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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문헌ㅣ메시지

성 요한 바오로 2세의 몸 신학: 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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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2-28 ㅣ No.820

[교회문헌 읽기] 성 요한 바오로 2세의 몸 신학: 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사랑 I

 

 

‘몸의 신학’이라고도 불리는 이 문헌은, 성 요한 바오로 2세가 1979년 9월 5일부터 1984년 11월 28일까지 129회에 걸쳐 바티칸 광장에서 매주 수요일 순례자들에게 하신 가르침이다. 이 가르침은 몸이 가지고 있는 인격의 의미를 일깨우고, 성의 상이성과 자기증여, 개방성을 사랑과 혼인과 가정 안에서 온전하게 드러나게 한다.

 

 

제1부 한 처음

 

창조이야기에 나타난 인간에 대한 정의 : 1-3과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이혼에 대한 질문을 하는 바리사이들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신다. “모세는 너희의 마음이 완고해서 이혼장을 써 주고 이혼하라고 했지만, ‘처음’부터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마태 19,3-9 참조). 예수님이 말하는 ‘처음’은 창세기에서 말하는 그 ‘한 처음’을 뜻한다. 한 처음에 일어난 두 가지 인간창조이야기를 살펴보면서 예수님의 뜻을 찾아본다.

 

우주론적 성격을 부여할 수 있는 첫 번째 인간창조이야기에서 하느님은 오직 인간에게만 성의 상이성을 강조하셨다. “남자와 여자로 그들을 창조하셨다”(창세 1,27-28). 두 번째 인간창조이야기인 창세기 2장을 보면, 사람의 가장 오래된 자기 이해에 대한 서술이 나오고, 창세기 3장과 더불어 사람의 양심에 대한 최초 증언을 볼 수 있다.

 

창세기 3장에 나오는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창세기가 말하는 두 원초적인 상황들 사이의 경계선이다. 첫 번째 상황은 ‘원순수’의 상황이다. 그 안에서 사람은 창조주의 금기사항을 위반하지 않고 인식의 나무 열매를 따먹지 않는 동안 선과 악의 인식 밖에 존재한다. 이 두 번째 상황에서는 사람은 뱀으로 표상된 사악한 영의 유혹으로 창조주의 명령을 어긴 후 선과 악의 인식 안에 존재한다. 이 두 번째 상황이 ‘원순수’상태와 대비되는 인간 죄성의 상태다.

 

 

‘원순수’와 ‘원고독’ : 4-6과

 

선과 악을 아는 나무는 인간의 마음 안에서 깨어진 하느님과의 계약을 상징하고 또 표현한다. 죄는 ‘역사적 인간’의 일부이지만 모든 사람 안에는 ‘원순수’상태의 뿌리가 있다. 그런 까닭에 인간의 역사적 죄성은(영혼에 관한 것이든 육체에 관한 것이든) 원순수와 함께 설명되어야 한다.

 

역사적 죄성은 원죄의 ‘공동상속’이며 손상된 은총의 상태다. 그러나 “여자의 후손이 너의 머리에 상처를 입히고 나는 그의 발꿈치에 상처를 입히리라”는 창세기 3장 15절의 ‘원복음’이 선포된다. 첫 번째 남자와 첫 번째 여자가 창조주와의 원계약을 파기한 후, 다시 구원에 대한 첫 번째 약속을 받은 것이다. 이 구원에 대한 전망은 무한히 풍요로운 빛을 보여준다.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그에게 알맞은 협력자를 만들어 주겠다”(창세 2,18)는 말씀은 인간이 지닌 ‘원고독(solitudine originaria)’의 의미를 설명해준다. 이 고독은 인간의 본성 그 자체에서 비롯되는 고독이고, 또한 남자-여자의 관계에서 생겨나는 고독이다. “사람이 생물 하나하나를 부르는 그대로 그 이름이 되었다 … 그러나 그는 사람인 자기에게 알맞은 협력자를 찾지 못하였다”(창세 2,19-20)의 말씀처럼 인간은 땅위에 있는 어떤 것과도 견줄 수 없는 우위성에 대해 자각하기 시작한다. 이 과정은 인격을 특징짓는 고유의 주체성이며 인간 존재의 첫 윤곽이다.

 

야훼-하느님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관련한 명령을 내리시며 선택과 자기 결정의 순간, 다시 말해 자유 의지 측면을 덧붙인다. 몸은 사람으로 하여금 세상안의 여타 생물과 다르다는 것을 인식하게 도와준다.

 

 

인격들의 친교를 통해 하느님의 모상 되기 : 7-9회

 

사람의 몸은 물질성을 지니고 있지만 사람만이 홀로 ‘흙을 일구고’(창세 2,5 참조) ‘땅을 다스릴’(창세 1,28 참조) 자각과 직관이 있다. 창세기 2장 17절의 “그 열매를 따 먹는 날, 너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는 ‘한 처음에’ 하느님 앞에선 인간 고독의 실존적 의미다.

 

여자 창조 이야기의 앞부분에 나오는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다”(창세 2,18)라는 말씀은 이제 ‘원고독’과 함께 ‘원일치’의 의미를 알려준다. 사람은 자기와 비슷한 존재를 찾고 싶은 바람을 가지고 ‘깊은 잠’에 빠져 들었고, 자신의 ‘갈빗대’로 만든 여자를 보고 기쁨의 탄성을 지른다. 존재의 동질성을 느끼며 자신의 협력자로 당장 받아들인다(창세 2,21-25 참조).

 

이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사목헌장 12항의 가르침에 따라 인격들의 친교(communion personarum)로 정의되는 일치로 나가는 길이다. 사람은 다른 생물과 자신을 구별하는 과정을 통해 인격적 의식에 이르게 되고 자신과 비슷한 존재를 향해 열리게 된다. 서로를 도와주고 협력해 주는 남자와 여자의 상호관계가 인격적 친교가 된다. 사람은 고독의 순간보다 친교의 순간에 하느님의 모상에 더 가까워진다.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창세 2,23 참조)라는 남자의 표현은 또한 몸이 사람을 계시한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리고 육체성을 지닌 여성은 하느님과 닮은 존재임을 드러낸다. “둘이 한 몸이 된다”(창세 2, 24 참조)는 말씀은 육체적 ‘몸’만이 아니라 인격들의 친교이며, 상호 풍요로움을 통해 인간성은 새롭게 형성된다. [외침, 2017년 1월호(수원교구 복음화국 발행), 정리 도희주 기자]

 

 

[교회문헌 읽기] 성 요한 바오로 2세의 몸 신학: 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사랑 I

 

 

‘몸의 신학’이라고도 불리는 이 문헌은, 성 요한 바오로 2세가 1979년 9월 5일부터 1984년 11월 28일까지 129회에 걸쳐 바티칸 광장에서 매주 수요일 순례자들에게 한 가르침이다. 몸과 성의 상업화가 극대화되고 있는 요즈음, 이 가르침은 몸이 가지고 있는 인격의 의미를 일깨우고 하느님을 향해가는 새로운 길을 열어준다.

 

 

인간의 원체험이 갖는 의미 : 제10과-제13과

 

하느님께서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신 ‘원일치’가 지니는 의미와 앎(conoscenza)은, ‘혼자’인 사람이 필연적으로 거치게 되는 ‘친교’를 통해서만 이루어져야 한다(창세 2,23 참조). 인간의 앎은 남성성과 여성성을 통해 서로를 자각하며 형성된다.

 

창세기 2장 24절(‘둘이 한 몸이 된다’)에서 말하는 일치성은 인격들 간에 자기를 선물로 내어주는 결합이다. 또한 성이 지닌 육체성 이상의 인격관계이며 몸 안에 새겨진 인간 고독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을 표현한다.

 

창세기 2장 25절의 “사람과 그 아내는 알몸이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는 말씀은 그들의 의식상태를 묘사한다. 또한 선과 악을 알게 하는 인식나무와 관련된 시험이 실패한 후 창세기 3장 7절의 “그러자 그들은 눈이 열려 자기들이 알몸인 것을 알게 되고…”라는 구절과 비교된다.

 

“알몸이면서 부끄러워하지 않았다(창세 2,25 참조)”는 결핍이 아니라 인식과 체험의 특별한 충만함, 몸이 지니는 충만함을 가르친다. 3장에서 인식하는 ‘부끄러움’은 그 원초적 충만함의 상실과 연결된다. 몸은 인격을 그의 존재론적이며 본질적인 구체성으로 표현하고 소통한다. 남자와 여자는 몸에 새겨진 하느님의 모상을 지니고 서로 다른 방식으로 존재한다.

 

 

사랑의 자유를 통해 선물이 되는 사람-인격 : 제14과-제16과

 

사람은 ‘누군가와 함께’ 실존할 때, 그리고 ‘누군가를 위해’ 실존할 때, 오로지 그때만 인격의 본질을 훨씬 더 심오하고 완전하게 실현할 수 있다. 남성성과 여성성을 지닌 몸은 상호 증여의 원초적 표징이고 인격으로서의 인간 실존을 나타낸다. 또한 몸이 지닌 ‘혼인적 의미’에 대해서도 계시한다.

 

‘한 처음’ 남성성과 여성성을 부여받은 두 사람 모두가 ‘알몸’이었던 이유는 그들이 몸과 성에서 기인하는 모든 억압으로부터 자유로웠기 때문이다.

 

몸이 지니는 혼인적 의미의 계시와 발견은 인간의 원행복을 설명하면서 또한 ‘몸의 속량’(로마 8장 참조)에 이르는 길을 보여준다. 몸의 혼인적 의미는 인격의 내어줌이고 자신을 온전히 내어줌이며 자신을 온전히 되찾는 길이다. 부끄러움에서 자유로워지면 우리는 원순수의 신비로 향할 수 있다. 이 신비는 선과 악을 알기 이전, 선과 악에 대한 앎을 모르는 인간 실존의 신비다. 역사적 인간은 원죄를 범함으로써 이 신비에서 멀어졌다. 그러나 몸의 혼인적 의미에 대한 복된 의식은 우리에게 원순수의 상태를 알려준다.

 

 

인격으로서의 주체성 : 제17과-제19과

 

인간의 의지는 근원적으로 순수하다. 이 때문에 인격의 선물인 남성성과 여성성에 따라 몸을 선물로 주고받는 것이나 상호성은 쉽게 이루어질 수 있다. 그러나 서로에 대한 선물을 억지로 빼앗는 강탈과 순전히 ‘나를 위한 대상’으로 전락시키는 것이 부끄러움의 시작이 된다. 자기를 내어주는 선물 안에서 자기 자신을 재발견하는 것은 증여의 열매로 성장한다.

 

원순수의 의미는 “윤리적으로” 규정되며 인간 에토스(ethos)의 미래를 구축한다. 혼인 안에서 남성과 여성은 주체성의 충만함 안에서 서로를 내어주는 인격들의 친교를 시작한다. 부끄러움에서 자유로운 그들의 ‘알몸’을 통해 성장한다. 이러한 상호 증여가 멈춘다면 ‘알몸’임을 알아보는 부끄러움이 생겨날 것이다.

 

사실 몸, 그리고 성만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으로 드러낼 수 있으니, 곧 영적인 것이며 신적인 것이다. 몸은 하느님 안에 영원으로부터 감춰진 신비를 세상의 가시적 실재 속으로 건네주기 위해 창조되었으며, 표징이 된다.

 

 

앎-출산의 순환 그리고 죽음의 전망 : 제20과-제23과

 

이제 성경의 ‘한 처음’에 할애한 분석에 창세기 4장의 짧은 단락을 덧붙여 보고자 한다. “사람이 자기 아내 하와와 잠자리를 같이 하니, 그 여자가 임신하여 카인을 낳고…”(창세 4,1 참조). 이 말씀에서 부부결합은 바로 ‘앎’이 된다.

 

성은 이 ‘앎’을 통해 사람의 인격적 정체성과 구체성도 동시에 정의한다. 그리고 ‘앎’안에서 남자는 그의 아내에게 준 이름 ‘하와’의 의미를 확인한다. 그녀는 살아있는 모든 것들의 어머니가 되었기 때문이다(창세 3,20 참조). 출산은 남자와 여자가 자기들에게서 기원한 ‘제3자’를 통해 서로를 알아볼 수 있게 해준다. 이 ‘앎-출산’의 주기 안에서 생명은 늘 새롭게 죽음의 냉혹한 전망과 투쟁하고 그것을 이겨낸다.

 

‘몸신학’은 몸의 참 의미, 몸의 인격적 의미와 ‘친교’로 이를 제시해 주고 있다. 이제 앞으로의 묵상주제는 몸의 욕망 앞에서 사람의 마음이 지닐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산상설교(마태 5,8 참조)와 미래의 부활에 대한 말씀(마태 22,24-30)이다. [외침, 2017년 2월호(수원교구 복음화국 발행), 정리 도희주 기자]

 

 

[교회문헌 읽기] 성 요한 바오로 2세의 몸 신학: 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사랑 I

 

 

제2부 마음의 구원

 

마음의 간음 : 제24-26과

 

이제 그리스도의 다음 말씀을 묵상하고자 한다. “간음해서는 안 된다…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자는 누구나 이미 마음으로 그 여자와 간음한 것이다”(마태 5,27-28 참조). 이는 한 처음의 의미와 더불어 ‘몸 신학’의 열쇠가 된다. 더불어 마태오 복음 5장 19-20절에 나오는 ‘율법의 완성과 의로움에 대한 추구’는 하느님 나라의 필요조건이 되며, 하느님께서 원하셨던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다. 곧 에토스(가치에 대한 인식으로 의무에 대한 자각적 지식)의 충만함이며 윤리적 인간-주체의 내면적 이끌림이다.

 

그리스도는 인간이 본래의 온전한 모상이 되도록 요청한다. 사람은 그의 내면과 마음에서 자신을 되찾아야 한다.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볼’ 때 남자가 범한 ‘마음의 간음’은 분명히 내적 행위를 뜻하고 갈망(desiderio : 반짝이는 ‘별’이라는 뜻의 합성어. 부정적 의미일 때는 ‘욕망’을 의미)에 관한 것이다. 이는 창세기 2장 24절의 ‘둘이 한 몸’이 되게 하는 일치를 깨트린다.

 

요한의 첫째 서간에 이러한 욕망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육의 욕망과 눈의 욕망과 살림살이에 대한 자만은 아버지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온 것입니다”(1요한 2,16).

 

인간의 마음 안에서 세 가지 형태의 욕망으로 창조주와 맺은 계약이 파기되었다(창세 2,17: 3,1-6 참조). 그 결과로 인간의 마음이 욕망의 장소이며 근원이 된다. 또한 창세기 3장 6절에서는 죄와 관련하여 부끄러움이 생겨났다는 사실을 명백히 하고 있다.

 

 

부끄러움을 느끼는 알몸의 의미 : 제27-29과

 

‘제가 알몸이기 때문에 두려워 숨었습니다’(창세 3,10)는 말씀은 원초적 알몸의 의미가 근본적으로 변화되었음을 증명한다. 원순수상태(창세 2,25 참조)에 있던 알몸은 결핍의 표현이 아니라, 인간의 근원적 ‘고독’을 증거하고 인격들 간의 친교로 상호증여를 보여주는 요소였다. 그러기에 몸은 ‘하느님 모상’의 징표를 지니고 있었다. 이제 그 ‘하느님 모상’에 대한 원초적 확신을 잃어버렸고 창조의 신비를 통해 누리던 세상에 대한 지각에 참여할 권리도 잃어버렸다.

 

그 부끄러움은 자신의 내면차원에서 드러나는 동시에 ‘타인’과의 관계에서도 드러난다. 여성성과 남성성의 가시적 상징들을 상대 시선으로부터 보호하려고 자신들의 알몸을 감추는 부끄러움이다. 인간영육간의 원초적 일치가 무너짐으로써 그의 인격내부에서 구조적 균열이 발생한 것을 볼 수 있다. “그러자 그들은 눈이 열려 자기들이 알몸인 것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서 두렁이를 만들어 입었다”(창세 3,7).

 

이는 인격들 간의 친교를 가능하게 하던 몸의 고유한 ‘기층’의 상실을 의미한다. 또 자기 자신을 내어주는 상호 친교에서 충만함을 가능케 했던 단순함과 원체험의 ‘순수’도 사라지게 된 상태다.

 

 

상호선물의 원의 안에 있는 인격들의 친교 : 제30-33과

 

“너는 네 남편을 갈망하고 그는 너의 주인이 되리라”(창세 3,16)는 말씀은 창세기 2장 24절의 단어들처럼 미래지향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지배하려는 남자의 충동이 더 크다고 본다면 남자보다는 여자가 충만한 일치의 결핍을 더 느끼게 됨을 말해준다.

 

남자가 여자를 지배하게 되는 그 순간부터 상대방을 자기 자신의 욕망의 수단이나 대상으로 삼는 소유관계가 발생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자신을 내어주는 두 주체의 충만한 영적 일치의 인격적 친교가 깨어진 것이다.

 

‘마음’은 욕망으로 인해 습관적으로 위협을 받게 되었고 사랑과 욕망의 투쟁장소가 되었지만 몸의 혼인적 의미는 그 마음에서 완전히 멀어진 것은 아니다. 인격인 인간은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내어주는 선물을 통해서가 아니면 어디서도 자기 자신을 온전히 되찾을 수 없는’ 존재다. 특히 육의 욕망은 인간을 ‘다른 이를 위한’ 대상으로 전락시키면서 ‘비인격화(depersonalizzare)’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인격의 주체성이 몸의 대상성에 자리를 내주는 것이다. 욕망은 ‘소유의 대상’을 향하게 되어 있고 소유의 다음단계는 ‘쾌락’이다. 이는 몸의 혼인적 의미를 보존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산상설교를 통해 인간마음에 호소하신 점을 이해하고자 한다면 남성성과 여성성의 상호 선물을 통해 인격들의 친교를 회복해야 한다. [외침, 2017년 3월호(수원교구 복음화국 발행), 정리 도희주 기자]

 

 

[교회문헌 읽기] 성 요한 바오로 2세의 몸 신학: 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사랑 I

 

 

마음의 에토스 : 제34-36과

원죄 이후 인간 ‘마음’의 역사는 세 가지 욕망이 지니는 억압 아래 쓰이게 된다. 욕망의 인간의 모습은 가장 심오한 에토스 이미지로 등장한다. 이 가장 깊은 곳은 ‘외적’ 인간의 행동과 사회적 삶의 영역의 다양한 구조와 제도의 형태를 결정하는 힘이다. 이러한 에토스의 내용을 알 수만 있다면 우리는 인간의 내밀한 모습, 인간의 내적 형상을 만날 수 있다. 그리스도는 하느님께서 뜻하셨던 선과 악에 대한 올바른 의미가 사라지거나 퇴색된 율법 해석에 대해 근본적인 선명성을 회복하고자 한다. 그 완성의 조건은 율법에 대한 올바른 이해다(마태 5,17 참조).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요한 8,7)라는 구절은 이스라엘의 율법 조항보다 그들의 양심에 호소함이다. 인간의 양심에 새겨진 선과 악에 대한 식별은 어떤 법 규범보다 더 바르고 깊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스도께서는 전통과 법이 지닌 허점을 넘어서게 하며 그 의미를 새롭게 밝혀준다(마태 5,27-28 참조). 율법은 ‘마음’의 질서에 직접 관계된 것이라기보다는 늘 혼인과 가정의 기초가 되는 사회적 삶 전반의 질서를 다루고 있다. 구약의 이사야·호세아 · 에제키엘 예언서에서 계약의 하느님은 자주 신랑으로 묘사되며 이스라엘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부부의 혼인적 사랑과 동일시 될 수 있다. 이스라엘이 신랑이신 하느님을 저버리고 우상을 숭배하는 것은 그분에 대한 배반이고 이 배반은 남편을 배신하는 여인에 비교할 수 있다.


욕망이 축소하는 몸의 혼인적 의미 : 제37-40과

간음은 남자와 여자의 인격적 계약을 파기하기 때문에 죄가 된다. 간음은 혼인의 순수한 ‘내적 진리’를 허위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두 인격 간에 한 몸(창세 2,24 참조)이 되는 육체적 일치가 그들의 ‘권리’(쌍방적 권리)라 말할 수 있다. 부부의 품위 안에서 남자와 여자사이에 형성된 일치는 인격들의 친교의 표징이다. 간음은 이 권리에 대한 침범일 뿐 아니라 표징을 허위로 만드는 것이다.

마태오 복음 5장 27-28절에 드러나는 ‘몸’의 간음에서 ‘마음’의 간음으로의 이동과, 마음에 대한 통찰은 잠언과 집회서 · 코헬렛 등의 지혜문학을 통해서도 살펴볼 수 있다. 이 책들은 인간의 ‘마음’에 대한 탁월한 통찰을 담고 있다. ‘음욕’은 아직 외적으로 행위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 ‘몸의 행위’로 옮겨지지 않은 상태다. 그렇지만 ‘음욕’은 그 자체로 알아볼 수 있으며 욕망으로 여자를 바라보는 이는 “마음 안에서 그녀를 간음한 여자로 만들었다”(마태 5,28 참조)라고 말한다. 음욕도 간음처럼 몸의 혼인적 의미의 내적 이탈이며 ‘마음으로 범한 간음’이다.

창세기(특히 2,23-25 참조)는 영원한 부르심과 남자와 여자의 이성을 향한 영원한 상호 이끌림을 매개로 한 초대이다. 마태오 복음 5장 27-28절이 뜻하는 욕망은 아니다. 욕망은 인간 마음의 실체를 이루는 한 부분이지만 남성성과 여성성을 향한 서로의 이끌림을 혼인적 친교로 만드는 것을 축소한다. 오직 상대를 성적인 욕구의 만족 대상으로 남게 한다.


새로운 윤리적 의미의 확립 : 제41-43과

그리스도께서 ‘음욕을 품고 바라보는’(마태 5,28 참조) 남자에 대해 말씀하실 때는 단순히 ‘바라보다’라는 욕정과 심리적 차원뿐 아니라 인간 실존 자체가 지닌 지향성의 차원도 함께 가르친다. 이때 여자는 ‘영원한 여자다움’ 그 자체의 인격으로서의 매력을 박탈당한 채 남자에게 단순한 대상으로 전락한다. 창세기 2장 24절에 따른 남성성과 여성성의 지속적이고 상호 이끌림의 근본의미에서 멀어짐이다. 마태오 복음 5장 27-28절의 말씀은 ‘간음하지 마라’는 계명(6계명)만이 아니라 ‘남의 아내를 탐내지 마라’는 계명(9계명)까지 포함하고 있는 십계명의 논리에 부합한다. 이는 새로운 에토스의 본질적 가치를 드러내는 주요한 실마리이다.

‘음욕을 품고 바라봄’(마태 5,28)은 욕망의 본성 그 자체이기에 비록 자기 아내라 할지라도 이런 눈으로 바라본다면 그 또한 ‘마음으로’ 간음을 저지르는 일이 된다. 즉 남성성과 여성성이 지닌 심원한 이끌림의 풍요로운 인격적 친교를, 몸의 성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으로 축소하고 지향성을 변질했기 때문이다. 이제 그리스도는 마음이 율법의 ‘완성’ 장소가 될 수 있도록 마음의 심층에 이르는 길을 보여준다. 바로 마태오 복음 5장 8절의 ‘마음의 깨끗함’이다. 에토스의 새로운 차원은 이 마음 안에서 온전히 빛날 수 있다. [외침, 2017년 4월호(수원교구 복음화국 발행), 정리 도희주 기자]

 

 

[교회문헌 읽기] 성 요한 바오로 2세의 몸 신학: 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사랑 I

 

 

마음이 지닌 몸의 가치와 그 실천 : 제44-46과

우리는 그동안 수요 만남에서 그리스도께서 여러 차례 ‘인간 마음’에 호소하신 산상설교 말씀들을 자세히 분석해 보았다. 육의 욕망에서 생기는 음욕은 동시에 어떤 식으로든 모든 ‘역사적’ 인간이 경험하는 일종의 내적이고 신학적인 실재다. 산상설교에서 밝혀진 가치들이 나의 의지와 마음과 욕구에 어떤 선택의 의무를 지우고 실천(praxis, 자신의 주체성이 들어간 창조적인 행위의 실천)에 영향을 주는지가 중요하다. 각 개인은 비록 윤리학자는 아니더라도 직접적인 주체로서 윤리의 흥망을 좌우하는 자신의 역사를 써 가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남성성과 여성성을 지닌 몸은 ‘한 처음부터’ 영을 드러내는 표지가 되도록 부름 받았다. ‘한 몸’을 이루기 위해 서로 결합하는 남자와 여자의 혼인적 일치를 통해서도 몸은 영을 드러내는 표지가 된다. 이는 몸이 지닌 성사적 표징의 가치라고 할 수 있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는 육의 욕망에 대해 경고하시며 몸에 대한 진리를 말씀하시고 몸의 윤리적 의미를 확인해 준다(마태 19,5-6 참조). 또한 산상설교(마태 5,27-28)의 말씀에서 절제되지 않는 육의 욕망에 대한 고발은 동시에 이 악을 이겨내라는 초대다.

그리스도의 이 초대는 현대 철학자 폴 리쾨르(Paul Ricoeur)에 의해 ‘의심의 스승들’이라 평가된 니체(Nietzsche), 프로이트(Freud), 마르크스(Marx)의 해석학과는 다르다. 니체의 해석학에 나오는 인간 마음에 대한 심판과 고발은 ‘살림살이에 대한 자만’과 부합한다고 볼 수 있고, 마르크스의 해석학은 ‘눈의 욕망’이라고 불리는 것과, 프로이트의 해석학은 ‘육의 욕망’과 맞닿아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호소는 ‘몸의 속량’(로마 8,23)이라는 신비의 토대 위에 있다. 인간에게 주어진 선물인 내적 자유, 육의 욕망에 대한 통제로부터 오는 자유로운 상태, 자유로운 영적 힘을 표현하도록 부름 받았음을 인식하는 것이다. 이는 인간이 마음에서 ‘비난’과 육의 욕망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최상의 가치인 ‘사랑’으로의 부르심을 느끼는 것이다.


에로스와 에토스가 맺는 열매 : 제47-49과

플라톤에 따르면 ‘에로스(Eros)’는 모든 좋은 것(善)과 참된 것(眞), 아름다운 것(美)을 향해 인간을 끌어당기는 내적 힘이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이 ‘이끌림’은 무엇보다 먼저 관능적인 본성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우리가 ‘에로스’를 플라톤의 개념으로 인정하면 산상설교에서 그리스도께서 알려주고자 하셨던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산상설교의 말씀은 바로 구원의 에토스(Ethos, 가치와 의무에 대한 자각적 인식)가 지닌 범주이며 인간의 마음 안에서 에로스와 에토스가 만나 열매 맺도록 부름 받았음을 의미한다.

이 묵상 안에서 몸의 혼인적 의미와 내어 줌의 참된 품위를, ‘관능적인 것’ 안에서 재발견한다. 남성성과 여성성이 지닌 성숙하고 자발적인 이끌림은 에로스의 완전한 차원을 이룬다. 성적 욕구가 고귀한 기쁨으로 연결되었을 때 단순한 욕구와는 구별되며 몸이 구성하는 표징의 영적인 아름다움을 재발견하게 된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마음’ 곧 내적 인간을 향한 것이며 내적 인간은 몸의 에토스의 유일한 주체로 새로운 에토스가 된다(마태 5,27-28 참조). 새로운 에토스는 새로운 ‘자녀 됨’(로마 8,23)과 함께 ‘몸의 속량’을 향하고 있다. 이 가르침 안에서의 근본 기준은 ‘한처음’이다.


‘깨끗함’의 의미와 그리스도인의 ‘의화(義化)’ : 제50-53과

산상설교에서 선포된 그리스도의 말씀을 깨끗함에 대한 분석으로 마무리한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마태 5,8). 그분께서는 인간의 마음을 단죄하지 않으시고 초대하신다. 그리스도는 명확히 어떤 것도 ‘밖으로부터’ 인간을 더럽힐 수 없고, 도덕적 깨끗함은 오직 인간 내면에 근원을 두며 그것은 마음으로부터 온다고 본다(마태 15,18-20 참조). 이러한 깨끗함은 바로 ‘성령에 따른’ 삶에서만 실현될 수 있다.

바오로는 역사적 인간 안에 이미 예정된, 그리스도 안에서의 의화를 강조한다(로마 8,11 참조). 이 의화는 신적 계획의 한 차원인 인간 구원과 성화(聖化)이다. 이러한 성령을 따르는 삶의 투쟁(갈라 5,17 참조)에서 선을 선택함으로써 의로움이 인간 안에서 ‘차고 넘치게’ 되는 것이다(마태 5,20). 또한 바오로가 말하는 ‘육의 행실’은 인간의 영과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에 대립하는 삶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로마 8,12-13 참조).

실제로 ‘모든 율법’(구약의 도덕법)이 사랑의 계명에서 그 ‘완전함을 발견’하고 복음의 가장 위대한 계명을 담고 있는 사랑에 자유가 윤리적으로 예속된다는 점을 강조한다(갈라 5,13-14). 반면 모든 윤리적 선은 ‘영에 따른 삶’에 연결되며 ‘자제(continenza)’ 혹은 ‘절제(temperanza)’의 덕행에 일치하는 행위가 된다. [외침, 2017년 5월호(수원교구 복음화국 발행), 정리 도희주 기자]

 

 

[교회문헌 읽기] 성 요한 바오로 2세의 몸 신학: 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사랑 I



바오로 사도의 몸에 대한 존중의 가르침 : 제54-56과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뜻은 바로 여러분이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곧 여러분이 불륜을 멀리하고, 저마다 자기 아내를 거룩하게 또 존중하는 마음으로 대할 줄 아는 것입니다”(1테살 4,3-4)라고 언급한다. 이 중에서 깨끗함을 지닐 수 있게 하는 것은 역량(capacita)인데, ‘자세’(마음가짐)이다. 이러한 능력(abilita)이 곧, 덕(德)이며 ‘음행’(impudicizia)을 통제할 수 있는 절제의 한 모습이다.

바오로 사도의 몸에 대한 ‘묘사’는 단순히 몸(육체적 의미에서 유기적 조직체로만 이해된 몸)만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몸을 통해 자기 자신을 표현하는 사람을 다룬다. 특히 바오로 사도가 인간의 몸에서 더 모자라고 볼품없는 지체들을 존중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1코린 12,18-25)은 창조주의 원계획, 다시 말해 “하느님께서 보시니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이 참 좋았다”(창세 1,31)는 전망과 일치한다. 또한 ‘더 약하고’, ‘덜 소중하고’, ‘점잖지 못한 지체들’로 깍아내리는 몸 안의 분열(1코린 12, 18-25)은 원죄 이후 인간의 표현이다. 이에 대한 점진적인 승리의 길은 바로 깨끗함의 길이다.

깨끗함을 ‘능력’으로 이해할 때 이는 ‘성령에 따른’ 삶의 표현이고, 또 성령의 선물이 열매를 맺는 인간의 새로운 능력이라 할 수 있다. 성령은 몸이 지닌 존엄성의 또 다른 근원이며 도덕적 의무의 근원이기도 하다.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은 우리를 비싼 값을 치르고 속량(1코린 6,20)해 주셨고 각 인간의 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초월적인 차원으로 새롭게 드높아졌다.


‘깨끗함’에 대한 바오로 사도의 가르침 : 제57-59과

바오로 사도는 “여러분의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라는 것을 모릅니까?”(1코린 6,15)라고 질문하며, 그리스도에 의해 완성된 ‘몸의 구원’ 신비를 특별한 도덕적 의무의 근원으로 명시한다. 또한 성령은 인간의 몸이 자신의 ‘성전’인 것처럼 그 안에 머물며 영적인 선물들과 함께 활동한다. 이 선물 중에서 깨끗함의 덕에 가장 가까운 것이 효경의 선물(donum pietatis)이며, 단순성, 투명함, 내적 기쁨을 되찾게 한다.

성경의 시각에서 보면 ‘마음의 깨끗함’은 ‘육의 욕망’과 관련된 죄들뿐 아니라 모든 유형의 죄와 잘못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한다. 인간의 마음을 향한 산상설교에서 그리스도의 호소가, ‘한처음’을 향한 그분의 부르심이 ‘몸신학’이라는 인간학을 형성할 수 있게 했다면, ‘몸신학’은 교육학이기도 하다. 몸을 유기체로만 다루는 현대과학의 발전은 모두 생물학적 지식의 성격을 띠고 있고 자신의 몸이 인격체라는 의미와 존엄을 박탈한다. 몸에 대한 생물학적 지식은 인간 인격에 합당한 영적 성숙과 보조를 같이할 때만 진정한 몸의 고유한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사람의 몸과 예술 작품 : 제60-63과

우리는 몸을 사람, 곧 남자와 여자인 인격적 주체성에서 벗어난 하나의 객관적 실체로 분리해서는 안 된다. 실질적으로 몸의 에토스와 관련된 거의 모든 문제는 인격인 몸의 존재론적 정체성 체험과 연결되어 있다. 사람은 몸을 주제로 하는 예술 작품이나 문화 콘텐츠와 같은 창작활동 안에서 ‘몸의 실재’와 맞부딪히며 몸을 체험한다. 이때 ‘사람-몸’과의 근본적인 접촉을 상실한 몸이, 익명성을 지닌 복제의 대상이 되는 것은 인격의 정체성을 가리거나 은닉하는 방식이다.

인간의 몸, 곧 그의 남성성과 여성성의 총체적 진리를 반영하는 벌거벗은 몸은 인격이 인격에 주는 선물이라는 의미가 있다. 인간의 몸이 벌거벗음과 연결된 인격적 감수성의 한계를 넘어섰을 때 ‘외설 영상(pornography)’이라는 비난을 받게 된다. 몸의 내밀함의 권리가 침해당하고 인간 몸의 혼인적 의미인 상호증여의 법칙이 침해당함이 증명된다. 그 이미지 안에 심오한 인격적 내용과 가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매체’ 수단들에 의해 대상이 될 때, 좀 더 정확하게 어떤 의미에서 익명의 대상이 될 때, 그 참된 기층으로부터 뿌리째 뽑히게 된다.

고전 예술의 전성기인 그리스 문화에서 우리는 인간의 벌거벗은 몸을 주제로 하는 예술 작품들을 발견하고 남성성과 여성성이 지닌 아름다움, ‘관능을 초월한’ 아름다움까지 꿰뚫어 볼 수 있다. 이 작품들은 인격적 경이로움으로 인도하는 신비로운 승화의 요소를 지닌다. 그러나 인격적 감수성 영역과 충돌을 일으키는 작품도 많은데 이는 인간 몸의 표현 의도가 욕망의 충족을 위한 ‘쾌락’의 대상으로 축소되었기 때문이다. 진지하고 책임 있는 예술 활동은 대상으로 전락하는 인간 몸의 익명성을 초월하려 노력한다. 이러한 창조적 노력은 몸 안에서 인간에 대한 진리의 예술적 표현을 찾아가게 한다. [외침, 2017년 6월호(수원교구 복음화국 발행), 정리 도희주 기자]

 

 

[교회문헌 읽기] 성 요한 바오로 2세의 몸 신학: 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사랑 I

 

 

제3부 육의 부활

부활에 대한 가르침과 신학적 인간학 : 제64-66과


그리스도가 바리사이, 사두가이들과 나누신 대화는 ‘몸 신학’의 핵심 의미를 담고 있다(마태 22,24-30; 마르 12,18-27; 루카 20,27-40 참조). 부활을 부정하는 사두가이의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마르 12,24-25) 하셨다. 이 말씀은 문제의 본질을 드러내는 것이다. 또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탈출3,6)를 언급하며 하느님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임을 강조한다(마르 12,26-27 참조).

그리스도의 이 핵심적 확언은 죽음을 끝이라 받아들이지 않고 생명의 실재로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있는 것이다”(루카 20,38). 살아계시고 생명이신 하느님은 창세기에서 ‘한처음’에 계시된 것처럼(창세 1-3장) 존재와 생명의 원천이 된다. 비록 죄로 인하여 육체의 죽음이 인간의 운명이 되었지만,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성조들, 모세와 이스라엘과 맺은 계약 안에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그 전망을 다시 드러내신다.

또한, 남자의 몸과 여자의 몸으로 존재한다는 것이 몸의 부활과 더불어 ‘저 세상’에서 새롭게 구축된다. 영혼과 몸의 관계에서 토마스 아퀴나스가 했던 것처럼 플라톤의 철학 개념이 아닌 아리스토텔레스의 개념으로 접근하는 것이다. 부활을 통해 영혼이 몸이라는 일시적 감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부활은 몸과 영혼이라는 인간존재의 최종적인 일치와 통합의 상태가 되는 것이다.


부활은 인격의 완전한 실현 : 제67-69과

부활 안에서 인간의 몸은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의 대립을 더는 체험하지 않는다. 이것이 영이 몸에 완전히 스며들어, 영의 힘이 몸의 에너지로 스며드는 영화(靈化,spiritualizzazione)이다. 부활은 인간 안에 있는 육적인 모든 것이 그 자신 안에 있는 영적인 모든 것에 완전히 참여할 때 이루어지며 인격도 완전하게 실현된다. 이는 인간성의 심오한 ‘신화(divinizzazione)’의 상태이며 신적 본성에 참여하는 것, 하느님의 내적 삶에 참여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내적 삶에 참여하는 것은 지상 삶의 고유한 그 어떤 체험보다 절대적으로 우위에 있으며, 하느님 편에서 당신 자신을 내어주시는 선물에 대한 복된 체험을 가능하게 해 준다. 또한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는 ‘동정’, 종말론적 완결의 상태는 몸의 혼인적 의미의 완성을 드러낸다. 또한, 하느님께만 집중하는 사랑의 깊은 힘의 탄생을 의미한다. 이 집중은 또한 삼위일체의 실재에 충만하게 참여하는 것이다.

곧 부활한 미래의 삶에서 몸이 지닌 ‘혼인적’ 의미는, 남자와 여자로서의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에 따라 창조된 인격이라는데 있다. 그리고 인격 간의 친교 실현에 완전한 방식으로 부합하는데 있다. 그러기에 몸의 영광은 인격들 사이의 상호 소통의 수단이며, 친교 구축의 근원이 되는 진리와 사랑의 참된 표현이어야 한다.


부활 해석에 대한 바오로 사도의 인간 개념 : 제70-72과

살아계신 하느님의 가장 충만한 자기 계시의 마지막은 곧 그리스도의 부활이다. 부활은 원죄와 함께 인간의 역사 안으로 들어와 첫 계약이 파기된 그 순간부터 인간을 지배하기 시작한, 죽음의 역사와 함께하는 생명에 관한 하느님의 응답이다. “성령을 첫 선물로 받은 우리 자신도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를, 우리의 몸이 속량되기를 기다리며 속으로 탄식하고 있습니다”(로마 8,23)처럼 구원은 부활의 길이며 부활은 몸의 구원을 마지막으로 완성한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흙으로 된 사람의 모습을 지녔듯이, 하늘에 속한 그분의 모습도 지니게 될 것입니다”(1코린 15,49)라고 말한다. 부활에 대한 바오로 사도의 인간학은 우주적이며 보편적이다. 모든 인간은 자신 안에 아담의 모습을 지니고 있으며 또한 그리스도의 모습, 부활하신 그분의 모습을 지니도록 부름받았다. 이는 이미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이 세상에 계시되었고 이 세상의 현실이며 사람 안에서 최종 완성을 향해 성숙해가고 있는 현실이다.

‘영적인 몸’은 진리와 자유 안에서 인간의 영의 활동과 감각들 사이의 완벽한 조화를 뜻하는 것이다. 대조적으로 ‘물질적인 몸’은 인간이 선과 악을 아는 인식으로 살아가면서도 자주 악으로 부추겨지고 악에 떠밀리는, 인간을 허약하게 만드는 힘으로서의 관능을 가리킨다. 만약 인간이 성령의 영향 아래 머문다면 인간은 ‘영적’이며, 그리고 “성령의 열매”로 결실을 맺을 것이다(갈라 5,22). 이렇듯 바오로 사도의 모든 인간학은 부활의 신비로 가득 차 있다. [외침, 2017년 7월호(수원교구 복음화국 발행), 정리 도희주 기자]

 

 

[교회문헌 읽기] 성 요한 바오로 2세의 몸 신학: 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사랑 II

 

 

제4부 하늘나라를 위한 독신과 동정

종말론적인 표징인 동정과 독신 : 제73-76과


그리스도는 “하늘나라 때문에 스스로 고자가 된 이들도 있다.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받아들여라”(마태 19,12 참조)라고 말씀한다. 하늘나라를 위한 자발적인 금욕에 대한 내용이다. 인간이 ‘아내를 얻는 일도 남편을 얻는 일도 없는’ 종말론적 상태를 향한 카리스마적(carismatico; 초자연적인)인 경향이다.

이는 혼인을 풍요로움과 출산의 원천으로서 하나의 특전으로 보던 구약의 전통에 비해 완전히 새로운 관점이며 전환점이 되는 말씀이다. 적어도 이러한 선택은 지상의 삶에서는 선택적 포기와 일치하며 영성적 노력과도 일치됨을 계시한다. ‘하늘나라를 위한’ 지상의 금욕은 몸의 끝이 죽음이 아니라 영광스럽게 됨을 지향하고, 몸이 그 자체로 미래 부활을 예고하는 하나의 표징임도 드러낸다. 이 표징은 ‘몸의 속량’의 신비를 보여주고, 구원의 역사 안에서 ‘성령의 풍요로움’을 위해 필요하다.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마태 1,20)처럼 마리아는 성령의 풍요로움의 첫 증인이 된다.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던 이 금욕은 ‘하늘나라’를 위한 올바른 길들 중 하나이며, 이를 선택한 이들은 몸의 해방의 신비에 특별히 참여하는 것이다. 이러한 선택은 은총이다.


하느님 나라를 위한 금욕과 몸의 혼인적 의미 : 제77-81과

이러한 ‘하늘나라를 위한’ 자발적인 금욕은 특별한 부르심이자 선물이다. 인간은 이러한 고독안에서 다른 이들과의 상호주체적인 친교의 새롭고도 훨씬 완전한 형태의 차원으로 존재한다. 즉 어떤 의미에서 혼인 안에서보다 ‘더’ ‘다른 이들을 위한 진실한 선물’이 된다. 그러나 이러한 금욕의 삶이 완전함을 위한 우월적 토대는 아니다. 청빈, 정결, 순명이라는 복음적 권고에 기초한 삶 전체와 관련해서 완전한 신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교적 삶의 완전함은 금욕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전적인 선물로 내어주는 애덕의 척도로 측정된다. 이는 궁극적으로 ‘혼인적’ 사랑의 본성에서도 드러난다.

자발적인 금욕을 선택하는 이들에게 하늘나라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혼인적 관계 안에서 의미를 밝힐 수 있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신랑이 되고 영혼들의 신랑이 되어 십자가와 부활, 성체성사의 신비 안에서 끝까지 당신 자신을 바치셨다. 이러한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하는 이들은 구원자의 혼인적 사랑에 고유하고 특별한 응답으로서 자발적 금욕을 선택한다.

인간은 인격적인 주체라는 토대 안에서 자기 자신을 아낌없이 내어줌으로써 자신을 온전히 발견하며(「사목헌장」, 24항), 또한 자기 자신을 내어주는 것을 자유롭게 포기할 능력도 있다. 이는 ‘하늘나라를 위한’ 금욕을 선택함으로써 그리스도께 전적으로 자신을 내어드리기 위해서이다.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마르 12,25)라는 말씀처럼 ‘하늘나라를 위한’ 금욕은 자신의 남성성과 여성성을 통한 몸의 혼인적 의미와 결합한 인격적인 선물의 고귀함에 부합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동정과 혼인에 관한 바오로의 해석 : 제82-86과

바오로 사도의 가르침의 위대함은 그가 자신의 진정성과 정체성 전체를 걸고 그리스도가 선포한 진리를 소개하면서, 자신의 삶을 통해 그 사실들을 증언했다는 점이다. 자신의 삶으로 고유한 ‘인격적인’ 해석을 내놓은 것이다. 결혼과 동정에 관해서 ‘선’과 ‘악’사이의 식별을 다루는 것이 아니다. “그대가 혼인하더라도 죄를 짓는 것이 아닙니다”(1코린 7,27-28 참조)라는 말을 통해, 단지 ‘잘하는’ 혹은 ‘더 잘하는’ 사이의 식별을 다루고 있다.

“혼인하지 않은 남자는 어떻게 하면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있을까 하고 주님의 일을 걱정합니다”(1코린 7,32 참조)라고 말하며 하느님 나라를 위한 봉사의 모든 차원에서 온전하게 헌신할 수 있는 내적인 통합을 강조한다. 그러나 “이 사람은 이런 은사, 저 사람은 저런 은사, 저마다 하느님께 고유한 은사를 받습니다”(1코린 7,7)라고 언급하며 구체적이며 특정한 각 사람에게 주어진 삶의 성소에 적합한 은사가 있음도 설명한다.

바오로 사도의 이러한 선포에는 인간의 몸은 속량(로마 8,23 참조)이라는 ‘미래의 삶’으로 운명 지어져 있음이 드러난다. 또한, 동정과 혼인이라는 두 가지 성소 모두 선택에 대한 충실성의 생생한 증거를 매일 매일의 삶에서 드러내야 한다. 이는 “선으로 악을”(로마 12,21) 이기는 종말론적인 위대한 희망이다. [외침, 2017년 8월호(수원교구 복음화국 발행), 정리 도희주 기자]

 

 

[교회문헌 읽기] 성 요한 바오로 2세의 몸 신학: 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사랑 II

 

 

제5부 그리스도교적 혼인

에페소 서간에 따른 성사로서의 혼인 : 제87-88과


“여러분도 저마다 자기 아내를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고, 아내도 남편을 존경해야 합니다”(에페 5,33). 이 말씀은 하느님이 인간을 당신 모습대로 창조하시되 그를 “남자와 여자”(창세 1,27)로 창조하셨음을 떠올리게 한다. 또한 창세기 2장 24절의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된다”라고 선언한 ‘한처음으로’ 우리를 되돌아가게 한다. 이 본문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에 대한 묘사와 하느님과 그분의 선택된 백성 사이의 혼인적 사랑의 유비를 다시 드러낸다.

몸은 ‘보이지 않는 어떤 실체에 대한 보이는 표징’, 곧 영적이며 초월적이고 신적인 것의 보이는 표징이므로 성사의 정의 안에 들어간다. 성사는 은총을 가리키고 생성시키고 인간 안에 구원의 업적이 실현되도록 도와준다. 그 하나가 바로 그리스도의 신비로 인간의 구원을 위한 신적 계획의 표현이며 교회 안에서 실현된다. 또 하나는 그리스도인의 소명으로 세례 받은 사람 각자와 각각의 공동체들이 그리스도의 신비, 인간의 구원을 위한 신적 계획에 부합하는 생활로 삶의 본보기가 되는 것이다.


부부 사이의 관계 근원이며 모델인 그리스도 : 제89-91과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마음으로 서로 순종하십시오”(에페 5,21). 남편과 아내의 상호적 관계는 그들이 그리스도와 가지는 공통의 관계에서 생겨나야 하는데 이는 그리스도를 경외함이다. 그리스도의 신비에 대한 깊은 자각으로부터 생겨나는 ‘공경’(pietas)은 부부 상호 관계의 바탕을 구성한다. 또한, ‘그리스도를 경외함’(곧 공경)은 그리스도의 신비에 순종하도록 그들을 이끈다.

에페소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은 그리스도와 교회 사이의 신비를 명확하게 해 줌과 동시에 혼인에 관한 본질적인 진리를 드러낸다. 혼인은 본질에서 인간과 인류를 향한 하느님의 영원한 사랑의 신비로부터, 교회를 위해 당신 자신을 아낌없이 내어주는 그분 선물의 열매를 의미한다. 구원하는 사랑은 혼인적 사랑으로 변모된다. 이러한 방법으로 몸의 속량의 신비는 어떤 의미에서 그 자체 안에 ‘어린양의 혼인잔치“(묵시 19,7)의 신비를 감추고 있다.

“둘이 한 몸이 되게”(에페 5,31; 창세 2,24 참조)하는 결합은 혼인 자체에 관련되며 남편과 아내 두 주체의 개별성을 흐리지 않는다. 특히 아내와 맺는 남편의 관계 모상은, 교회와 맺는 그리스도의 관계를 묘사하는 다음 본문에서 볼 수 있다. “남편 여러분,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교회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신 것처럼, 아내를 사랑하십시오.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하신 것은 교회를 말씀과 더불어 물로 씻어 깨끗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에페 5,26). 이 묘사를 통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부부결합의 두 번째 주체로서 드러난다. 이 주체에게 으뜸 주체인 그리스도는 ‘교회를 위해 당신 자신을’ 내어줄 만큼 교회를 사랑하신 그 사랑을 보여준다. 그 사랑은 무엇보다 그들 모두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마음으로” 서로 순종할 때 혼인 안에서 남편이 아내에게 보여주어야 하는 사랑의 모상이자 모델이다.


그리스도인들의 소명이 지닌 윤리적 모습들 : 제92-94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신 것은 교회를 티나 주름 같은 것이 없이 아름다운 모습으로 당신 앞에 서게 하시며, 거룩하고 흠 없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에페 5,25-27 참조). ‘티’는 추함을 ‘주름’은 늙음과 노쇠함을 상징한다. 은유적 의미에서 도덕적 결함들, 죄를 가리키며 그리스도는 당신의 혼인적이고 구원적 사랑으로 교회를 죄가 없고 ‘영원한 청춘’으로 머물게 한다.

신랑도 신부를 그녀 안에 있는 선하고 아름다운 모든 것을 발견하려는 초조한 사랑으로 창조 안에서 주의 깊게 살펴본다. 사랑은 신랑-남편이 신부-아내의 선익을 위해 기민하게 움직이고 신부-아내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신부-아내를 보살피는데, 온 힘을 기울이게 한다. 사랑은 조건 없는 방식으로 자기 자신을 선사한다. 또한, 그리스도는 당신의 혼인적 사랑 안에서 성찬례로 교회를 양육한다. 이는 부부가 ‘한 몸’이 되게 하는 그 사랑의 특성을 가리킨다. 혼인에 있어 인간 몸이 지닌 ‘신성함’(sacrum)의 심오한 의미를 말하며 이 의미는 인격들의 상호적 관계들을 결정짓는다.

우리는 여기서 에페소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의 그 ‘고전적인’ 단락(에페 5,22-33 참조)이 추상적이고 독립된 것이 아닌지 질문한다.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된 백성 이스라엘을 향한 야훼 하느님의 사랑을 제시하는 구약에서 진술된 것의 연속은 아닌지 알아보고자 한다. 이는 먼저 예언서 본문들에 해당하는 내용이며 다음에는 이사야 본문(이사 54,4-7.10)부터 살펴볼 것이다. [외침, 2017년 9월호(수원교구 복음화국 발행), 정리 도희주 기자]

 

 

[교회문헌 읽기] 성 요한 바오로 2세의 몸 신학: 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사랑 II

 

 

혼인적 사랑의 유비는 은총의 근본적 특성 : 제95-97과

에페소 신자들에게 보낸 바오로의 서간은 부부의 혼인적 관계와 그리스도와 교회 사이의 관계를 구약 예언자들의 전통과 관련시키고 있다. 특히 이사야 예언자는 “너를 만드신 분이 너의 남편 그 이름 만군의 주님이시다.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이 너의 구원자 그분께서는 온 땅의 하느님이라 불리신다”(이사 54,10)라고 선포했다. 바오로 사도는 새 계약의 하느님 백성인 교회와 그리스도의 관계에서 구원적 사랑이 어떻게 혼인적 사랑으로서 계시되었는지를 말해준다.

혼인적 사랑의 유비는 오래전부터 하느님 안에 감추어져 있으며 그 신비는 하느님 편에서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에게 하신 완전하고 되돌릴 수 없는 자기증여의 사랑이다. 인격적임과 동시에 공동체적인 차원에서 인간에 대한 것이다. 이러한 사랑의 유비는 은총, 창조된 은총의 모든 질서의 ‘근원적’ 특성을 보여준다.

몸은 하느님 안에 영원으로부터 감춰진 신비를 세상의 가시적 실재들 속으로 건네주기 위해 창조되었으며, 그 신비의 표징이 된다. 이 표징은 효력을 가진다. 또한, ‘몸의 혼인적 의미체험에 결부된 원순수’로 남자와 여자가 그 몸을 통해 거룩함의 주체임을 깨닫게 해준다. 창조주 편에서 인간에게 원초적으로 부여하신 그 거룩함은 ‘창조의 성사성’에 속한다. 혼인은 이러한 성사의 중심점이라고 할 수 있다.


새로운 성사적 경륜이자 완성인 혼인 : 제98-100과

그리스도와 교회의 큰 신비는 곧 “교회를 위해 당신 자신을 바치신”(에페 5,25) 그리스도에 의해 실현된 신비다. 이 신비는 그리스도께서 남편과 아내가 혼인 안에서 결합하듯이, “교회를 사랑하셨기”(에페 5,25) 때문에 풀릴 수 없는 사랑으로 교회와 결합하심으로써 계속해서 교회 안에서 현실화된다. 이런 식으로 교회는 구속의 성사를 살아간다.

구속의 성사 토대 위에 세워진 새로운 성사적 경륜은 교회에 대해 그리스도로부터 주어진 혼인적 호혜에서 비롯된다. 사실 새로운 성사적 경륜은 원의로움과 원순수의 인간이 아니라 원죄의 유산으로부터, 그리고 죄성의 상태로 인해 무거운 짐을 지게 된 인간을 향하고 있다. 그리스도인 부부들은 이러한 인간이지만 그리스도와 교회라는 ‘큰 신비’의 성사적 토대 위에서 그들의 삶과 소명을 만들어가도록 부름을 받은 것이다.

각각의 여러 길 안에서 ‘몸의 속량’은 “성령을 첫 선물”(로마 8,23)로 받은 사람들의 위대한 기다림일 뿐만 아니라 영원한 희망의 근원이다. 속량은 사실상 거의 ‘새로운 창조’를 의미하며, 창조된 모든 것의 고양을 의미한다. 속량은 창조 안에서 하느님으로부터 지정된 의로움의 충만함, 공정함, 거룩함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또한, 무엇보다 ‘하느님의 모습’을 닮은 남자와 여자로 창조된 인간의 충만함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구원적 의미를 명확히 하는 혼인성사 : 제101-103과

사실, 남자와 여자의 근원적인 ‘몸을 통한 일치’는 ‘한처음에’ 소유하고 있던 구원의 표지로서의 투명함과 성사로서의 투명함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땅 위에서 인간의 역사를 만들어 나가기를 그치지 않았다. 혼인은 - 그리스도의 말씀에 따르면(마태 19,4 참조) - ‘한처음’부터 성사이며, 인간의 ‘역사적’ 죄성에 바탕을 둔 ‘몸의 속량’의 신비로부터 솟아난 성사이다.

혼인은 아버지로부터 기인하며 세상 안에서 혼인의 근원은 그분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만약 이 ‘세상이 지나가는 것’이라면, 그리고 ‘세상으로부터 오는’ 육의 욕망, 눈의 욕망, 살림살이에 대한 자만 또한 지나가는 것이라면, 성사로서 혼인은 남자와 여자인 인간이 욕망을 다스리며 아버지의 뜻을 행하도록 한다.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1요한 2,17).

성사로서 혼인의 그 원초적이고 확고한 모습은 - ‘몸의 속량’의 진정한 심오함에 대해 자각하는 - 그리스도인 배우자들이,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마음으로”(에페 5,21) 서로 결합할 때 새롭게 된다. 혼인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최종적인 완성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와 교회의 혼인적 사랑에 따라 그 틀을 갖추어간다. [외침, 2017년 10월호(수원교구 복음화국 발행), 정리 도희주 기자]

 

 

[교회문헌 읽기] 성 요한 바오로 2세의 몸 신학: 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사랑 II

 

 

인간 몸이 지닌 혼인적 의미는 혼인 계약에 부합한다 : 제104-106과

 

“나는 당신을 내 아내로 맞이합니다.” “나는 당신을 내 남편으로 맞이합니다.” 이 말들은 혼인 전례의 핵심이다. 그 자체로 영속적이고 유일하고 반복 불가능한 ‘몸의 언어’를 담고 있다. 인격들의 친교 기초가 되는 이 말들은 “즐거울 때나 괴로울 때나, 성하거나 병들거나, 일생 당신을 사랑하고 존경하며 신의를 지킬 것을 약속합니다”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남자와 여자는 한 몸이 되어 전 생애 차원에서 서로를 위한 상호적 선물이 된다.

 

인격들의 친교를 향한 영원한 소명을 지닌 사람은 몸 없이는 자기의 인격적 실존과 소명의 이 독특한 언어를 표현할 수 없다. 영의 가장 심오한 말들이 - 사랑의 말, 선물의 말, 충실성의 말 - 알맞은 ‘몸의 언어’를 요구하는 것처럼 사람은 ‘한 처음’부터 그렇게 지음 받았다. 몸의 언어 없이는 그 말들은 온전하게 표현될 수 없다. 몸의 언어의 힘으로 ‘한 몸’이 되는 혼인의 성사적 표지가 이루어진다.

 

인간의 몸은 어떤 ‘언어’를 말하며 신랑 신부는 이 ‘몸의 언어’가 혼인의 집전자들인 그들의 입에서 선언되기 이전에 창세기부터 시작하여 구약의 예언자들을 거쳐 에페소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의 원저자에 이르기까지, 살아계신 하느님의 말씀으로부터 선언되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욕망은 ‘몸의 언어’를 재해석하는 능력을 파괴하지 못한다 : 제107-109과

 

부부는 몸의 언어에 기초하여 ‘인격들의 친교’로서의 공동생활과 삶을 형성해 가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부부는 그들의 품행과 태도, 행위와 몸짓을 통해 ‘몸의 언어’가 지닌 의미들의 원저자가 되도록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부부는 이 언어로 인해 배우자 간의 사랑, 충실성, 정직함, 그리고 죽을 때까지 불가해소적인 결합을 확립함은 물론 계속해서 그것을 심화시켜 나갈 수 있게 된다.

 

그리스도가 산상설교에서 선언하신 말씀들에 비추어서 복음 전체와 새로운 계약의 빛에 비쳐 보자. 그러면 육의 욕망은 ‘몸의 언어’를 재해석할 수 있는 능력과 그 언어를 성숙한 방법으로 재해석하는 것을 파괴하지 못함을 알게 된다. 욕망의 인간이기에 그리스도의 구속 실재로부터 ‘부르심’을 받았고 그러기에 더더욱 진리 안에서 그 언어를 형성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은 욕망의 인간이지만 동시에 몸의 언어 안에서 거짓으로부터 진리를 분별할 수 있다.

 

남자와 여자를 결합시키는 혼인적 사랑의 주제는 성경의 ‘위대한 유비’의 전통과 연결할 수 있으며 아가서가 그 풍요로움을 증명한다. 신랑과 신부의 눈부신 빛살로 상호 간의 그 매혹을 ‘몸의 언어’를 통해 표현한다. 두 사람에 의해 발설된 사랑의 말들은 ‘몸’에 집중되는데 몸은 마음의 내적 충동 안에서 사랑을 싹트게 만드는 다른 사람을 향한 이끌림, 또 다른 ‘나’를 향한 이끌림이 직접적 또한, 간접적으로 머무르는 곳이기 때문이다.

 

 

혼인적 사랑의 ‘위대한 신비’를 보여주다 : 제110-113과

 

진리 안에서 재해석된 ‘몸의 언어’는 인격의 내적인 불가침성의 발견과 같다. 동시에 이 발견은 서로가 서로에게 속한다는 것에 대해, 서로가 서로에게 운명 지어져 있음을 잘 알고 있는 신랑 신부의 상호 소속됨의 참된 심오함을 표현한다. “나의 연인은 나의 것, 나는 그이의 것”(아가 2,16; 6,3 참조). 이는 서로를 향한 선물이 된 신랑 신부의 깊은 인식의 응답이며 진정한 사랑의 표현이다.

 

이러한 사랑은 우리 앞에서 인간적 ‘에로스’가 자기의 지평을 닫고, 또 다른 차원의 친교로 초대한다는 것이며 이 사랑을 ‘아가페’라는 이름으로 부를 수 있다. 아가페는 에로스를 정화하면서 그 정점, 완성을 향해 나아간다. ‘몸의 언어’ 위에 구축된 두 사람의 일치를 통해 한 처음의 신비 안에 들어있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한다.

 

부부는 삶을 통해 혼인의 성사적 표지를 보여준다. 부부는 성령에 따른 삶을 살아감으로써 자신들이 지닌 남성성과 여성성의 상호적 매력이 영적으로 성숙하게 됨을 느낀다. 남자와 여자는 사랑의 실행, 충실성의 실행, 부부간의 정직함 실행, 곧 “몸의 속량”(로마 8,23 참조) 안에 뿌리내린 에토스로 표현된 그 신비의 빛, 진리의 빛, 아름다움의 빛을 전달하기 위해 ‘위대한 신비’를 만나러 간다. 이 길에서 ‘몸의 언어’는 성사의 언어, 신비의 언어가 되며 부부의 삶은 찬양의 전례가 된다. [외침, 2017년 11월호(수원교구 복음화국 발행), 정리 도희주 기자]

 

 

[교회문헌 읽기] 성 요한 바오로 2세의 몸 신학: 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사랑 II

 

 

제6부 사랑과 출산능력


부부행위의 목적과 출산의 연관성 : 제114-117과

 

이제 몸의 신학의 마지막 장을 시작하며 지금까지 우리가 해왔던 묵상을 부부와 가정윤리의 영역에서 구체적으로 적용하려 애써야 할 것이다. 이는 “자신의 내밀한 구조(Intima struttura)로 인해 부부행위는 신랑 신부를 깊이 결합시키면서, 그들은 남자와 여자로서의 존재 자체 안에 새겨진 자연법에 따라 새로운 생명을 낳을 수 있도록 만들어 준다”(「인간 생명」, 12항)라고 설명되어 진다. 자연법은 세상을 창조하시고 질서를 주신 하느님의 의도에 인간 이성이 참여하는 것이다.

 

자연법의 규범은 인간 행동의 특정한 영역에 나타나는 가치들의 총체인 에토스(Ethos)에 근거를 둔다. 이러한 관점에서 “교회는 생명 전달에 관한 하느님 법과 진정한 부부 사랑을 보장하는 하느님 법 사이에 실제로 모순이 있을 수 없음을 거듭 일깨운다”(「사목 헌장」, 51항). 책임 있는 부성이라는 개념도 설명한다. 항상 하느님께서 제정하신 객관적 윤리 질서가 가장 중심에 있다. 바른 양심은 이 질서의 충실한 해석자가 되어 ‘자녀를 두지 않기’로 결정하는 것과, 신중함의 기준에 따라 더 많은 자녀를 두기로 결정하는 것 모두를 포함한다.

 

 

부부의 깨끗함(purezza)의 열매인 출산 조절 : 제118-121과

 

교회가 가르쳐 온 부부 윤리의 원칙은 하느님 법에 대한 충실성이 그 기준이다. ‘이미 시작된 출산과정의 직접적인 개입(낙태)’과 피임의 모든 수단들을 비윤리적인 것으로 규정한다. 다만 불임주기를 이용하는 자연조절법이 윤리적으로 타당하다고 말한다. “사람은 자연의 힘을 지배하고 합리적으로 조정하는 데에 놀라운 발전을 이룩했다. 이 지배권을 자신의 총제적인 존재 자체에까지 곧 자신의 몸과 심리와 사회생활, 심지어 생명 전달을 규제하는 법칙에까지 확대하고자 한다”(「인간 생명」, 2항).

 

‘인공적인 수단’의 사용은 인격의 구조적인 차원을 파괴하고 고유한 주체성을 결여시키며 스스로를 조작의 대상이 되게 한다. 인위적인 개입을 통한 부부행위는 육체의 결합은 이루어지겠지만 ‘인격들의 친교(communio personarum)’의 존엄성에 부합하지는 않는다. 주기적인 절제를 통해 생식 능력을 윤리적으로 올바르게 조절하는 경우는 부부의 정결을 실천하는 것이며 ‘자연질서’의 표현, 곧 창조주의 섭리에 따른 계획의 표현이다. 그 충실한 실행은 인격을 위한 참된 선을 이룬다.

 

 

가정의 영성 전체를 구성하는 책임 있는 부성-모성 : 제122-125과

 

책임 있는 부성-모성은 부부의 소명과 부부 생활의 그리스도교적 영성 그리고 부모와 가정 영성의 커다란 줄기들을 만든다. 그 원천은 성서이며 가정의 영성을 새롭게 묵상하고 적절하게 통합하도록 기회를 제공한다. 이러한 영성의 본질적이고 근본적인 힘은 성령으로부터 우리 마음에 심어진 사랑이다. 부부가 항상 성체성사의 살아있는 샘에서 은총과 사랑을 얻고, 화해성사 안에서 겸손되이 자신들의 부족함을 봉헌해야 한다. 보다 일반적인 덕이며 극기의 한 부분인 ‘절제’는 성적인 충동과 그 결과들을 다스리고 조절하며 인도하는 능력 안에 있다. 부부생활의 참된 질서는 부부의 내면적이고 수덕적인 노력에 맡겨졌다.

 

 

부부 영성의 원천인 하느님의 업적에 대한 존중 : 제126-129과

 

위대한 고전 사상가들과 토마스 아퀴나스는 절제의 덕을 육체적이고 관능적인 반응들을 억제하는 능력만이 아니라, 인간의 성적이고 감정적인 영역 전체를 조절하고 안내하는 능력으로 이해했다. 이렇게 이해된 절제의 덕은 부부 행위의 두 가지 의미인 일치의 의미와 출산의 의미(「인간 생명」, 12항 참조) 사이에서 진정으로 책임 있는 부성과 모성의 전망을 가진다. 이를 통해 내적인 균형을 지켜주는 본질적인 역할을 한다.

 

성령의 은사들, 특히 거룩한 것에 대한 존중의 선물이 여기서 근본적인 의미를 가지게 된다. 오직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사는 모든 실천은 내적으로 참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교적 부부영성과 가정 영성의 일부를 구성한다. 특히 ‘효경의 선물’, 곧 하느님 업적에 대한 존중의 은사도 자리한다. 이제 「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사랑Ⅱ」을 마무리하며 몸이 가진 인격주의적 행위인 내어줌과 받아들임의 의미를 살펴볼 수 있었다. 이를 통해 우리는 ‘타인’의 사심 없는 선물에 대해서도 존중하며 받아들일 수 있다. [외침, 2017년 12월호(수원교구 복음화국 발행), 정리 도희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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