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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100년의 시간 속을 걷는다: 김수환 추기경과 옹기장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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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11-11 ㅣ No.786

[100년의 시간 속을 걷는다] 순교자의 후손, 북한 선교에 앞장서다 - 김수환 추기경과 옹기장학회

 

 

우리교회는 선교사가 들어오기도 전에 순교자를 낸 교회이다. 윤지충과 권상연 등은 사제도 없는 나라에서 순교했다. 그리고 순교자의 가족이나 후손들은 대를 이어 교회 일을 맡아 해 왔다. 순교자의 후손 중에는 순교자 시복식 미사를 직접 집전한 사람도 있다. 김수환 추기경은 1968년 병인순교자 시복식을 주례했다. 그의 할아버지 김보현은 병인박해 때 순교했다. 김보현의 행적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김수환 추기경은 자라면서 자신이 순교자의 후손임을 늘 인식했고, 평생을 선조의 뜻을 이어가고자 노력했다.

 

 

천주교 신자들의 옹기마을

 

요즈음은 옹기에서 지역적 다양성이 사라졌다. 가마의 위치, 도토(陶土) 채취, 제작과정, 시장권 등의 특색이 행정·지리적 경계를 벗어나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통시대 제작된 옹기에는 많은 문화가 담겨있다. 당시 옹기는 천주학장이들이 주로 구웠다. 그럼에도 그들은 옹기에 자신의 신앙과 삶을 담아냈다. 경상도 교우촌 중에는 옹기마을이 여러 곳 있었다. 새로 이주한 신자들은 농토를 마련할 수 없었기 때문에 흙이 적당하면 옹기마을을 이루었다. 옹기는 자본 없이 만들 수 있었고 팔러 다니면서 신자들끼리 정보를 교환할 수 있었다. 또 쉽게 주거지를 옮길 수도 있었다. 박해로 인해 늘 도망 다녀야 했던 신자들에게는 적합한 직업이었다. 그러나 옹기장이들은 일반 농민들로부터도 ‘점인(店人)’으로 불리며 차대를 받았던 사람들이었다. 그때의 신자들은 자신의 신앙을 위해서 스스로가 천한 직업을 선택했던 용기 있는 사람들이었다.

 

김수환 추기경 가족도 옹기마을 출신이었다. 그들은 병인박해를 피해 선산을 거쳐 김천, 군위 지역에 걸쳐 넓게 형성되어 있던 옹기마을로 옮겨왔다. 칠곡군 왜관읍 봉계리 장자골은 병인박해 전후에 이루어진 교우촌 옹기마을이다. 1893년 11월 20일 뮈텔 주교가 이곳에서 성사를 주었다. 주교는 장자골은 29채의 교우집 중에 25가정이 옹기를 굽고 4가정은 앞산에서 농사를 짓는데, 이 농사짓는 사람들은 교우들이 개종시킨 신자들이라고 전했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 때 김 추기경 부친 김영석은 장자골로 피난 와서 도공이 되었다. 1900년 경 그는 다시 왜관 순심학교 부근에서 옹기를 구웠다. 이후 이 가정은 김천 지대골로 이사했다. 지대골은 김천 직지사 밑에 있는 옹기촌으로 박해시대 형성된 교우촌이었다. 이곳은 경상도와 충청도의 접경지대여서 경상도계를 벗어나 황간 등지로 피난을 다닐 수 있었다. 김동한 신부가 지대골에서 태어났다. 그 후 김영석 가정은 대구를 거처 군위 용대골로 옮겨갔다. 용대공소는 1917년 경 이 요셉, 양 마리아 부부가 설립했다. 1926년 김수환은 4살 무렵 이곳으로 이사 와서 소신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군위보통학교를 다녔다. 마을에서는 옹기굴 앞에 있는 김영석의 집에 함께 모여 공소예절을 드렸다. 1956년 군위공소가 본당으로 승격될 때 이 공소는 폐쇄되었지만 2006년 교구에서는 용대공소를 김수환 추기경 생가 터로 복원했다. 김수환은 1922년 드망즈 주교에게 세례를 받고 석 달 후 견진성사를 했다. 그는 군위에서 5학년이 끝나갈 무렵 대구에 일 보러 간 모친을 찾아 왔다가 그대로 정착했다. 1934년 김수환은 유스티노신학교 예비과에 입학했다. 그리고 32년 후 그가 사제 서품을 받은 지 15년 만에 주교가 되었다. 2년 뒤인 1968년 서울대교구장으로 임명됨과 동시에 대주교로 승임되었다. 이듬해 산 펠리체 명의추기경으로 추기경에 서임되었다. 마산교구장, 서울교구장, 추기경 외에 김수환에게 또 하나 얹어진 짐이 있었다. 그는 평양교구장 서리였다.

 

 

완성하지 못한 평양주교좌성당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전쟁으로 인해 북한지역 교회의 활동은 정지되었다. 북한지역에서 활동하던 성직자들은 전쟁 발발 직전인 1950년 6월 24일 전후 거의 모두 체포당했고, 전쟁과정에서 살해되거나 행방불명되었다. 대부분의 성당들과 교회기관들은 폐쇄되었다. 북한 신자들은 성직자를 지켜내려 끝없이 노력했다. 평양본당만 보아도 그 절절한 사연을 읽을 수 있다. 관서지역은 교회초기 교리서를 구하고 배우러 다니는 신자들이 지나다닌 길이지만 복음화는 늦었다. 병인박해 직전 무렵에서야 베르뇌 주교가 새로 공소방문을 다닐 만큼 신자들이 생겼다. 박해 후 1895년 르 장드르 신부는 평양 외성의 산명모루에 평양성당을 세웠다. 이것이 북한에서의 첫 번째 성당이었다. 르 장드르 신부는 삼년 뒤 성당을 평양 시내의 장대재로 옮겼다. 장대재는 군사들의 무술 연마장으로 평양성내가 한눈에 들어오는 언덕이었다. 이 때문에 성당이 일제시대말 군에 징발되는 빌미가 되었다.

 

2대주임 르 메르 신부가 벽돌로 고딕식 성당을 지었다. 평양에서 최초의 웅장한 서양식 건물이었다. 그러나 평양교구가 설정된 뒤 교구를 맡은 메리놀회는 주교좌성당으로 서포성당을 새로 지었다. 그래도 서포로부터 11km 거리인 평양성당은 여전히 교구행사와 활동의 중심지였다. 1941년 일본은 태평양전쟁을 일으키고 한국에 있던 미국 선교사와 수도자 전원을 연행 구금했다. 갑자기 한국인 신부만 남은 평양교구는 관할권이 서울교구장 노기남 주교에게 위촉되었다. 노 주교는 홍용호 신부에게 교구장 대리직을 위임했다. 홍 신부는 평양성당(이후 관후리성당) 주임을 겸했다. 신자들은 맨손으로 재출발하는 교구 발전에 혼신을 다했다. 1943년 교황청은 평양교구를 다시 독립교구로 승인하고 홍용호 신부를 교구장으로 임명했다. 이리하여 관후리성당은 평양교구 주교좌성당이 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1월 일본군부는 관후리성당과 그 부속건물, 대지 전부를 징발했다. 일본군은 미사장소로 이미 징발해 놓은 산정현 개신교 교회를 주었다. 다음 달 신자들은 관후리성당에서의 마지막 미사를 마치고 이삿짐을 날랐다. 성당은 산정현 장로교 예배당으로 가고 교구본부와 주교관, 수녀원, 양로원과 고아원은 각각 흩어졌다. 그리하여 홍용호 교구장의 주교성성식은 1944년 빌린 개신교 예배당에서 이루어졌다. 그리고 일본군은 관후리성당을 헐었다. 관후리성당은 이듬해 5월 산정현 임시성당 건물을 개신교 측에 반환하고 상수구리 옛 수녀원 자리 한옥으로 들어갔다.

 

3개월 후 광복을 맞았다. 평양교구는 해방이 되자 주교좌성당 터를 찾는 일이 급선무였다. 이 사업 추진 과정에서 주교 비서 강창의가 희생되었다. 결국 교회는 대지를 찾았으나 성당은 새로 지어야 했다. 관후리성당을 건축하는 대역사가 진행되었다. 공산당은 일요일에 사람들을 소집하고 행사를 열었다. 그래도 신자들은 교구 각지에서 와서 며칠씩이라도 노동봉사를 했다. 공사 진행 속도는 가톨릭의 저력을 드러냈다. 성당의 모습이 드러나자 교구 신자들은 더욱 용기백배했다. 1947년 12월 27일에는 관후리지하성당에서 홍용호 주교 집전으로 석원섭과 이경호의 사제서품식도 있었다. 그러나 1949년 5월, 홍용호 주교는 북한 공산정권에 의해 납치되었다. 이어 6월에 본당주임 김필현 신부가 체포되었다, 12월에 보좌 서운석 신부가 체포됨으로써 결국 관후리성당은 아직 완성도 되지 못한 채 침묵의 교회가 되었다. 서운석 신부가 체포되던 날 신자들은 성당으로 모였다. 그러나 공산당원들의 힘에 밀리자 오 수산나는 참다못해 성당 마루를 치면서 통곡했다. “성모님! 왜 보고만 계십니까? 지금 우릴 도와주시지 않고 언제 도와주시렵니까?”

 

성직자들이 체포되자 평양 각 본당 신자들은 원근을 가리지 않고 본당신부가 있는 교회로 가서 주일미사에 참여하고 성사를 보았다. 진남포성당에 신부가 아직 남아있었다. 1949년 12월 진남포성당 성탄절 대미사는 평양에서 온 신자들로 넘쳐났다. 교회에서는 이들 전부를 성당 구내에 수용할 수 없어 신자들 집에 몇 명씩 분산 숙박시켰다. 당시 북한에서는 타지방 사람이 투숙할 때는 반드시 내무서에 숙박계를 제출해야 했지만 한 사람도 불평 없이 형제적 우애로 환대했다. 신자들은 남은 신부를 보호하기 위해 조를 짜서 지켰다. 그러나 신자들의 철통같은 보호망도 어쩔 수 없었다. 1950년 6월 24일 자정 무렵 사제관 울타리에 군 트럭이 와서 멈추고 괴한 몇 명이 담을 넘어 들어가 잠옷 바람인 조문국 신부를 납치해 갔다. 신자들이 신부를 위해 준비해 두었던 솜바지 저고리를 붙들고 통곡할 때 한국전쟁이 시작되고 있었다.

 

 

북한 선교 사제양성을 목표한 옹기장학회

 

한국전쟁 이후 북한지역에는 약 4만 5천여 명의 신자가 있었다고 추정한다. 그들은 사제도 없이 평신도지도자에 의해 대세를 받고 병자성사 없이 선종할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견딜 수 없는 세월은 변화를 이끌어내었다. 북한당국에서 종교에 대한 정책을 변경했다. 1988년 평양에는 성당이 세워졌다. 한편 1987년 평양교구장 서리인 김 추기경은 교황청과 정부의 허락을 얻어 평양에서 열리는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행사에 신부 파견을 제안했다. 그러면서 그 자신의 평양방문을 비밀리에 추진하고 있었다. 이즈음 문규현 신부, 임수경, 문익환 목사, 황석영 작가 등이 정부의 허락 없이 북한을 방문했다. 그리고 그때까지 공식접촉과 진전이 이루어지던 김 추기경의 방북은 무산되었다. 북한교회 재건작업을 시작하고자 하는 열망이 수포로 돌아가고 있었다. 김 추기경의 안타까움을 옆에서 지켜본 이들은 북방선교 담당 사제양성을 위한 장학재단을 결성했다. 박신언 신부는 교구 사무처장, 명동성당 본당신부, 평화신문·평화방송 사장을 지냈고 평생 추기경을 옆에서 보필했었는데 그가 이 장학회의 운영위원장이 되었다. 장학회는 2002년 11월 22일 한승수, 이관진, 김정식, 최영광, 조병우 등 10여 명이 기금을 출연하여 공식출범했다. 김 추기경도 자신이 모은 돈을 쾌척했다.

 

‘옹기’는 그때까지 알려지지 않은 추기경의 호였다. 김수환 추기경이 팔순이 되자 주위에서 성함을 부르기가 거북하니 호를 지으시라고 권했다. 추기경은 동양철학을 전공한 최기복 신부에게 이를 의뢰했다. 그러나 그는 내심 옹기 팔러 나갔던 어머니를 기다리던 자신의 체험, 박해시대 천주교 신자들의 생활을 드러내는 옹기를 호로 갖고 싶어 했다. 최 신부는 옹기가 호 짓는 법에 어긋나지 않는가를 살폈다. 최기복 신부의 큰형이 인천에서 옹기를 만들어 팔고 있어 추기경과 더 가까워졌다고 했다. 옹기장학회는 김수환 추기경 선종 후에 서울대교구 공식 기념사업으로 지정되어 장학금 대상지역과 수혜대상자를 확대했다. 장학회는 2003년부터 2016년 8월까지 287명에게 장학금을 지급했다. 현재는 정진석 추기경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이에 동참하고 있다. 김수환 추기경의 바른 방향의 염원은 북방선교 사제양성을 하는 곳으로 또 한 번 사람들의 뜻을 모았다.

 

“만약에 저희들이 성사(聖事)의 은혜를 받는다면, 천주교는 오래지 않아 새로운 빛을 발할 수 있을 것이옵니다.” 이 글은 신유박해 이후 숨어살던 교우들이 박해가 지난 지 10여 년 후 북경주교에게 쓴 편지 구절이다. 현재 북한에 신자가 있다면 아마 똑같이 외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편지를 쓸 곳은 제일 먼저 그들의 교구장 서리들일 것이다. 현재 평양교구 교구장 서리는 염수정 추기경이 맡고 있다. 옹기장학회는 교우촌 옹기장이의 후예였던 김수환 추기경을 기리며 조직되었다. 북한의 교우들을 돕고자 하는 마음은 옹기장학회 회원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대구대교구 신자들도 박해를 무릅쓰고 선교하던 옹기장이의 정신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도움: 구재회 옹기장학회 사무국장)

 

[월간빛, 2016년 11월호, 김정숙 소화데레사(영남대학교 문과대학 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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