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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하느님의 종 133위 약전: 박의서 사바 · 박원서 마르코 · 김화숙 베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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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9-11-26 ㅣ No.1875

하느님의 종 ‘이벽 세례자 요한과 동료 132위’ 약전


박의서 사바 · 박원서 마르코 · 김화숙 베드로

 

 

박의서(사바, 1808~1867)

 

박의서는 수원 걸매(현 충남 아산시 인주면 걸매리)에서 태어났다. 1866년 서울에서 순교한 박흥갑이 그의 아들이고, 1867년 수원에서 함께 순교한 박원서(마르코)와 박익서는 그의 동생들이다. 박의서의 집안은 선대에 이미 아산만 방조제 축조와 간척 사업을 주도해 지역 사회에 도움을 준 것으로 이름이 나있었다.

 

박의서 집안에서 처음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인 이는 조부인 박종학(1751~1836)이었다. 그는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로부터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였다. 장성한 박의서는 걸매 교우촌 회장으로 임명돼 교우들의 신앙생활을 이끌었다.

 

1866년 병인박해 때 박의서의 아들 박흥갑과 교우촌 신자들이 체포되자 박의서는 가족들을 데리고 여사울(현 충남 예산군 신암면 신종리)로 피신해 살았다. 그러나 이듬해 수원 포교가 여사울을 덮쳐 박의서 형제들과 친척들을 체포했다.

 

박의서는 동생들에게 “우리 삼 형제 모두 주님을 위해 순교하자”고 격려하며 다짐했다. 이에 힘을 얻은 삼 형제는 수원 관아에서 혹독한 문초와 형벌에도 굴하지 않고 한결같이 천주교 신자임을 굳게 증언했다. 박의서는 형제들과 함께 1867년 음력 3월 순교했다. 그의 나이 59세였다.

 

순교한 박의서 삼 형제의 시신은 당질인 박웅진(바오로) 등이 거두어 아산 맹고개(현 충남 아산시 인주면 냉정리)에 안장했다. 그리고 1988년 9월 20일 삼 형제 유해를 발굴해 공세리성당에 안치했다.

 

 

박원서(마르코, 1817~1867)ㆍ박익서(1823~1867)

 

박원서는 순교자 박의서 회장의 삼 형제 중 둘째로 그의 아내 이마리아도 순교했다. 박원서는 부친 박상환으로부터 엄격하게 신앙교육을 받았으나 형제들과 달리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지 않았다. 그래서 교우촌 회장직을 맡고 있던 큰 형 박의서의 마음을 늘 아프게 했다.

 

1867년 형제들이 함께 여사울 교우촌에서 수원 포교들에게 체포됐을 때 그는 “내가 평소에는 진실되게 천주를 공경하지 못했는데, 오늘 주님께서 나를 부르셨으니, 이번에 끌려가 죽게 된다면 우리 주님과 성모님께로 가서 살겠다”며 순교할 결의를 형제들에게 보였다. 그러자 큰형 박의서가 “우리 삼 형제 모두 주님을 위해 순교하자”고 격려했다. 박원서는 그의 뜻대로 형제들과 함께 1867년 음력 3월에 순교했다. 그의 나이 50세였다.

 

박익서(1823~1867)는 박의서 회장의 삼 형제 중 막내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집안의 신앙을 이어받아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 형제들과 함께 걸매와 여사울 교우촌에서 살다 수원 포교에게 체포돼 1867년 음력 3월 순교했다. 그의 나이 44세였다.

 

 

김화숙(베드로, 1808~1867)

 

김화숙은 충청도 결성 머리실의 중인 출신으로 고향에서 교리를 배워 입교한 후 전라도 산속으로 이주해 옹기점을 운영하며 살았다. 그러다가 충청도 지역으로 이주해 여러 해 교우촌 회장으로 활동하며 가난한 사람들을 많이 구제했다. 이후 공주 국실(현 충남 공주시 반포면 국곡리) 옹기점 교우촌에 이주해 정착한 그는 회장 소임을 다시 맡아 교우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냉담자 권면에 열중했다.

 

그러던 중 1867년 5월 8일 포교들이 국실로 들이닥쳐 신자 20여 명을 체포했다. 포교들은 신자들을 마구 때리며 “누구에게 천주학을 배웠느냐”고 심문하자 모두가 하나같이 “김화숙 베드로 회장에게 배웠다”고 답했다. 그러자 포교들은 체포된 이들 가운데 김화숙을 색출해 무차별로 때린 다음 공주 진영으로 압송했다.

 

김화숙은 옥에 갇혀 있는 동안 동료 교우들을 독려해 날마다 기도했다. 그들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옥졸들이 돼지 밥통에서 술지게미를 가져다줘도 “감사하다”며 서로 나누어 먹었다.

 

김화숙은 순교 전날 교우들과 함께 저녁 기도를 바친 다음 “나는 내일이면 죽을 것이니 당신들도 모두 임종 준비를 잘해 내 뒤를 따라와 함께 천당 복락을 누리자”고 권면했다. 그런 다음 그는 1867년 5월 12일 교우들과 함께 교수형으로 순교했다. 그의 나이 59세였다.

 

[가톨릭평화신문, 2019년 11월 24일, 리길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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