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6일 (화)
(백) 부활 제3주간 화요일 하늘에서 너희에게 참된 빵을 내려 주시는 분은 모세가 아니라 내 아버지시다.

소공동체ㅣ구역반

왜 소공동체인가? - 소공동체가 안 된다?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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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3-11-12 ㅣ No.140

[특별기고] 왜 소공동체인가? - 소공동체가 안 된다? (14)



Ⅲ. 평신도 중심의 교회

1. 어불성설(語不成說)의 교회

2. ‘새로운 복음화’의 주역은 평신도!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내놓은 새로운 용어가 ‘Aggiornamento(현대 세계에로의 적응)’이다. 이 주제를 구현시키기 위하여 반드시 전제되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시대의 징표’를 읽는 것이다. 교회가 ‘시대의 징표’를 읽어야 현대 세계가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을 갈망하는지를 알 수 있다. 교회는 오늘날 ‘시대의 징표’ 를 읽는데 소홀히 해서는 안 될 것이다.

2011년도에 언론에서 세계 곳곳에서 대중들의 분노가 폭발하고 있다고 보도하였다. “대중들이 분노하고 있다. 대중들의 분노는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세계 곳곳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터져 나오고 있다. 중동 민주화를 이룩한 대중들의 분노는 쓰나미처럼 밀려가 세계 금융의 중심지 월가(Wall街)까지 점령했다. 오랜 세월 침묵하던 대중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온 이유는 가속화되고 있는 사회 양극화 때문이다. 소수에게 부와 권력이 집중되는 현상이 심화되면서 대중들의 삶이 갈수록 피폐해진 것이 대중들의 분노를 자아내고 있다. <중략> 월가의 분노는 최상위 1%가 부와 권력을 독점하고 있는 반면 나머지 99%는 상대적 박탈감과 빈곤에 시달리고 있다.”(매일신문, 2011.11.12) 이런 사회적 현상을 세상의 일로만 여기고 외면하지 않고 ‘시대적인 중요한 징표’로 읽어야 할 것 같다.

오늘날 우리 교회 안에도 이런 양극화 현상이 심각하게 뿌리박혀 있다. 이러한 교회의 양극화 현상에 대하여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아직도 우리 교회는 어불성설의 교회 모습으로 비춰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세상의 1%가 99%의 부와 권력을 독점하고 있는 것처럼 1%가 아닌 그보다 훨씬 더 적은 0.09%(성직자 : 4,621명, 평신도 : 5,309,964명. 2011년 한국천주교교세통계)의 성직자들이 99.91%인 평신도들을 병신도나 찬밥대우를 하면서 교회를 독점하고 있다.

그리고 주객전도(主客顚倒)의 현상과 함께 과연 이런 어불성설의 현상을 보면서 99.91%가 박탈감과 함께 반란을 일으키지 않을 수 없으며 분노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박탈감과 소외감으로 생긴 반란과 분노가 ‘냉담’이라는 심각한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그것도 많은 지성인과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다. 그러니 이런 교회에서 어떻게 교회의 정체성과 복음적인 교회의 모습을 느낄 수 있으며 더 나아가 새로운 복음화가 말하는 열정과 생동감을 찾아볼 수 있겠는가? ‘시대적인 징표’와 함께 복음적인 요구를 잘 읽고 과감한 변화와 구조 개편을 서둘러야 할 것이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요한 2,19)고 하신 예수님의 분노가 담긴 말씀이 더욱 크게 들린다.

정하권 몬시뇰은 “교구나 본당이 교구장이나 본당 신부의 봉건 영토란 말인가? 그 구역 안에 있는 신자와 재산이 그 구역을 담당하고 있는 주교나 신부의 소유물이란 말인가? 모두 그리스도의 양이요 하나인 교회의 신자요 재산이 아닌가.”(사목 339호, 279-280면)라고 말했다. 교구장이나 본당신부는 하느님의 백성인 교구민이나 본당신자들을 위해 존재하는 사람들이다. 성직자는 신자들을 위해 존재하는 차원을 넘어 섬기고 봉사하는 사람들이지 결코 다스리거나 군림하는 특권층의 권력자들이 아님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결코 교구민이나 본당신자들은 교구장이나 본당 주임신부들을 위해서 존재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학생들이 학교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학교가 학생들을 위해서 존재한다. 또한 교구가 본당을 위해서 존재하지 본당이 교구를 위해서 존재한다고 말할 수 없다. 본당 없이 교구가 있을 수 없고 본당의 복음화 없이 교구의 복음화도 없기 때문이다. 마치 학교가 교육부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교육부가 학교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과 같다고 말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도 “너희도 알다시피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라는 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르 10,42-45)고 말씀하셨다.

또한 이영헌 신부는 “성서의 하느님은 한마디로 당신 자신을 위해서 존재하시는 분이 아니고 오히려 인간을 위해서 존재하시는 분이며 언제나 인간을 향해 당신 자신을 주시는 사랑의 하느님이다. <1요한 4,9 참조> 하느님의 이와 같은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극치를 이루고 있다.”(함께 걷는 하느님과 인간, 이영헌, 40면)고 말하고 있다.

교구장이나 주임신부가 교구나 본당을 자신의 소유로 생각해서도 안 되며 평신도들의 의견을 무시하는 독선과 독재, 그리고 횡포를 부려서는 절대로 안 될 것이다. 내가 누구를 위한 성사(聖事)인가를 잘못 알고 있거나 잘못 생각하는 탓으로 많은 본당에서 주임신부와 신자들간의 충돌이 자주 발생하고 있다.

요한 바오로 2세가 「평신도 그리스도인」이라는 교서에서 말씀하셨다. “새로운 복음화라는 도전적이고 경이로운 이 위대한 과업이 교회에 맡겨져 있으며, 이는 현대 세계에서 절실하게 요청되고 있습니다. 평신도들은 인간과 사회의 모든 가치와 요구를 존중하며 인간과 사회에 봉사하는 가운데 복음을 선포하고 실천하도록 부름 받은 사람들로서, 스스로를 이 위대한 과업의 능동적이고도 책임있는 주체로 인식하여야 합니다.”(64항)

특히 성령의 또 다른 은총으로 선출된 새 교황 프란치스코께서 2013년도 브라질 세계청년대회에서 “평신도를 성숙하지 못하게 하는 성직자 중심주의의 유혹에서 벗어날 것을 촉구하며 평신도를 복음 선포의 동반자로 여기며 그들의 활동을 적극 지원하기를 당부했다.”(가톨릭신문. 2012.8.4)는 가톨릭신문의 보도가 있었다.

또한 모리스 준델 신부는 “부탁이니 제발 성직자주의에 빠지지 마십시오. 우리는 선택된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에는 뽑히게 된 특전을 받은 사람이란 없습니다. 바리사이주의에서 빠져나와야 합니다. 정말 어느 누구도 감독해야 할 미성년자처럼 대하지 않도록 조심합시다.”라고 말했다.(나날의 삶을 하느님과 함께, 모리스 준델, 107면)

지금까지 성직자들이 교회의 모든 사목이나 행정을 독점한 나머지 평신도들을 아직도 미성년자, 어린애로 남아 있게 만들어 버렸다. 아직도 총회장을 비롯한 본당 사목평의회 간부들이 실질적인 구실과 역할을 수행하는 모습을 보기가 참으로 힘이 드는 현실이다.

정하권 몬시뇰께서도 말했다. “급변하는 세상에 효과적으로 봉사하려면 좀 더 다원적이고 다양한 봉사 체계가 필요하며, 평신도들의 막강한 능력과 경험이 이 봉사 체계 안에 유권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수렴되어야 하겠다.”(사목 339호, 정하권, 284면)

소공동체가 안 되는 가장 큰 이유는 아직도 교회가 성직자 중심의 교회, 성직자 위주의 교회에 매여 있기 때문이다. 명심해야 한다. 사목은 사제들만의 독점물이 아니다. 평신도들도 훌륭한 공동 사목자들이며 사목 동반자들이다. 평신도들이 항상 복음화의 대상으로만 머물러 있는 한 복음화는 불가능하다. 평신도들이 새로운 복음화의 주역이다!

[월간빛, 2013년 11월호,
박성대 요한(제2대리구장, 주교대리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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