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0일 (토)
(백) 부활 제3주간 토요일(장애인의 날)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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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부] 성 아우구스티노의 행복으로 가는 길: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행복을 바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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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6-04 ㅣ No.484

[성 아우구스티노의 행복으로 가는 길]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행복을 바라십니다

 

 

‘과연 하느님께서 인간의 행복을 바라실까?’ 이 질문은 이렇게 볼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이 고통받기를 바라실까?’ 인간이 고통받기를 바라신다면, 그분은 인간을 만들지도 않으셨을 것입니다. 사랑의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고통받기를 원하지 않으시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지극히 존중하고 아끼십니다.

 

창세 1-2장을 보십시오. 아담과 하와가 에덴 동산에서 살던 모습이 진정 행복한 인간의 모습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하느님 앞에서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눈으로 보고, 하느님의 목소리를 귀로 들으며, 하느님과 대화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인간이 행복하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모습대로 살아가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행복이 창조와 긴밀하게 관련된다는 말입니다.

 

 

행복의 첫 번째 필요조건은 ‘선에 대한 지향’입니다

 

그렇다면 다시 ‘행복이 무엇인가, 행복한 사람은 누구인가?’ 하는 질문부터 시작합시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무엇보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소유한 이가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원하는 대학과 직장에 들어갔다, 바라던 경제적 풍요로움이 생겼다’ 하는 것을 행복이라고 여긴다면 그것들의 공통점은 ‘원하는 것을 소유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원하고 소유해야 할까요? 이는 ‘행복의 필요조건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상응합니다.

 

참된 행복이 되기 위한 ‘매개물’에서 악은 분명 제외됩니다. 행복의 첫 번째 필요조건은 ‘선(善)에 대한 지향’입니다. 누군가 내게 고통을 주었다면, ‘그가 정말 이 세상에서 사라졌으면’ 하고 바라게 됩니다. 그런데 정말 그 사람이 죽는다면 내가 행복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 순간 통쾌할 수는 있겠지만 행복하지는 않습니다. 지향 자체가 선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이 행복을 줄 수 없습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말합니다. “원하는 것을 소유하고 있는 모든 이는, 물론 원하는 모든 것을 소유한 이가 행복한 것이 아님에도 행복하다. 하지만 원하는 것을 소유하지 못한 이나 옳지 않은 방식으로 원하는 것을 소유하는 이는 필연적으로 불행하다. 따라서 원하는 모든 것을 소유하며 동시에 어떠한 악도 원하지 않는 이가 아니라면 행복한 것이 아니다.”

 

또 내가 바라는 그 선은 변하지 않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경제적 풍요로움이 이루어졌다 칩시다. 순간 행복하겠지요. 하지만 나보다 더 많이 가진 사람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러면 슬슬 불안해집니다. 따라서 선을 지향하되 그 선이 행운에 의존하지도 않고 변화에 종속되지도 않고 영원해야 합니다. 시간이 흘러 사라지는 것, 나의 의사와 상관없이 빼앗길 수 있는 것은 진정한 행복을 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재물, 권력, 명예에서 행복을 찾으려 합니다

 

재물과 권력과 명예 등 세속의 것처럼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잃어버릴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안심하고 누릴 수 있는 진정한 행복의 대상이 아닙니다.

 

사실 재물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발전한 사회는 역사적으로 볼 때 전보다 더 높은 소득을 얻게 하기 때문에 우리를 더 부유하게 해 준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더 궁핍하게 만든 면도 있습니다. 무제한의 기대를 갖게 하여 우리가 원하는 것과 얻을 수 있는 것 사이에 늘 간격이 유지되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인간은 자기와 동등하다고 여기는 사람이 자기보다 더 많은 재물을 소유할 때 질투합니다. 비교하기 때문입니다. 자수성가한 사람들의 자서전이나 영웅담을 들을 때 더욱 그러하며, 그런 이야기는 인간에게 큰 환상과 욕망을 불러일으킵니다.

 

저는 펜을 좋아합니다. 그렇다고 저에게 펜이 없느냐? 제 책상에 가면 펜이 꽤 많습니다. 그런데도 다른 사람이 쓰는 펜을 한참 쳐다봅니다. 제 방에 있는 펜만 갖고도 10여 년을 쓸 수 있는데도 말입니다. 더 많이 갖고 싶은 욕망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웬만하면 문구점에 안 가려고 합니다. 보면 또 사게 되거든요.

 

또 권력은 사람의 가치를 지위에 따라 평가하게끔 만듭니다. 내가 낮은 지위에 있으면 나는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보다 덜 훌륭한 존재가 됩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우리와 사귀고 싶어 죽을 지경인 사람들은 우리가 사귈 만한 사람이 아니다. 우리가 사귈 만한 사람들은 오직 우리와 사귀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뿐이다.” 나보다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은 나를 쳐다보지도 않습니다. 그런데도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을 쳐다보면서 그들과 연을 맺으려 합니다. 그러므로 권력에 대한 지향은 인간을 속물로 만듭니다.

 

명예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에게는 다른 사람들의 우호적 시선을 받고 싶은 욕구가 있습니다. ‘저 사람은 훌륭해. 뛰어난 사람이야’ 하고 칭송을 받고 싶어 명예를 추구하는 것이죠. 그러니 명예를 지키기 위해 늘 불안한 상태에 있게 됩니다.

 

결국 참된 행복은 먼저 그 대상이 영원해야 하고, 다른 사람이 빼앗을 수 없도록 나와 필연적 관계를 맺고 있어야 합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욕망은 내가 원하지 않아도 빼앗길 수밖에 없는 것에 대한 사랑이다.” 재물, 권력, 명예는 내 의사와 상관없이 언제든 사라질 수 있습니다. 그것은 빼앗길 수 있고, 그래서 참된 행복을 선사할 수 없습니다.

 

행복한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진리를 향유하는 것이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진리를 향유한다는 것은 진리를 아는 것이요 사랑하는 것이요 소유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또 진리가 하느님임을 강조하면서 하느님을 소유하고, 그분과 함께 있고, 그분을 향유하는 것이 행복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하느님은 행복으로 우리의 목마름을 해소해 주시는 샘이기 때문입니다.

 

* 변종찬 신부는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에서 교부학과 고대·중세 교회사를 가르치면서 학생들과 함께 하늘을 바라보며 산다.

 

[성서와 함께, 2014년 2월호(통권 455호), 변종찬 마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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