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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철학ㅣ사상

시 읽어주는 신부: 삶을 살아낸다는 건 - 일상성의 미학, 느낌과 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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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2-08 ㅣ No.351

[시(詩) 읽어주는 신부] 삶을 살아낸다는 건 - 일상성의 미학 : 느낌과 상상

 

 

군 제대 후 복학을 준비하고 있는 한 신학생이 저에게 인사차 와서, “신부님 빛 잡지에 실리고 있는 ‘시 읽어주는 신부’는 ‘시 읽어주는 늙어가는 신부’이던데요.”라고 농담처럼 말해 한참 웃은 적이 있습니다. 정확한 지적이었습니다. 앞서 썼던 모든 글들 안에 시간의 흐름과 늙어감에 대한 생각들이 담겨져 있었습니다. 조금 지나칠 정도로 늙어간다는 것을 의식하면서 요즘의 생을 살고 있는 건 아닌지 살짝 저어하는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제 글들이 너무 쓸쓸한 색채만을 담고 있는 건 아닌지 반성도 해봅니다. 자신의 감정과 감상이 지나치게 노출된 글들은 미학적으로도 그리 좋은 것은 아닌데 하는 미안한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솔직한 느낌과 정직한 성찰은 자기감정의 과잉과 이기적 성찰과는 분명 다릅니다. 하지만 실제 글쓰기에서 그 경계를 지키는 일이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글 쓰는 사람이 겪어내야 할 숙제입니다.

 

종교인으로 살다 보니 무언가 특별한 것을 강조하고 그것에 지나친 의미부여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느님, 신앙, 죄, 은총, 전례 등등. 뭔가 예외적이고 일상적인 것과는 다르다는 느낌입니다. 이처럼 예외적이고 특별한 것들을 강조하다 보니 일상성의 풍부한 의미를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들기도 합니다. 오늘날, 종교적인 것은 일상적인 것과는 다른 특별한 것이라는 생각이 고착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되기도 합니다. 사실, 종교적인 것들은 그 근원적 기원에서 본다면 일상의 삶 안에서 시작된 것들입니다. 하지만 제도화되는 과정에서 그 일상성을 놓치고 비범하고 특별한 어떤 것으로 치장되는 것 같습니다. 일상성이 상실된 종교적인 것들은 실제의 삶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종교적 관습으로만 남을 위험이 있습니다.

 

황동규 시인은 일상성의 시학을 누구보다 잘 실현한 시인입니다. 황동규 시인은 다가오는 일상의 모든 것들 안에서 삶의 의미를 찾아내고, 일상의 행위들 안에 언어적 긴장감을 불어넣어 일상의 생각과 느낌들을 시로 재탄생시키는데 능숙합니다. 특별하고 중요한 사건들만이 삶의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사소한 모든 것들이 의미가 되고 시가 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황동규 시인에게는 특별한 순간의 느낌만이 아니라 일상의 느낌 그 자체가 특별한 느낌이 되고 시의 원천이 됩니다. 특별한 시기 또는 청춘의 시기만이 아니라 생의 모든 시기가 그에게는 그 나름의 의미와 중요성을 갖습니다. 당연히 자신의 모든 시기에 자신이 느끼는 것들과 자신이 생각하는 것들에 대해 시를 씁니다. 노년에도 거의 3년 간격으로 시집을 내는 시인의 모습에서 시의 일상성을 어렵지 않게 추론해볼 수 있습니다. 흔히 시는 감정과 감각이 왕성한 젊은 시기에 쓰는 일로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황지우 시인이 이시영 시인에게 “성님, 시는 이십대에나 쓰는 거 아니요?”(이시영의 시, ‘지우에게’)라고 농담처럼 던진 말에서 볼 수 있듯이 말입니다. 하지만 황동규 시인에게 시는 특별한 시기와 특별한 감성을 넘어, 온 일상의 삶과 더불어 존재합니다. 그래서 황동규 시인에게는 시와 시인 자신과 삶이 자주 하나가 됩니다. “시를 쓰다가 시가 나를 쓰고 있다는 느낌을 자주 받곤 한다.…시를 좇아가다 보니 바야흐로 삶의 가을이다.”(『사는 기쁨』)

 

다 왔다

하늘이 자잔히 잿빛으로 바뀌기 시작한

아파트 동과 동 사이로

마지막 잎들이 지고 있다, 허투루루.

바람이 지나가다 말고 투덜거린다.

엘리베이터 같이 쓰는 이웃이

걸음 멈추고 같이 투덜대다 말고

인사를 한다.

조그만 인사, 서로가 살갑다.

 

얇은 서리 가운 입던 꽃들 사라지고

땅에 꽂아논 철사 같은 장미 줄기들 사이로

낙엽은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밟히면 먼저 떨어진 것일수록 소리가 엷어진다.

아직 햇빛이 닿아 있는 피라칸사 열매는 더 붉어지고

하나하나 눈인사하듯 똑똑해졌다.

더 똑똑해지면 사라지리라

사라지리라, 사라지리라 이 가을의 모든 것이,

시각을 떠나

청각에서 걸러지며.

 

두터운 잎을 두르고 있던 나무 몇이

가랑가랑 마른기침 소리로 나타나

속에 감추었던 가지와 둥치들을 내놓는다.

근육을 저리 바싹 말려버린 괜찮은 삶도 있었다니!

무엇에 맞았는지 깊이 파인 가슴도 하나 있다.

다 나았소이다, 그가 속삭인다.

이런! 삶을, 삶을 살아낸다는 건…

나도 모르게 가슴에 손이 간다.

 

‘삶을 살아낸다는 건’이라는 시의 전문입니다. 황동규 시인에게 삶을 살아낸다는 것은 풍경과 자연을 응시하고 느끼는 일이며, 그저 이웃과 살가운 인사를 나누는 행위이며, 사물들 속에서 소멸의 흔적을 감각을 통해 읽어내는 것이며, 가슴에 와 닿는 것들을 소중히 끌어안는 일입니다. 삶을 살아 낸다는 것이 무슨 대단하고 특별한 일들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생은 극적인 사건들보다는 평범한 일상으로 구성됩니다. 물론 때때로 개인사적 측면에서 중요하고 특별한 행위들이 있기도 하고, 사회사적 측면에서도 많은 파급력을 갖는 중대한 사건들이 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 생의 대부분은 자신에게 다가오고 주어지는 일상을 살아내는 일입니다. 황동규 시인에게는 이런 모든 일상적인 것들이 시적 대상이 됩니다. 시인은 보이고 느껴지는 모든 것들에 대해 노래합니다. 산책과 여행이라는 일상의 역동성 속에서 다가오는 모든 것들을 노래합니다. 시인에게는 정선의 몰운대와 미시령의 큰바람이, 캘리포니아 버클리의 풍경이, 1997년 12월 24일의 홀로움이, 겨울밤 0시 5분이, 어느 초밤 화성시 궁평항이, 고속도로 휴게소가 시를 불러내기도 합니다. 시인은 노골적으로 ‘뭘 하지?’ 하고 물으며, 삶의 맛과 아픔의 맛에 대해 직설적으로 말합니다. 또 삶의 비밀 ‘그게 뭔데’ 라고 딴지 걸며 ‘저 흔하고 환한’ 삶의 맛을 이야기합니다. 의미과잉의 시대에 “단출한 술상” 같은 “이런 뜻 없는 것들” 속에 사는 기쁨이 있음을 노래합니다.(‘마음 어두운 밤을 위하여’) 황동규 시인의 시집들의 제목과 시의 제목들 그 자체가 시의 일상성을 웅변하고 있습니다.

 

가장 나중의 시집인 『사는 기쁨』(2013)과 『연옥의 봄』(2016)에도 시인의 시적 상상이 여전히 응축되어 있습니다. 시인에게 삶은 연옥이며, 사는 기쁨은 그 안의 봄을 느끼는 일입니다. 시인에게 살아낸다는 것은 느끼고 상상하는 일입니다. 모든 시인들에게 그렇듯이, 느낌과 상상은 살아있는, 아니 살아내는 징표입니다. “느낌과 상상력을 비우고 마감하라는 삶의 끄트머리가/ 어찌 사납지 않으랴!”(‘사는 기쁨’)고 시인은 외칩니다. 느끼고 상상한다는 것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꿈을 꾸는 일입니다. 시인에게 “죽음은 꿈이 없는 곳입니다.”(『연옥의 봄』 뒤표지에 실린 시인의 말에서) 시인은 “죽어서도 꿈꾸고 싶다”고 말합니다.(『사는 기쁨』 시인의 말에서) 결국 시인에게 살아낸다는 것은 언제나 꿈을 꾼다는 것이며, 곧 느끼고 상상한다는 것입니다. 느낌과 상상력, 감각과 사유가 삶의 중요한 원천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생각의 진실, 오래 남아 소중하고/ 느낌의 진실, 즉시 사라져 절실하다”(‘젊은 시인에게’)고 노래합니다.

 

생각(상상)하고 느끼고, 사유하고 감각한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징표입니다. 살아낸다는 것은 일상 사소함 안에서 끝없이 느끼고 상상하는 일입니다. 황동규의 시들은 그저 느끼고 상상하는 일상의 사소함 속에 생의 참된 기쁨과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즐거운 편지’입니다.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보리라.”(‘즐거운 편지’)

 

우리의 신앙이 종교의 영역에서만이 아니라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그리고 무엇보다 일상의 사소함 속에서 그 참된 기쁨과 의미가 드러나기를 희망합니다. 우리의 신앙이 구체적 느낌과 정직한 상상(성찰) 안에서 살아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관습과 제도 속에서 박제된 신앙이 아니라, 온 몸과 마음으로 느끼는 신앙, 온 정신으로 성찰하는 일상의 신앙이길, 황동규의 시를 읽으며 뜬금없이 생각합니다.

 

[월간빛, 2018년 2월호, 정희완 요한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조직신학 교수, 안동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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