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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수원교구 위대한 여성 순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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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09-06 ㅣ No.1924

수원교구 위대한 여성 순교자 (상)


남존여비 봉건사회에서 교회 원동력은 여성이었다

 

 

전통적인 남존여비 사상 속 반상(班常) 구별이 엄격했던 봉건 사회에서 한국 천주교회 여성 신자들은 설립 초기부터 교회 발전 원동력이었다. 특별히 가정을 벗어나 사회에까지 활동 범위를 넓혀 이웃사랑을 실천하고 하느님을 증거하며 피로써 신앙을 드러냈다. 순교자 성월을 맞아 특별히 교구와 관련 있는 여성 순교자들 자취를 살펴본다.

 

 

복자 강완숙(골룸바, 1761~1801) 


신유박해를 전후해 남녀 신자들 가운데에서도 가장 큰 활약으로 명성을 떨쳤던 강완숙. 역사학자 영남대 김정숙(예수의 아기 데레사) 교수는 강완숙을 두고 ‘1801년 신유박해 당시까지 조선 신자 전체를 꿰는 벼리에 해당하는 인물’로 평가한다.

 

주문모 신부로부터 최초 여회장에 임명됐던 그는 여성 단체를 조직하고 복음 전파의 선교 활동을 시작했으며 더 나아가 동정녀 등을 모아 교육 활동까지 지도했다. 특히 명도회 여회장 직분은 남녀가 유별한 양반사회에서 가톨릭 신앙을 통해 여성이 남성과 대등한 정식 직책을 맡은 단초로 여겨진다.

 

이처럼 강완숙은 한국 교회사에서의 위치는 물론 한국 여성사 안에서도 주목된다.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인습에서 당해야 했던 억압이나 유폐적인 제한 등 당시 여성 한계성을 극복하며 활동했던 특출한 여성이었다.

 

“천주란 하늘과 땅의 주인이다. 교의 이름이 바르니 교의도 틀림없이 참될 것이다.”

 

충남 예산 덕산 고을에 사는 홍지영의 후처였던 강완숙은 홍낙민이라는 시가 친척으로부터 천주교를 알게 됐고, ‘천주’라는 단어에 깊은 감명을 받아 믿게 됐다. 이후 시가와 주위 사람들에게 적극 복음을 전하고 신해박해 때에는 감옥에 갇힌 신자들을 돌보기도 했다.

 

남편 홍지영이 후환을 두려워하며 떨어져 살기를 원하자 강완숙은 시어머니와 자신의 딸, 그리고 전처소생인 복자 홍필주(필립보)를 데리고 상경했다. 그리고 서울 도착 뒤 교회가 뿌리내리는데 필요한 봉사와 전교 생활에 전념했다.

 

주문모 신부 영입에도 적극 동참하며 경제적인 뒷받침을 했던 강완숙은 자신의 집을 주 신부의 피신처로 내놓았으며 활동을 도왔다. 세례를 받고 여회장에 임명되면서 전교를 전담하며 동시에 교회 일을 맡았던 그는 상하 계급 질서를 벗어나 양반 부녀자들부터 머슴, 하녀까지 입교시켰다. 그런 가운데 여성들을 모아 공동체를 형성했다.

 

이런 활약에 힘입어 주문모 신부 입국 당시 겨우 4000명 정도에 불과하던 신자 수는 1만 여 명을 헤아리게 됐다. 그중에서도 여성 신자가 절대다수였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강완숙은 주문모 신부를 피신시키고 집을 지키다 그해 4월 6일 체포돼 7월 2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았다. 옥에 갇힌 3개월 동안에도 그는 동료들을 위로하고 용기를 불어넣었다. 사형 판결의 최후 진술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미 천주교를 배웠고 스스로 ‘죽으면 즐거운 세상(천당)으로 돌아간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비록 형벌을 받아 죽게 될지라도 천주교를 믿는 마음을 고칠 생각이 조금도 없습니다.”

 

교구 어농성지는 그의 가묘를 조성하고 현양하고 있다.

 

 

복자 윤점혜(아가타, ?~1801)

 

윤점혜는 신유박해 때 순교한 여러 동정녀 중에서도 행적이 가장 뛰어난 여성으로 꼽힌다.

 

경기도 양근(현재 양평읍 일대) 양반 가문 출신인 윤점혜는 어머니를 통해 교리를 배우고 천주교를 알게 됐다. 복자 윤유일(바오로) 사촌 동생이자 복자 윤운혜(루치아) 언니였던 그는 박해의 소용돌이 속에서 윤유일이 사형 당하고 모친이 별세하자 강완숙의 집으로 옮겨와 10여 년을 함께 살았다.

 

주문모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은 그는 강완숙을 도와 교회 일에 전념했고 체계적으로 교리를 배워 익히고 전교 활동에도 열심히 나섰다. 그리고 주문모 신부 명에 따라 동정녀 공동체를 만들어 함께 신앙생활을 했다.

 

일찍부터 하느님께 자신을 온전히 봉헌하기 위해 동정 생활을 염원했던 그는 공동체 회장으로서 다른 동정녀들을 가르치며 자신도 엄한 극기 생활과 기도와 묵상에 열중해 많은 이들의 모범이 됐다.

 

‘아가타 성녀처럼 순교한다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던 그는 강완숙과 함께 체포돼 석 달 동안 온갖 고초를 겪었고 1801년 7월 4일 고향인 양근의 형장에서 참수됐다. 양근으로 끌려간 것은 그곳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주고자 한 것이었다. 순교 당시 그녀의 목에서는 우윳빛이 나는 흰색 피가 솟았다고 한다.

 

교구 어농성지에 그의 가묘가 세워져 있다.

 

 

어농성지 순교자 묘역.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가톨릭신문 수원교구판, 2020년 9월 6일, 이주연 기자]

 

 

수원교구 위대한 여성 순교자 (하)


남편과 자녀 하느님께로 인도하고 의연하게 순교

 

 

복자 이성례(마리아, 1801~1840)


- 심순화 화백의 ‘복녀 이성례 마리아’.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의 아내이며 가경자 최양업 신부 어머니인 이성례는 ‘위대한 어머니’, ‘온전한 신앙인’으로 불린다. 박해의 고난과 가난함 속에서도 남편을 도와 가정을 돌보고 모성까지도 하느님 앞에 내놓았던 그의 모습은 신앙인의 표상이 아닐 수 없다.

 

충청도 홍주(현재 충남 홍성군 일대) 출신으로 내포 지역 사도 이존창(루도비코)의 사촌 누이 이 멜라니아의 조카딸이었던 그는 18세 때 최경한 성인과 결혼했다.

 

홍주 다락골(현재 충남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에 살면서 1821년 최양업 토마스 신부를 낳았다. 남편을 따라 신앙생활에 적합한 서울로 이주했으나 박해 위험에 강원도 김성을 거쳐 경기도 부평, 수리산 뒤뜸이(현재 경기 안양시 만안구 안양9동)로 옮겼다.

 

이곳에서 맏아들 최양업은 신학생으로 선발돼 마카오로 떠났고, 그는 회장인 최경환 성인을 도와 마을을 교우촌으로 일구는 데 노력했다.

 

정든 고향과 재산을 뒤로 하고 자주 낯선 곳으로 이주하는 가운데 마리아는 모든 어려움을 기쁘게 이겨냈다. 자녀들이 배고프다고 호소할 때면 예수의 십자가상 고난과 성가정 이야기 등을 들려주며 현세의 고난은 잠시뿐임을 일깨웠다.

 

「기해일기」에 따르면 이성례는 이런 모든 고난을 큰 영광으로 삼았다. 마지못해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 주 예수의 거룩하신 가르침과 이전 성인들의 행실을 따르기 위해 구하고 청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 가족과 함께 체포되었고 포도청에서 혹독한 고초를 겪었다. 젖먹이 막내아들 스테파노와 수감되어 팔이 부러지고 살이 찢어지는 고문 속에서도 신앙을 증거했다. 이때 어머니로서 받았던 세상의 비난도 형벌에 못지않게 잔인했다.

 

최양업 신부는 훗날 서한에서 ‘연약하고 애처롭고 귀여운 어린 것들을 데리고 죽음을 자청하러 가느냐’는 모욕과 욕설을 감당해야 했다고 적었다.

 

남편이 매를 맞아 순교하고 스테파노가 더러운 감옥 바닥에서 굶어 죽어가는 것을 본 이성례는 마음이 흔들려 배교하고 감옥에서 나왔다. 하지만 최양업 신부가 신학교 교육을 받기 위해 떠난 사실이 알려지며 다시 체포돼 형조로 이송됐다.

 

이때 함께 옥에 있던 신자들의 권면에 용기를 얻은 그는 이전의 잘못을 뉘우쳤다. 그리고 영광스러운 순교를 결심했다. 막내가 결국 옥중에서 숨을 거두는 것을 보면서도 순교의 뜻을 굽히지 않고 형장으로 나아갔다.

 

경기도 안양의 수리산성지는 남편 최경환 성인과 복자 이성례 마리아의 삶이 깃들어 있는 곳이다.

 

 

복자 권천례(데레사, 1784~1819)

 

권천례는 한국 천주교 창설 주역 중 한 명인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딸이자 1801년 신유박해 순교자 권상문(세바스티아노)의 동생이다.

 

경기도 양근(현재 경기 양평군 양평읍 일대)에서 태어난 그는 6세 때 어머니를 잃고 1791년 신해박해 때에는 아버지까지 여의었다.

 

어렸을 때부터 덕행과 신심이 남달랐던 권천례는 동정을 지키기로 했다.

 

1801년 신유박해로 오빠들은 순교하거나 유배에 처하면서 온 집안이 풍비박산 나자 서울로 올라와 동정을 지키며 살고자 했으나 친척들 설득에 마지못해 21세 때 복자 조숙(베드로)과 혼인한다.

 

혼인날 ‘함께 정절을 지키며 살자’는 글을 건네자 당시 냉담 중이던 조숙은 마음이 변하여 아내 뜻에 동의하고 오누이처럼 살기로 약속했다. 이를 계기로 조숙은 회심하여 완전히 변모했다. 이후 그들의 신심은 날로 깊어졌고 기도와 복음 전파, 고신 극기는 일상이 됐다.

 

성 정하상(바오로)을 도와 성직자 영입에도 도움을 주었던 이들은 1817년 조숙이 신자임이 발각되면서 함께 옥에 갇혔다. 문초가 시작되고 배교가 강요됐으나 이들은 누구도 밀고하지 않고 형벌을 참아냈다.

 

사형이 확정되지 않아 감옥 생활이 길어지는 가운데 조숙의 마음이 약해지자 권천례는 힘을 북돋우며 하느님을 위해 같은 날 순교할 것을 결심하게 했다.

 

2년 이상 갇혔던 그는 1819년 8월 3일 남편 조숙과 같이 참수됐다. 처형 후 시신을 본 한 여신자는 ‘얼굴과 몸 전체가 놀랍도록 아름다웠다’고 증언했다. 신자들은 한 달이 지나서야 시신을 수습했고 그 중 머리뼈를 바구니에 담아 성 남이관(세바스티아노) 집에 두었는데 바구니를 열면 향기가 진동했다고 한다.

 

경기도 양평 양근성지에서 남편과 함께 복자 권천례를 현양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수원교구판, 2020년 9월 13일, 이주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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