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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 구노와 한국 교회의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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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09-14 ㅣ No.1578

[세상 속의 교회읽기] 구노와 한국 교회의 인연

 

 

- 구노(Ch. Fr. Gounod, 1818-1893).

 

 

9월 순교자 성월이 되면 우리는 순교자들을 기리는 성가들을 부른다. 한편으로 그이들을 본받으며 살아갈 결심을 새롭게 다지기도 하면서 부르는 가톨릭 성가 283번에서 289번까지의 성가들이다. 이 성가들 중에서 284번 ‘무궁무진세에’는 다른 성가들에 비해서 덜 불리기는 하지만, 프랑스 근대 음악의 거장인 구노(Ch. Fr. Gounod, 1818-1893)가 조선의 순교자들을 기리며 만든 ‘명품’ 성가다.

 

이 성가와 관련된 뭉클한 일화는 잘 알려져 있다. 로마에서 음악을 공부하던 구노는 멀고먼 극동에 있는 조선이라는 나라에서 파리외방선교회 소속 선교사 세 사람이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내 이들을 애도하며 기리는 마음으로 성가를 만들었다. 이들은 1839년 기해교난 때 순교한 성 범 라우렌시오(앵베르) 주교, 성 나 베드로(모방) 신부, 성 정 야고보(샤스탕) 신부다. 그리고 구노는 이때의 감격과 열정을 떨쳐내지 못했던지 7년 뒤인 1846년에 사제가 되고자 그 순교자들이 공부하던 생 슐피스 신학교에서 공부했다. 비록 2년 뒤에 음악가로 되돌아가고 말았지만.

 

그런데 이 일화와 관련해서 정확하지 않은 이야기도 전해 온다. 구노가 앵베르 주교와 신학교 동기동창이었다거나 또는 신학교 시절에 우정을 나눈 사이였다고 어떤 이는 말한다. 그런데 앵베르 주교가 사제품을 받고 1년 뒤 중국으로 선교를 떠난 때가 1820년이라는 점에서 그때 고작 2살인 구노와 교분을 나누었다는 것은 터무니없다. 그게 아니더라도 이러한 대작곡가가 한국교회와 각별한 인연이 있는 순교자들을 생각하며 성가 한 곡을 만들어 헌정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에게는 크게 의미 있는 일일 터다.

 

 

조선의 순교자 기리며 만들어

 

그런데 뛰어난 음악 재능을 인정받아서 장학금을 받고 이탈리아로 유학까지 한 구노가 어째서 사제가 되려고 했을까. 한때의, 그리고 구노만의 충동 또는 치기였었을까. 그 시기의 역사를 더듬어 보면, 구노만 그랬던 것이 아니다. 그때는 많은 젊은이들이 사제가 되기를 바랐고, 나아가 사제로서 먼 나라에 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하기를 갈망했다.

 

구노가 태어나기 30년 전쯤에 유럽에서는 큰 격변이 일어났다. 왕이 절대 권력을 휘두르던 시절이었다. 덩달아 교회도 서슬 퍼런 위세를 누리던 때였다. 그런데 그것이 지나쳤던지, 결국에는 프랑스에서 민중이 들고 일어났다. 그렇게 1789년에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다. 오랫동안 억눌려 지내 오던 민중은 왕과 왕실을 아예 없애 버렸다. 그리고 그 여파는 여지없이 교회에도 밀어닥쳤다. 그리하여 한동안은 성직자 복장을 한 사제가 자칫 눈에 띄기라고 하면 이내 돌팔매질을 당하기 일쑤였다. 그 정도로 민중이 분노했다.

 

이러한 사정은 프랑스뿐 아니라 유럽의 다른 지역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결국에는 교회 또한 프랑스 왕실과 마찬가지로 한 순간에 힘과 재산과 권세를 잃고 말았다. 그런데 그 힘, 재물, 권세는 사실 교회의 것이 아니었다. 또한 교회가 누려서 마땅한 것도 아니었다.

 

싫든 좋든 교회는 모든 것을 다 내어놓고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 일은 어찌 보면 하느님의 은혜로운 섭리였다. 차라리 이런 방식으로라도 교회가 본연의 모습을 되찾도록 하느님께서 안배하신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얻어먹는 사람이 찬밥 더운밥 가리랴”라는 말마따나, 아무것도 가진 바가 없게 된 교회는 그리하여 다시금 “모든 이에게 모든 것”(1코린 9,22)이 되었다. 말하자면, 프랑스 혁명이 프랑스 왕실에는 멸망을 가져다주었지만 교회에는 소생과 신원 회복을 안겨 준 셈이다.

 

교회가 본래의 모습을 되찾게 되자, 교회의 구성원인 신자들 또한 놀랍게 변했다. 신자들의 신앙이 다시 뜨거워졌다. 나아가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마태 28,19-20) 하신 예수님 유언을 확실하게 봉행하고자 하는 열망이 생겨났다. 특히 앞에서 말했듯이 젊은이들이 그러한 열망에 사로잡혔고, 열정적으로 호응하고 나섰다.

 

이보다 300년가량 앞선 1492년에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했다. 이 일을 계기로 스페인을 비롯한 당시 유럽의 강대국들은 미지의 대륙을 탐험하여 영토를 확충하는 데 국운을 걸었다. 모험심 많은 탐험가들은 이렇듯 탐욕스런 왕실들이 제공하는 자금을 받아서 미지의 땅을 찾겠다며 나섰다.

 

그리하여 아메리카, 아프리카, 아시아의 여러 지역들이 유럽에 알려졌고, 유럽의 열강들은 이렇게 발견한 곳을 자기네 땅으로 만들려고 군대를 파견했다. 그런 한편으로 실속도 챙기고 이미지도 높일 요량으로 상인들이며 선교사들을 파견했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진행된 복음 선포는 안타깝게도 식민지 확충의 한 방편에 지나지 않았다. 이에 비해 300년이 지난 이제는 확실히 달라졌다. 복음을 전하다가 목숨 바치기를 마다하지 않게 된 것이다.

 

 

당시 유럽 젊은이들 사제로 먼 나라에 복음 전하다가 순교하기를 열망

 

- 앵베르 주교, 모방, 샤스탕 신부가 군문효수로 순교한 새남터성지.

 

 

마침 이 즈음에 극동의 작은 나라 조선에서 복음을 알고 믿게 되었다. 조선은 건국 이래로 쇄국정책을 펼쳐 온 탓에 외국과 교류하는 것 자체가 가능하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서도 젊고 유능하며 마음 열린 학자들이 어렵사리 얻어 본 천주교 관련 서적들에 관심을 보였다. 그들은 열심히 연구했고, 그 내용이 살아가면서 실행해야 할 도리임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이승훈 베드로 선조가 중국 조정에 파견되는 사절단의 일원으로 나간 김에 중국 현지에서 세례를 받은 것이 1784년이다.

 

스스로 싹이 터서 자라기 시작한 조선의 교회는 교회 서적에서 본 대로 베껴 가며 가성직제까지 시행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내심 미심쩍어하던 그것이 잘못임을 알게 된 뒤로는 성직자 모시기를 간절히 원했다. 그리고 이 염원과 열성에 감복한 교황청에서는 조선을 독립 교구로 설정하고는(1831년) 그 관리를 파리외방선교회에 맡겼다. 그리하여 1837년에 앵베르 주교가 입국한 것을 비롯하여 적지 않은 수의 파리외방선교회 소속 사제들이 조선에 들어왔다.

 

어찌 보면 구노도 당시의 여느 젊은이들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정서에 젖어 있었을 것이다. 만약에 구노가 신학교 과정을 끝까지 마치고 사제가 되었다면, 조선에 선교사로 파견되어 우리 교회사의 일부를 장식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구노는 이제 ‘아베 마리아’를 비롯한 아름다운 곡들을 남긴 음악의 거장이 되어 우리와 만난다. 그는 비록 선교지로서 조선을 밟지는 않았지만, 음악으로 조선의 순교자들을 기렸다. 그렇게 함으로써 조선에서 순교한 이들에게서 받은 감동을 우리에게 전해 준 것이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6년 9월호, 이석규 베드로(CBCK교리교육위원회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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