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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종교개혁 500주년에: 루터와 천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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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10-17 ㅣ No.471

[특별 기고 - 종교개혁 500주년에] 루터와 천주교회

 

 

루터는 교회를 분열시킨 나쁜 사람인가

 

1054년 동·서방 교회의 분열로 큰 상처를 안고 있던 서방 교회는 1517년 루터의 95개 논제로 촉발된 또 다른 분열을 마주해야 했다. 천주교와 개신교로 발전된 이 분열은 가톨릭교회가 오랫동안 수용하기 쉽지 않았던 사건이다.

 

베드로 사도를 잇는 로마 주교를 중심으로 하는 가톨릭교회는 종교 개혁으로 수많은 양 떼가 교회 울타리를 벗어난 것으로 여겼다. 그 때문에 종교 개혁을 촉발한 루터(1483-1546년)에 대한 천주교 내의 부정적인 인식은 사실상 불가피했다.

 

루터의 이미지를 부정적으로 각인시키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사람은 요한네스 코클래우스 신부(1479-1552년)다. 동시대인으로서 그는 처음에 루터에게 호의적이었으나, 몇 차례 논쟁을 거절당한 뒤 그에 대한 개인적인 적대감을 느끼게 되었다. 그가 1549년에 낸 「마르틴 루터의 활동과 저술에 관한 기록」이 20세기 중반까지 루터에 대한 천주교 신자들의 의식적이거나 무의식적인 입장에 지배적 역할을 하였다. 그 책에서 루터는 ‘타락한 수사’, ‘술과 싸움을 즐기는 난봉꾼’, ‘양심의 가책을 모르는 대중 선동가’, ‘전체 그리스도교에 끝없는 고통을 초래한 사람’이자 ‘수많은 이의 영혼을 부패시킨 이단의 괴수’로 묘사되었다.

 

루터의 작품이 금서에 속했기 때문에 가톨릭 신자들에게 루터의 사상을 접할 기회는 원천적으로 가로막혀 있었다. 이러한 이유에서 이 책은 근 400년 동안 천주교의 루터 이해에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였다. 가톨릭 신학자들은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에 루터에 대한 후속 연구를 진행했지만, 루터가 자신의 주장을 합리화하고자 ‘오직 믿음만으로’라는 의화(義化)교리를 지어냈으며, 유년기의 어려운 체험에서 비롯한 병적인 양심의 가책에 시달렸던 심약한 사람이라는 내용이 추가되었을 따름이다. 결국 새 연구에도 천주교의 루터 이해는 코클래우스의 영향을 쉽게 벗어날 수 없었다.

 

천주교 안에서 루터 이해의 전환을 가져온 책은 로르츠가 1939년에 낸 「독일의 종교 개혁」이다. 그 책에 따르면, 하느님에 대한 깊은 신뢰를 지닌 진지한 수도자 루터는 죄에 대한 자신의 체험과 당시 교회 상황에서 심각한 양심의 갈등을 겪었는데, 이로부터 숙고한 것이 종교 개혁이다. 로르츠는 종교 개혁의 책임이 루터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상 교회에 있으며, 그 폐해는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년)에서 시정되었다고 했다.

 

1968년 가톨릭 신학자인 에르빈 이저로(1915-1996년)는 루터가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 궁정 성당 문에 95개의 논제를 게시했다는 통설을 교정하는 연구를 발표하였다. 그에 따르면, 루터는 대사에 관한 95개의 논제와 그에 대한 의견을 작성해, 당시 악용의 소지가 컸던 대사 훈령을 취소하고 개선된 대사 훈령을 반포할 것을 그 담당인 브란덴부르크의 알브레히트 대주교에게 청원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렇지만 루터가 모르는 사이에 95개 논제가 인쇄되어 독일 전역에 퍼지면서 루터는 자신의 의도와 무관하게 종교 개혁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1966년 천주교와 루터교 사이의 신학 대화가 시작된 뒤 루터 연구에 많은 진전이 있었으며, 교황청 그리스도인일치촉진평의회(당시는 사무국)의장 빌레브란트 추기경은 1970년 이렇게 루터를 평가했다. “루터가 신앙이 깊은 인물이었다는 사실과 그가 성실하고 헌신적으로 복음의 메시지를 연구하였다는 사실을 오늘날 누가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 하느님께서 언제나 주님으로 계셔야 하고, 또 우리 인간의 가장 중요한 대답은 하느님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와 그분에 대한 경배여야 한다는 사실에서 루터는 우리에게 공동의 스승일 수 있습니다.”

 

2011년 베네딕토 16세 교황이 루터가 살았던 에르푸르트 아우구스티노 수도원에서 한 발언 또한 루터 여정의 진실성을 확인한다. “그를 움직인 것은 하느님에 대한 질문이었고, 이 질문은 심오한 열정이었으며 그의 생애와 전체 여정의 원동력이었습니다.”

 

종교 개혁 500주년을 1년 앞둔 2016년 10월 31일 스웨덴 룬트에서 개최된 말씀 전례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내가 어떻게 자비로운 하느님을 찾을 수 있는가?’ 하는 루터의 질문을 하느님 앞에 있는 인간의 현존재의 본질을 표현하는,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위한 결정적인 질문으로 평가하였다. 이러한 천주교의 루터에 대한 긍정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그의 핵심 관심사인 의화 교리를 살펴보자.

 

 

루터의 의화 교리

 

루터의 95개 논제는 당시의 잘못된 대사 관행을 비판한다. “동전이 헌금함에 떨어지는 순간 영혼은 하늘로 튀어 오른다.” 이 같은 텟첼 수사(1460-1519년)의 대사 설교 때문에 많은 신자가 참회를 아무것도 아닌 양 생각한 채 대사를 구매함으로써 구원이 보장된다고 여긴다는 사실을 본 루터는 이를 바로잡아야 한다며 자신의 의견을 당당히 개진하였다.

 

하지만 거듭된 제도 교회와의 논쟁에서 자신의 견해를 철회할 것을 종용받자 루터는 교황이 ‘그리스도의 적’이 아닐지 의심했고, 1521년 1월 3일 교회의 파문을 받은 이후 루터는 교황을 ‘그리스도의 적’으로 지칭했다. 이러한 극단적인 표현의 이면에는 구원 또는 의화에 관한 루터의 개인적인 체험이 놓여 있다.

 

자신을 늘 죄인으로 여겼던 젊은 수사 루터는 철저하게 수행한 보속에도, 그것이 자신의 구원에 충분하지 않으리라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의로운 이는 믿음으로 살 것이다.”(로마 1,17)라는 말씀에서 답을 찾은 루터는, 의화가 인간의 행위나 공로나 보속에 따른 것이 아니라, 오로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서 거저 주어진다고 확신했다. 여기서 루터는 하느님만을 온전히 신뢰하는, 하느님께 열려 있으며, 하느님께 중심을 두고 생활하는 실존 방식을 믿음으로 이해했다.

 

이와 반대로 믿지 않는 것은 구원을 자신의 힘에 기대하는 것인데, 루터는 이를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에 대한 거부이자 인간의 자기 폐쇄로, 인간을 멸망으로 이끄는 것으로 이해했다. 따라서 루터는 대사의 매매를 통해 하느님에 대한 신뢰보다 자신의 공로에 의지하게 하는 가톨릭교회가 인간을 즉각 파멸로 이끈다고 여기지 않을 수 없다고 확신했다. 하지만 천주교의 믿음 이해는 이와 달랐다.

 

이단과의 오랜 논쟁으로부터 가톨릭교회에서 믿음은 교회의 가르침을 지성적으로 인정하고 동의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런데 그리스도교 신앙생활은 지성적인 것에 국한되지 않고 실천을 요구한다. 그러한 이유에서 천주교에서는 믿음만으로 부족하며 선행이 필요하다고 가르쳤다. ‘실천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야고 2,17 참조)으로 요약되는 천주교의 입장은 루터를 정면으로 반박하는 것처럼 비쳤다. 이러한 루터의 실존적 믿음 이해와 가톨릭교회의 지성적 믿음 이해의 차이가 간과되었기 때문에 수백 년간 매우 어렵고 무익한 논쟁이 이어졌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루터의 근본 입장을 확인하는 다음과 같은 트리엔트 공의회의 결정이 충분히 조명되지도 못했다. “인간이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한 하느님의 은총 없이, 인간 본성의 힘이나 율법의 가르침을 통하여 이행한 자신의 행업으로 하느님 앞에서 의화될 수 있다고 말하는 자는 파문될 것이다”( 「신경, 신앙과 도덕에 관한 규정·선언 편람」, 1551).

 

교파 간 대립의 분위기가 사라지고, 대화를 통한 상호 이해가 증진되면서 천주교와 루터교는 1999년 10월 31일 ‘의화에 관한 공동 선언’에 서명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공동으로 고백한다. 우리는 우리의 공로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구원 행위에 대한 믿음 안에서 오로지 은총으로 하느님께 받아들여지며,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시고 선행을 하도록 부추기시는 성령을 받는다”( 「신경, 신앙과 도덕에 관한 규정·선언 편람」, 5073).

 

이 공동 선언이 의미하는 바는 우리 삶의 행복이 결코 우리의 능률에만 의존하지 않고,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바에 달려 있다는 사실이다. 인간은 결코 그가 행한 바나 그가 궐한 바와 동일시되지 않으며, 설령 그 삶이 별 볼 일이 없다 할지라도 하느님께서 이미 그를 긍정하셨기 때문에 인간은 자체로 가치를 지닌다. 인간의 행위는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 아래 있으며, 개별 인간의 가치가 하느님의 사랑 안에 굳건히 자리한다는 의화 교리는 그리스도교 핵심 가르침에 속한다.

 

 

종교 개혁 500주년과 한국의 그리스도인들

 

2015년 인구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 인구 5152만 9천 명 가운데 개신교 신자가 968만 명(19.7%)이다. 개신교 내부 교세 통계를 분석하면 그 가운데에 장로교가 3분의 2 정도를 차지하며, 감리교와 오순절교회, 성결교와 침례교 등이 뒤를 따르고, 루터교 신자는 4천 명 남짓이다. 그런데도 종교 개혁 500주년은 모든 개신교 차원에서 기념되고 있다.

 

500주년 행사는 대체로 두 가지로 분류된다. 하나는 종교 개혁의 의미를 재조명하며 이를 2000년대 이후 성장세가 주춤해진 한국 개신교가 재도약하는 계기로 삼고자 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500주년을 여러 비판에서 벗어나지 못한 한국 개신교의 개혁을 위한 계기로 삼고자 하는 것이다. 심포지엄, 강좌, 출판 사업, 신앙 대회, 음악회, 기념 교회 건립 등이 전자에 해당하는데, 이는 그동안 양적 성장에 주력해 왔던 개신교에 종교 개혁 500주년이 자기 성찰을 통한 내적 성장의 기회가 되고 있음을 방증한다.

 

또한 적지 않은 행사는 한국 개신교의 직접적인 개혁을 요구한다. 한국 루터교회 청년들은 비텐베르크에서 ‘한국 교회 개혁 10대 과제’를 발표했고, 한국기독청년협의회는 ‘청년이 말한다! 교회를 향한 30개조 반박문’을 발표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도 ‘새로운 95개 조’를 선포한다. 이러한 반박문은 성직자 중심의 교회 운영, 세습을 통한 교회의 사유화, 일부 성직자의 윤리적 해이, 교회 일치나 종교 간 대화는 물론 다른 개신교 교회와의 교류를 막는 폐쇄적인 교조주의, 재정의 불투명성, 신앙과 삶의 괴리, 사회 문제에 대한 교회의 무관심 등을 주제로 삼는다.

 

우리 한국의 천주교 신자들이 개신교 신자들에 대해 ‘개혁한다고 집을 뛰쳐나가더니, 별수 없구먼!’이라는 자세를 지니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년) 이후 우리는 그들을 갈라진 형제로 여긴다. 형제가 잘 되는 것이 또한 자신에게 유익하지 않겠는가?

 

루터가 가톨릭교회를 거부한 동기는 새로운 교단을 세우고자 하는 의지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거저 주어지는 하느님 은총에 대한 확신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종교 개혁 500주년을 맞는 천주교 신자들은 루터에 대한 정당한 평가와 더불어 믿는 모든 이가 하나가 되기를 바라시는 그리스도의 원의(요한 17,21 참조)를 채우려 더욱 노력해야 할 것이다.

 

“과거의 갈등보다는 우리 사이의 일치라는 하느님의 은총이 협력을 이룰 것이며 우리의 연대를 강화할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에서 서로 가까워지고 함께 기도하며 서로를 경청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면서, 우리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권능에 우리의 마음을 엽니다.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내리고 그분을 증언하면서 우리는 인류 전체에 대한 하느님의 무한하신 사랑의 충실한 전달자가 되고자 하는 결심을 새로이 합니다.” 2016년 10월 31일 프란치스코 교황과 루터교 수장의 공동 선언은 우리의 앞길을 가리킨다.

 

* 신정훈 미카엘 - 주교회의 교회일치와 종교간대화 위원회 총무. 서울대교구 신부로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의 교수로 일하고 있다.

 

[경향잡지, 2017년 10월호, 신정훈 미카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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