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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교회ㅣ기타

추기경 정진석 회고록24: 구름 같은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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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11-12 ㅣ No.411

[추기경 정진석] (24) 구름 같은 시간


아버지 같은 은사 신부의 갑작스러운 선종에 가슴이 먹먹

 

 

- 김영식 신부.

 

 

영문도 모른 채 사랑의 ‘파리약 세례(?)’를 받은 정진석 신부는 주임 신부의 따뜻한 마음을 알아채고 남몰래 눈물을 훔쳤다. 주임 신부는 그런 새 신부의 어깨를 묵직한 손으로 툭툭 치고 말없이 사제관으로 들어갔다. ‘하느님 아버지의 손길이 바로 이런 것 아닐까….’ 한없이 품어주시는 감사한 마음과 걱정을 끼쳐 드린 것 같은 죄송한 마음이 한데 섞여 그의 마음 깊숙한 곳까지 물들여졌다. 

 

중림동약현본당 보좌 신부로서의 생활은 행복했다. 하루하루 체험하는 소소하고 행복한 일상은 그의 사제 생활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이제는 주임 신부에게 세세하게 허락을 얻어 병자 영성체도 가고, 신자들의 세례성사와 견진성사를 챙기기도 했다. 분주하지만 기쁨 가득한 하루하루를 신자들과 함께 보내고 있었다. 신자들의 삶을 살피고 그들과 함께 지내는 나날은 정진석 신부가 이전에는 느낄 수 없을 만큼 가슴 뿌듯하게 즐겁고 감사한 나날이었다.

 

 

갑작스런 인사발령

 

새 신부로서 약현의 신자들과 함께한 지 두 달째가 되던 날, 갑자기 교구청에서 소신학교로 가라는 인사발령이 났다. 당시 소신학교 부교장 김정진 신부가 갑자기 병으로 쓰러졌던 것이다. 김 신부는 고1 라틴어를 담당하면서, 고1 담임도 맡고 있었다. 학생들의 수업을 하루라도 비울 수 없으니 바로 그 빈자리를 메울 사람이 필요했고, 정진석 신부가 적임자였다.

 

- 1962년 한국 천주교회 교계제도 설정 당시 명동성당 입구에 설치된 경축문.

 

 

“수품을 받은 지 두 달째인데 미안합니다. 급한 상황이니 바로 신학교로 와주십시오.”

 

교구청에서 걸려온 전화에 정진석 신부는 앞으로 지낼 일이 아득하기만 했다. 본당은 본당대로 비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새로운 발령 직후부터 휴일이 단 하루도 없게 됐다. 토요일이면 본당에 와서 주일까지 미사 주례와 본당 사목을 하고, 월요일 아침에 다시 소신학교로 돌아가서 강의했다. 임태경 신부가 보좌 후임으로 부임한 1961년 9월까지 그는 그렇게 본당 보좌와 소신학교 선생을 오가며 소임을 다했다. 이후에야 비로소 소신학교에 상주하게 됐다.

 

그동안 한국 교회는 빠르게 성장했다. 한국 교회의 역사는 세계 교회 역사와 비교해볼 때 매우 놀랍다. 교황청에 편지를 써 사제를 보내달라고 직접 청할 정도로 조선 땅의 평신도들이 열성적이고 굳센 믿음을 가졌기 때문일 것이다. 이들의 염원은 1831년 9월 9일 교황 그레고리오 16세(재위 1831~1846)가 북경교구로부터 조선 지역을 독립시키고 조선대목구를 설정하는 결실로 이어졌다.

 

1880년대 조선 땅에 조금씩 종교의 자유가 주어지면서 조선의 가톨릭 교회는 급속도로 발전했고, 1911년에는 둘로 분할됐다. 조선대목구는 서울대목구로 명칭을 바꿔 북부 지역을 맡았고, 경상도, 전라도 등 남부 지역은 독립된 선교지로 분할돼 이를 관할하는 대구대목구가 설정됐다. 대목구(代牧區)는 정식 교계제도가 설정되지 않은 지역의 교구로, 교황청이 직접 관할한다.

 

한편 1961년 6월 6일 인천 지역이 서울교구로부터 완전히 독립되어 대목구가 됐다. 미국 메리놀외방선교회에서 이 지역 사목을 맡았고, 1962년 정식 교구로 승격됐다. 서울교구가 관할하던 인천 지역의 독립으로 정진석 신부의 아버지 신부인 김영식 신부(베드로, 1909∼1963)가 설립하고 운영하던 고아원과 성모자애병원이 인천교구 지역에 속하게 됐다. 정진석 신부도 일손을 거들며 직접 건물 설계까지 했던 기관들이었다. 김 신부는 갑작스러운 소식을 접하고 두 기관이 안정적으로 운영될 수 있도록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에 운영권을 넘겨주었다.

 

- 중림동약현본당 보좌 시절 신자들과 함께한 정진석 신부(맨 왼쪽).

 

 

1953년 10월 30일 설립된 한국인 남자수도회인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는 당시 서울 제기동본당 주임 신부였던 방유룡 신부가 창설했다. 방 신부는 1946년 개성에서 한국순교복자수녀회를 창설한 이후 곧 남자 수도회를 창설하려 했으나 6ㆍ25 전쟁으로 늦어지다가 서울 제기동성당 부속 건물에서 공동체 생활을 하는 5명의 창설 회원과 함께 남자 수도회를 시작했다. 방 신부는 김영식 신부의 선배인데, 두 사제는 각각 이웃이라 할 수 있는 연백본당과 개성 지역에서 사목했다. 6ㆍ25 전쟁 전에는 연백군과 개성이 38선 이남이어서 남한에 속했는데, 전쟁이 터지자 두 사제가 함께 피란을 내려온 것이다.

 

연백본당 주임이었던 김영식 신부는 고아들을 데리고 부산까지 갔다가 휴전선과 가까운 부평에 고아원을 세웠다. 연백과 조금이라도 가까운 부평에 고아원 둥지를 텄고, 머지않아 통일이 되리라 기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분단으로 김 신부는 자신이 주임을 맡고 있던 본당에 다시는 돌아갈 수 없게 됐다.

 

김영식 신부는 일생의 사업으로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던 고아원과 성모자애병원을 갑자기 수도회에 인도하려니 일이 많았다. 무엇보다 직원이 큰 문제였다. 성모자애병원은 전쟁 직후부터 10년 가까이 부평에서 유일한 종합병원이었다. 전쟁 때 먹고 살 길이 막막한 사람들을 고용해 고아원과 병원에서 함께 일해왔다. 고아원도 오래 운영됐고, 병원도 계속 성장 중이어서 그야말로 딸린 식구가 많았다. 갑자기 떠날 상황이 되어 막막했던 김 신부는 조카 김영일 신부에게 인수인계 업무를 맡겼다. 김영일 신부는 회계와 행정 능력을 발휘해 당장 먹고사는 문제가 닥친 사람들을 모두 잘 챙겼고 무난하게 처리했다. 

 

당시 김영식 신부는 인천교구가 분리될 줄은 몰랐던 것 같다. 보통 교구 설정은 갑자기 시행된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해당 신부들에게 충격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김영식 신부도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던 것 같다. 이후 김영식 신부는 후암동본당으로 가서 사목활동을 이어갔다.

 

 

동고동락했던 시간들이 흘러가고 

 

그런데 1963년 1월 7일 김 신부의 부고가 날아들었다. 정진석 신부는 자신을 사제의 길로 이끌어준 영적 아버지인 김 신부와의 이별이 몹시 슬펐다. 하늘을 바라보니 차갑지만 맑은 하늘에 구름이 흘러가고 있었다. 마치 김 신부가 마지막 인사를 고하는 것 같았다. 김 신부와 우연히 처음 만났던 시간부터 함께 미군 부대에 구걸하러 다닌 일, 고아들과 함께 지냈던 일 등 동고동락했던 시간들이 구름과 함께 흘러갔다. 당시 김 신부는 건강이 나빴지만 50대 중반의 나이였다. 그렇게 빨리 세상을 떠날 줄 누가 알았을까. 진석은 마음속으로 하느님께서 김영식 신부의 영혼을 받아주시기를 기도했다.

 

[평화신문, 2016년 11월 13일,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홍보국장), 사진=서울대교구 홍보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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