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6월 25일 (화)
(백)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 남북통일 기원 미사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다.

소공동체ㅣ구역반

왜 소공동체인가? - 소공동체가 안 된다?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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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4-08-12 ㅣ No.152

[특별기고]  왜 소공동체인가? - 소공동체가 안 된다? (23)



Ⅳ 친교의 교회

5. 세상과의 친교

4) 세상을 섬기는 교회 - “최고의 서비스로 잘 섬기겠습니다!”

필자가 군종신부로 있을 때 일이다. 매일 가는 대중목욕탕에서 한 미국인을 만났다. 그의 부인이 한국 여성이라 그런지 그는 한국어에도 능통했다. 그리고 한국의 대중탕을 매일 즐길 정도로 한국 문화를 사랑하고 한국 문화에 적응이 잘 된 사람이었다. 그 사람에게 물었다. “당신은 한국에서 죽을 때까지 살 작정이냐?”, 그러자 그는 “지금은 직업상 살고 있지만 한국에서 오래 살 생각은 없다.”고 대답했다. 의외의 대답이었다. 이유를 물었다. 그의 대답은 대단히 분명하고 간단했다. “한국에는 Goverment Service가 없다.” 맞는 말이다. 정부와 공무원의 서비스가 없는 나라이다. Goverment Service만 없을까? 일반 상점에도 가보면 정말 서비스가 없고 불친절하다. 이와 같이 우리 가톨릭교회에도 서비스가 없다. 신자들은 소중한 고객이다. 아니 고객 그 이상이다. 그러므로 최고의 서비스로 잘 섬겨야 한다. 그런데 전혀 그렇지가 않다. 오든지 말든지 식이다. 이런 불친절과 이런 무례가 또 어디 있을까 싶을 정도이다.

필자가 본당에서 사목할 때 본당가족들(보좌신부, 수녀님들, 회장단, 사무실 직원)과 사진을 찍어서 본당의 모든 신자들이 잘 볼 수 있는 곳에 크게 걸어 놓았다. 그리고 거기에 이렇게 썼다. “최고의 서비스로 잘 섬기겠습니다.” 본당 신자들은 물론이고 그 사진을 보는 사람마다 기뻐하였다. 본당 사목자의 정체성이 어디에 있는가? 섬기러 오신 예수님을 닮은 섬기는 모습이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다. “너희도 알다시피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태 20,25-28)

침체와 감소의 길을 걷고 있는 개신교에서 ‘개신교의 나아갈 길’이라는 주제로 열린 대담에서 “‘개신교회 전체가 더욱 낮은 자세로 세상을 섬겨야 한다.’, ‘성경은 목회자를 군림하는 자로 정의하지 않는다. 목회도 ‘말씀’을 갖고 교인들을 섬기는 것이다. 모든 문제가 거기서 시작된다. 목사는 성도들을 섬기고, 교회는 이 세상을 섬기는 공동체라는 성경 원리를 되새겨야 한다.’, ‘이웃에게 다 퍼줘 교회 곳간이 텅 빈다는 소리가 더 많이 들려야 한다.’, ‘이제 교회가 사회를 섬겨야 한다. 오늘의 교회는 사회를 섬기는 길 외에는 살 길이 없다.’”는 대담회의 결론을 보도하였다.(동아일보, 2012. 2. 24)

평화신문에 서울대교구의 모 본당 ○신부의 얘기가 보도된 적이 있다. 〈…그는 반미사를 봉헌할 때면 강론을 짧게 하고, 신자 한 명 한 명의 발을 닦아준다. 그는 “눈물, 콧물 정신없이 쏟는 신자들 얼굴을 그냥 바라볼 수 없어서 가난에 병든 발만 바라보며 정성껏 닦아 드린다.”고 말했다. 또 “얼마나 고생을 하며 살아왔는지 신자들 발 모양은 상상을 초월한다.”며 “그들의 우는 모습을 보면서 그들이 따뜻한 사랑에 얼마나 목말라하고 있는지 알았다.”고 말했다. 그는 영명축일 축하행사도 하지 않는다. 영적, 물적 예물도 받지 않는다. 대신 영명축일이면 하루 종일 고해소에 들어가 냉담을 풀고 돌아온 신자들과 이야기를 나눈다. 그는 평소 신자들에게 “그토록 저를 위해 기도해주시는데 무얼 더 바라겠습니까? 정 선물을 하고 싶으시면 냉담 교우를 데려와 주세요.”라고 말했다.〉(평화신문, 2012.11.25)

위의 기사가 보도된 후 전국에서 그 ○신부님이 어느 본당의 누구냐는 전화가 빗발쳤다고 한다. 그리고 부산에 계시는 한 할머니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늙은이 부탁인데 제발 한 번 들어달라. 신부님을 뵈어도 아는 체 하지 않고 미사만 참례하겠다.”고 약속하는 할머니의 간곡한 청은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할머니는 미사참례를 위해 부산에서 반나절 넘게 걸리는 ○○성당까지 올라오겠다고 했다. 며칠 동안 ○신부에 대해 묻는 전화를 받으면서 ‘신자들이 사제의 사랑에 목말라 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 사제와 상담을 하고 싶어도 약속조차 잡기 힘들고 전화 통화도 쉽지 않은 게 현실이다. 사무실에 전화해 신부님을 찾으면 열에 아홉은 “신부님이 바쁘시다. 자리에 안 계시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1년 내내 본당 신부와 말 한 마디 나눠보지 못하는 신자도 적지 않다.〉(평화신문, 2012.11.25)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금년도 성유축성미사에서 전 세계 사제들에게 “그저 울타리 안의 양에 만족하고 그 털이나 매만지는 미용사가 아니라 양 냄새 나는 목자”가 될 것을 당부하셨다.(평화신문, 2014.5.11)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먼저 교회의 ‘자기복음화’, 교회의 쇄신과 회개, 교회의 자기 변화가 전제되지만 그것은 교회가 세상과 친교를 이루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교회가 이 세상의 진정한 이웃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소공동체 모임의 복음 나누기 7단계 중 5단계에서 ‘우리가 세상을 위해서 무엇을 할 것인가?’, 혹은 ‘세상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가?’를 묻고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도 공의회를 소집하면서 같은 질문을 하였다. “교회가 현대 세계를 위하여 무엇을 할 것인가?” 이것은 교회의 사명을 묻는 것이다. 특히 예수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루카 10, 29-37)에서 제시하신 질문을 귀담아 들어야 한다.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루카 10, 29) 우리는 찾아야 한다. 누가 우리의 이웃인지를!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또 다른 질문을 던지신다.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루카 10, 36)

신앙인의 삶 가운데 ‘이웃이 되어주는 삶’이 참으로 중요하다. 그리고 그 ‘이웃’ 중에 가장 중요한 ‘이웃’이 바로 ‘세상’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세상’이 바로 우리 교회가 섬겨야 할 나의 가장 소중하고도 진정한 이웃이 되어야 한다. 세상과 이웃이 되어주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말하는 ‘친교의 교회’이며 그 정체성을 세상과의 친교 속에서 드러내야 한다. “소공동체는 주님과 소공동체원들과 세상과의 친교 속에 놓여 있다. 소공동체는 세상의 축소판이다. 소공동체는 소공동체원들이 세상 한가운데서 겪는 기쁨과 희망, 슬픔과 번뇌를 간직하고 있다.”(공동체들의 친교, 심흥보, 성바오로, 56면)

고(故) 이태석 신부님은 아프리카 수단 톤즈에서 성당보다 학교를 먼저 세웠다. 혹자는 이러한 이태석 신부님의 행위에 이해를 못하는 분들도 계실지 모른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말하는 복음화의 모습이다. 이처럼 교회는 ‘세상을 섬기는 교회’, ‘세상을 위한 교회’이지 결코 ‘교회를 위한 교회’가 아님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월간빛, 2014년 8월호, 박성대 요한(제2대리구장, 주교대리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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