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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97: 20세기 (1) 새로운 순교의 삶과 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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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10-31 ㅣ No.1262

[전영준 신부의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 (97) 20세기 ① 새로운 순교의 삶과 영성


신앙과 일치된 삶으로 ‘순교의 화관’ 봉헌

 

 

오늘날 대부분은 비교적 자유롭게 신앙을 선택하고 살아갈 수 있지만, 전 세계 가톨릭 신자 중에는 여전히 신앙 때문에 박해를 받고, 순교하는 사례들이 심심치 않게 보고되고 있습니다. 20세기 초기에는 신앙을 증거하다가 순교한 영성가들이 출현했습니다.

 

샤를 드 푸코.

 

 

황량한 사막에서 주님을 증거하며 순교의 삶을 살아간 푸코

 

프랑스 스트라스부르(Strasbourg) 출신인 샤를 드 푸코(Charles de Foucauld, 1858~1916)는 스트라스부르와 낭시(Nancy)에서 예수회가 운영하는 기숙학교에 들어갔으나 퇴학 조치를 당하면서 한때 신앙을 잃고 방탕한 생활을 했습니다. 1876년 육군사관학교와 1878년 기병학교를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한 푸코는 프랑스 로렌(Lorraine) 지역과 북아프리카 프랑스령 알제리(Algrie) 북동부 지역에서 군 생활을 하면서도 여전히 방탕한 생활을 이어가다가 1881년 계급을 박탈당했습니다. 푸코는 1883년 사하라에서 반란을 일으킨 원주민들을 진압하러 가는 군대에 다시 지원해 지휘관으로서 큰 공로를 세우고 프랑스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군 생활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제대한 후에 탐험가로서 알제리를 다시 방문했습니다.

 

수도 알제(Alger)에서 언어와 풍습을 익히고 사막에서 2년간 생활하면서 무슬림들의 신앙심에 감명을 받은 푸코는 1886년 파리 아우구스티누스 성당에서 앙리 위벨랭(Henri Huvelin, 1830~1910) 아빠스의 지도를 받고 통회를 거쳐 가톨릭 신앙을 다시 받아들였습니다. 이스라엘로 성지순례를 떠난 푸코는 순례를 끝내가던 1890년 나자렛에서 ‘엄률 시토회(Ordo Cisterciensis Strictioris Observantiae)’인 ‘트라피스트회(Trappists)’에 입회했습니다. 얼마 후 시리아와 터키 국경 마을 아크베(Akbs)에 있는 트라피스트회 수도원으로 옮긴 푸코는 1892년 수도 서원을 하고 허름한 환경에서 생활했습니다. 이후 1896년 알제리 스타우엘리(Staouli)에 있는 수도원으로 옮긴 푸코는 1897년 트라피스트회를 퇴회하고 나자렛으로 가서 클라라회 수녀원 문지기로 일하면서 기도 생활을 실천했습니다.

 

1900년 파리로 돌아와 이듬해 사제 서품을 받은 푸코는 알제리 서쪽 베니(Bni) 수도원에서 은수생활을 시작하면서 선교를 위해 공개적으로 미사를 봉헌하고 성체조배를 실천했습니다. 1905년 푸코는 알제리 남부 타만라세트(Tamanrasset)로 이주해 사하라사막 중앙에 있는 아하가르(Ahaggar) 산맥에서 가장 높은 아세크렘(Assekrem)에 은수처를 마련하고 투아레그(Tuareg) 부족과 가까이 살면서 그들의 존경을 받으며 그들의 언어와 풍습을 익혔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6년 프랑스 식민 통치를 반대하는 원주민들의 반란이 있자, 푸코는 호전적인 무슬림인 세누시아파(Senussi)와 연관 있는 무장 괴한들에게 납치됐는데, 그를 감시하던 15세 소년이 지녔던 권총 사고로 사망했습니다.

 

푸코는 아랍인 복장을 하고 오두막에서 살면서 무슬림 안으로 들어간 선교사였습니다. 푸코는 ‘예수 사랑’이라는 좌우명과 함께 고독과 자아 포기를 통해 하느님을 하느님으로 깨닫는 삼위일체적인 영성을 살았습니다. 푸코는 사람들을 하느님께 인도하려면 그저 그들 곁에 함께 머무는 것뿐이라고 생각하고 실천함으로써 ‘사하라의 사도’라 불리게 됐습니다. 푸코의 영성을 본받으려고 했던 사람들은 1933년 ‘예수의 작은 형제회(Little Brothers of Jesus)’와 1939년 ‘예수의 작은 자매들의 우애회(Little Sisters of Jesus)’를 설립하고 빈민 지역이나 공장 지대를 사막으로 생각하고 그곳에서 침묵으로 관상생활을 실천하며 그 지역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현존을 전하며 선교 활동을 펼쳤습니다.

 

에디트 슈타인.

 

 

수용소에서 죽음으로 신앙의 삶을 증거한 슈타인과 콜베

 

폴란드 남서부 실롱스크(lsk) 지역 브로츠와프(Wrocław) 출신인 에디트 슈타인(Edith Stein, 1891~1942)은 율법주의를 따르는 유다인 집안에서 성장하면서 어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나 2살 때 아버지의 죽음을, 11살 때 숙부의 죽음을 겪고, 가족들의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목격하면서 하느님 존재에 대한 회의를 느끼고 무신론자가 되기로 했습니다. 공부를 좋아했던 슈타인은 우수한 성적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11년 브로츠와프대학에서, 1913년 괴팅겐(Gttingen)대학에서 심리학, 철학, 역사학 등을 공부했습니다. 슈타인은 마인츠(Mainz)의 유다인 가정 출신이었으나, 루터교로 개종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아돌프 라이나흐(Adolf Reinach, 1883~1917)의 추천으로 현상학에 관심을 두게 됐으며, 1916년 현상학자 에드문트 후설(Edmund Husserl, 1859~1938) 문하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그의 조교가 됐습니다. 1919년 슈타인은 교수 자격 취득 논문을 제출하고 교수로 취임하기를 바랐으나, 여자라는 이유로 교수가 될 수 없었습니다. 1921년 슈타인은 학계 동료였던 헤드비히 콘라트 마르티우스(Hedwig Conrad-Martius, 1888~1966)의 농장에서 여름휴가를 보내던 중 아빌라의 데레사(Teresa de vila, 1515~1582)의 생애를 읽으며 하느님 사랑을 체험하고 평화를 얻었습니다.

 

1922년 1월 1일 ‘데레사 베네딕타’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고 가톨릭 신자가 된 슈타인은 도미니코회 수녀원 여학교에서 가르치고, 베네딕도회 연합회의 제안으로 순회강연을 다녔습니다. 결국, 1933년 쾰른(Kln)에 있는 가르멜 수도회에 ‘십자가의 데레사 베네딕타(Teresia Benedicta a Cruce)’라는 수도명으로 입회하고 1936년 첫서원을, 1938년 종신 서원을 했습니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유다인이었던 슈타인은 박해를 피해 네덜란드 에흐트(Echt)에 있는 수도원으로 옮겼으며, 나치(Nazi)가 유다인 그리스도교 신자들까지도 색출하자 1942년 8월 2일 체포돼 8월 9일 아우슈비츠(Auschwitz) 수용소 가스실에서 사망했습니다.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슈타인은 현상학자이었으나 현상학과 심리학 및 아빌라의 데레사와 십자가 요한(Juan de la Cruz, 1542~1591)의 영성 사상을 연결하고자 노력했습니다. 또한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 사상을 받아들여 존재론적 현상학을 전개했습니다. 이렇게 가톨릭 세계관에 기초를 둔 철학 사상을 연구하던 슈타인은 결국 수도생활을 선택하면서 자신의 사상을 삶으로 실천했고, 죽음으로 고난받는 하느님의 백성임을 상징적으로 드러냈습니다.

 

폴란드 즈둔스카볼라(Zduska Wola) 출신인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Maksymilian Maria Kolbe, 1894~1941)는 1910년 ‘꼰벤뚜알 프란치스코회(Ordo Fratrum Minorum Conventualium)’에 입회해 1918년 사제 서품을 받았으며, 1917년 이미 성모님께 자신을 의탁하고 세계 복음화를 위해 활동하는 ‘원죄 없으신 성모 기사회(Militia Immaculatae)’라는 모임을 결성했습니다. 1930년대 일본을 비롯한 아시아에서 선교 활동을 했던 콜베는 1941년 유다인을 도왔다는 죄목으로 나치에게 체포돼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한 폴란드 군인을 대신해 처형됐습니다.

 

통상적인 순교의 모습은 아니었지만, 평소에 순교를 염원했으며 일상 속에서 순교의 삶을 살았던 샤를 드 푸코는 2005년 순교자로 인정받으며 시복되었습니다. 에디트 슈타인은 순교자 신분으로 1987년 시복, 1998년 시성됐습니다.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는 ‘자비의 순교자’라는 칭호로 1971년 시복, 1982년 성인품에 올랐습니다. 회심의 과정을 체험한 이들은 현대 사회에서 다양한 순교의 삶과 영성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가톨릭평화신문, 2018년 10월 28일, 전영준 신부(가톨릭대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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