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6일 (화)
(백) 부활 제3주간 화요일 하늘에서 너희에게 참된 빵을 내려 주시는 분은 모세가 아니라 내 아버지시다.

레지오ㅣ성모신심

레지오의 영성: 임금의 혼인잔치(마태 2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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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10-08 ㅣ No.474

[레지오 영성] 임금의 혼인잔치(마태 22,1-14)

 

 

마태오복음에는 임금의 혼인잔치 비유가 소개됩니다. 임금이 혼인잔치를 열고 종들을 보내어 초대받은 사람들을 불러오게 하는데, 대부분 거부하고 심지어 종들을 때리고 죽이기까지 합니다. 화가 난 임금은 군대를 보내 복수를 하고, 종들에게 거리에서 만나는 사람을 모두 잔치에 데려오게 합니다.

 

임금이 혼인잔치를 열면서 아무나 초대할 리가 없습니다. 왕국의 고위 관리들과 유력자들로서 평상시에 임금과 아주 막역한 사이를 유지하고 있던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임금의 초대를 무시하며, 심지어 초대하러 온 종들을 때리고 죽이기까지 합니다. 상식적으로는 납득하기 어렵지만, 예수님께서 예언자들을 죽였던 조상들과 당신을 배척하는 유다인들을 염두에 두고 말씀하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임금과 지근거리에서 살면서 자주 대면하던 유력한 사람들은 자기들이 마치 임금과 동등한 위치에 있는 것으로 착각하면서 임금을 함부로 대하려다가 그렇게 비극적인 결말을 맺는 것입니다.

 

루카복음 13,22~30에서는 이와 비슷한 비유가 등장합니다.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주님과의 친분을 과시하면서 들여보내 줄 것을 호소합니다. “저희는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주님께서는 저희가 사는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나 집주인은 냉정합니다.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모두 내게서 물러가라, 불의를 일삼는 자들아!” 평상시에는 철저히 외면하던 사람들이 뒤늦게 아는 척 하는 것이 역겨운 것입니다.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얼마 전에 신임 새누리당 대표를 접대하기 위해 대통령이 마련한 청와대 오찬에 송로버섯과 상어 지느러미 요리 샥스핀이 나왔다고 해서 큰 논란이 되었던 일이 생각납니다. 당시 청와대에서 일반 사람들은 감히 상상할 수 없는 고가의 요리 메뉴까지 발표한 이유는 대통령이 신임 당대표에게 얼마나 각별히 마음을 쓰고 있는가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과연 접대를 받은 그분은 대단히 감격했답니다.

 

제가 교포사목을 하던 무렵, 가끔 대통령이 해외 교포들을 초대하여 베푸는 연회에 다녀온 분들이 무척 행복한 표정으로 그 일을 자랑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아무나 그런 혜택을 받는 것이 아니니만큼, 대통령의 초대를 받아 가까운 거리에서 함께 식사하는 일이 누군가에게는 아주 특별한 경험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비유에서 임금의 초대를 거부하는 이유는 너무도 단순했습니다. “어떤 자는 밭으로 가고 어떤 자는 장사하러” 갑니다. 황당하게도 자기들의 인간적인 욕심이 앞서다보니 임금을 존중하는 일이 뒷전으로 밀렸던 겁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갈 수 있는 가까운 곳에 성당이 있고, 심지어 휴가철에는 피서지에서까지 미사에 참석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어도, 미사에 참석하는 사람의 수는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마치 신앙이 우리의 삶을 장식하는 여러 액세서리 중 하나가 아닌가 싶을 정도입니다. 이런 신앙생활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형식적인 신앙 변화시켜 하느님과 인격적인 관계 맺어야

 

한편 혼인잔치의 비유에서 임금이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을 추방하는 장면은 쉽게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길거리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데리고 왔으면서 예복을 입지 않은 것을 문제 삼을 수 있을까요? 그런데 문맥을 자세히 보면 이해할만 합니다.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이 한 사람 뿐이니, 다른 사람들은 다 예복을 갖춰 입고 왔던 것입니다. 즉 거리에서 불러온 사람들은 무작정 따라나선 사람들이 아니라, 모든 준비를 마치고 그 잔치에 불러주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과거와는 달리 오늘날에는 심판과 지옥의 고통보다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더 강조합니다. 아무리 열심히 계명을 지킨다 하더라도 하느님을 두려워하기만 해서는 ‘종이 아니라 벗’이 되기를 원하시는 예수님의 뜻에 부합하기 어렵습니다. 반대로 하느님을 너무 막역한 분으로 여겨 전혀 예의를 갖추지 않고 함부로 대한다면 그 역시 안 될 일입니다. 형식적이고 피상적인 신앙을 변화시켜, 하느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기 위해 각별히 노력해야 합니다.

 

임금의 혼인잔치에 참석하게 된 사람들처럼, 하느님을 마음 속 깊이 존경하면서 그분 곁에 머무르는 일을 최고의 영광으로 여기며, 언제 부르시든지 즉시 따라나설 수 있도록 예복을 갖춰 입고 기다리는 사람은 참으로 복된 사람들입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6년 10월호, 김광태 야고보 신부(전주교구 사목국장, 전주 Re. 담당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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