니다. 이렇게 사랑의 종소리가 울리면 선생님, 경찰, 동네어르신들이 한 조를 이뤄 동네 구석구석을 다니며 미처 귀가하지 못한 청소년들에게 어서 집으로 돌아가라고 선도를 했습니다. 언제부턴가 사랑의 종소리가 사라졌고, 밤거리를 방황하는 청소년을 선도하는 선생님 · 경찰 · 동네 어르신도 이제는 없습니다. 왜일까요? 사랑의 종소리나 동네 어르신들의 순찰이 필요 없을 정도로 안전한 사회가 된 것일까요?

 

 

가치를 상실해 가는 사회, 불안한 사회

 

현대 사회를 ‘위험 사회’ 또는 ‘트라우마의 시대’라고까지 말하는 것을 보면 사회가 좀 더 안전해진 것 같지는 않습니다. 유럽의 저명한 사회학자인 울리히 벡은 그의 저서 《위험 사회》(1986)에서 성찰과 반성 없이 근대화를 이룬 현대 사회를 ‘위험 사회’로 규정했습니다. 산업화와 과학기술의 발전이 물질적 풍요를 가져왔지만 동시에 새로운 위험을 몰고 왔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러한 위험을 이미 경험한 바 있습니다.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 붕괴 등의 대형 사고가 그것입니다.

 

요즘도 끊임없이, 우리의 일상에서는 대형 사고가 일어나고 있고 그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이 많습니다. 경제가 발전할수록 위험 요소가 증가하고, 그 위험은 예외적 위험이 아닌 일상적 위험이 되어 갑니다. 그로 인해 우리는 일상에서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불확실한 위험을 걱정하며 불안 속에 사는 듯합니다.

 

20-30년 전만 해도 집안의 경조사에 동네 사람들이 함께했고, 이웃끼리 음식을 나눠 먹거나 혼자 밥을 챙겨 먹어야 하는 아랫집아이를 윗집에서 데려다 함께 밥을 먹는 것이 흔한 일이었습니다. 이웃의 일도 내 일처럼, 이웃의 아이도 내 아이처럼 챙겼습니다. 함께 살아가는 한 공동체라는 의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공동체 의식이 우리를 지켜 주던 시절이었지요.

 

공동체 의식이 무엇인가요? 종교적으로 설명하자면 복음에서 초대하는 희생, 섬김, 봉사, 나눔, 배려, 인간 존중 등에 가치를 두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성찰과 반성 없는 근대화가 위험 사회를 가져왔듯이 이러한 가치의 상실이 우리의 안전한 울타리가 되어 주었던 공동체를 잃어가게 하고 있습니다. 공동체를 잃어버린 시대, ‘가치를 상실해 가는 시대’에서 우리는 마음속에 불안과 상처를 안고서 살아갑니다.

 

이러한 가치의 상실은 결국 ‘내’가 스스로 살아남아야 한다는, ‘내’ 안전은 내가 확보해야 한다는 생존의 문제를 부각시킵니다. 희생, 섬김, 봉사, 나눔, 인간 존중 등의 가치는 사라지고 경제적인 이익, 내 안전, 내 필요, 내 의미 등이 우리 마음을 차지합니다. 그러나 생존에 집중할수록 우리 자신이 느끼는 불안과 초조와 긴장은 커지고, 사회에는 불신, 분쟁, 분열, 억압이 발생합니다.

 

우리 중에는 우리가 이러한 가치를 상실한 채 살아가고 있음을 자각하지 못하는 사람도 많을 것입니다. 그러면 언제 이것을 자각하게 될까요? 되찾은 아들의 비유(루카 15,12-32)가 그 좋은 예입니다. 아버지를 떠나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탕진한 아들은 돼지들이 먹는 열매 꼬투리로도 배를 채울 수 없을 정도의 비참한 상황에 부닥칩니다. 이러다 굶어 죽을지도 모른다는 죽음의 공포를 느낄 때에야 비로소 아들은 아버지를 떠올립니다. “내아버지의 그 많은 품팔이꾼들은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아들은 아버지 집의 풍요를 깨닫고 일어나 아버지에게로 돌아갑니다.

 

아버지라는 울타리, 아버지가 이루고 있는 공동체가 아들을 보호하였지만, 아들은 그 속에 머물렀을 때에는 그 가치를 알지 못했습니다. 죽음의 공포가 아들에게 그 가치를 일깨워 주었습니다. 가치를 상실한 불안한 사회에서 우리는 이와 같은 공포를 느끼는 순간을 맞이하기도 합니다. 아예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으면 좋겠지만, 고맙게도 이런 순간에 맞닥뜨리더라도 그것이 곧 끝은 아닙니다. 아물 것 같지 않은 그 깊은 상처가 우리가 잃었던 가치를 깨닫게 하고 더 나아가 우리를 성장하게도 하기 때문입니다.

 

 

트라우마로 고통받는 이에게

 

살다 보면 결코 원치 않았던, 예기치 않았던 어려움이나 수용 한계를 넘어서는 충격에 휩싸이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트라우마로 짓눌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먼저 ‘우리에게 중요한 것만이 우리 마음을 움직이게 한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나에게 중요하지 않은 것은 나를 기쁘게 도, 힘들게도 하지 못합니다. 우리를 기쁘게 하는 것은 사실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자연스럽게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나를 아프게 하는 것(트라우마)도 내게 중요한 것입니다. 왜냐면 중요한 것만이 우리를 건드리기 때문이고, 중요하기에 내가 아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우리를 건드린 중요한 것이 우리를 성장으로 이끕니다.

 

아들을 먼저 하늘나라로 보낸 어느 작가는 아들을 잃은 고통이 너무도 커서 세상의 모든 것이 무의미해졌다고 합니다. 양 한 마리를 잃은 목자도 그랬습니다(루카 15,1-7). 양 한 마리를 잃어버렸다는 걸 알았을 때 그의 앞에 있는 아흔아홉 마리는 아무 의미가 없었습니다. 목자의 마음을 온통 사로잡은 것은 광야에 남겨진 양 한 마리였습니다. 그만큼 목자에게는 잃어버린 양 한 마리가 중요했기에 그의 마음이 그렇게 움직인 것입니다. 이처럼 소중한 것을 잃었을 때 충격을 받는 건 당연합니다.

 

하지만 충격이 충격으로 끝나지는 않습니다. 트라우마가 끝이 아닙니다. 되찾은 아들처럼 그 충격 속에서 잃었던 가치를 회복해 더욱 성장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모든 것(장점, 기쁨은 물론 단점, 잘못, 고통, 트라우마 등)을 통해서 우리를 성장시켜 주시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때, 그 시간에 있을 때는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느낍니다. 되찾은 아들도, 양 한 마리를 잃은 목자도, 아들을 잃은 작가도 그러했습니다.

 

그런데 되찾은 아들이 그러했듯, 목자가 그러했듯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바로 그 자리에서 그것을 되찾게 됩니다. 물론 트라우마라는 혼돈의 시간 속에 있을 때는 이 점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약함이 드러나는 그때에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깨닫고(마태 1,23: ‘임마누엘’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 그로 인해 잃었던 가치를 회복하고 성장할 수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트라우마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이들을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자비의 희년에 우리가 한 번쯤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요?

 

이스라엘 공동체와 40년간 함께했던 모세는 공동체의 모든 시련, 위기, 난관 등도 함께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해 온 모세가 약속의 땅을 눈앞에 두고 세상을 떠납니다(신명 34장).

 

모세를 떠나 보낸 이스라엘 백성의 상실감(트라우마)은 매우 컸을 것입니다. ‘모세 없이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있을까?’ 공동체는 불안을 느꼈습니다. 그야말로 엄청난 혼돈의 시간을 보냈고 그들 안에서도 대단한 충돌이 일어났습니다. 모세를 잃은 그 혼돈의 시간을 공동체가 함께 겪습니다. 모세를 애도하는 30일간의 애곡 기간을 통해 공동체는 상실의 경험을 공유합니다. 그리고 모세의 빈자리를 받아들입니다.

 

신약성경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과 3년을 함께 살았던 열두 제자와 여인들의 공동체는 그들이 전혀 원치 않는 방식으로 예수님을 잃습니다. 엄청난 충격이자 트라우마였을 것입니다. 그들도 혼돈의 시간을 보냅니다. 모세를 떠나보냈던 이스라엘 공동체보다 더 심각한 위기를 느끼고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숨어있습니다(요한 20,19). 예루살렘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기도 합니다(루카 24,13). 예수님이 함께 계시다는 것이 공동체에 힘이 되고 생기를 주었지만, 예수님의 죽음으로 모든 게 무의미해졌습니다. 제자들은 공동체가 와해될 위기의 시간, 실망과 좌절의 시간을 보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위기의 공동체로 오십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고 위기 상황에 처해 있는 제자들 한가운데로, 위기 속에서도 예수님을 따르려는 제자들뿐만 아니라 의미를 잃고 떠나가는 제자들에게도 오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요한 20,19)

 

트라우마라는 어둡고 힘든 시간을 겪고 있을지라도 예수님께서는 함께하고 계십니다. 그 고통이 너무도 커서 지금 당장은 깨닫지 못할지라도 이스라엘 백성이, 제자들이 ‘함께’ 상실의 경험을 공유했듯이, 트라우마로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해야 합니다. 다양한 형태의 가련함, 약함 등에 함께할 수 있는 능력, 그 고통을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이 바로 우리가 잃어버린 가치 - 인간 존엄성 - 를 꽃피게 하기 때문입니다.

 

* 최시영 신부는 예수회 소속으로 1990년에 사제로 서품되었으며, 현재 수원 말씀의 집에서 피정자들의 영적 동반자로 사목하고 있다.

 

[성서와함께, 2016년 11월호, 최시영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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