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0일 (토)
(백) 부활 제3주간 토요일(장애인의 날)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성인ㅣ순교자ㅣ성지

[성인] 베르나노스의 우리들의 친구, 성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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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10-07 ㅣ No.1742

베르나노스의 <우리들의 친구, 성인들>

 

 

프랑스의 대표적 가톨릭 작가가 선종 1년 전인 1947년에 튀니지 튀니스에서 ‘샤를르 푸코의 작은 자매회’ 수녀들을 위해 한 강연 원고 일부를 우리말로 옮겨 함께 나누어보고자 한다.

 

 

“(…) 어떤 뜻에서 성인들에 대해 말하려는지 먼저 말씀드려야겠군요. 아, 물론 여러분들을 교화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 우리는 함께 이 자리에서 성인들에 대해 그저 평상심을 가지고 말해보도록 합시다. 마치 어린아이들이 자기들끼리 어른들에 대해 얘기하듯 말입니다. 그럼으로써, 우리와는 너무도 먼 듯하면서도 또한 우리와 그토록 가까이 계시는 그분들에 대해 우리가 가지는 느낌을 나눠보도록 합시다. (…)

 

성덕이란 우리에게 우선 무서우리만큼 어렵게 보입니다. (…) 아이들이 (…) 어른 흉내놀이를 많이 하고 나서는 그들도 차츰 어른이 되어 가지요. 이런 처방이 어쩌면 좋은 것이기도 하겠지요? 아마 그런 것 같습니다. 성인(聖人) 놀이를 하고 또 하노라면 우리도 어쩌면 종국에는 그리되지 않겠습니까? 어쨌든 소화 데레사님은 다름 아니라 바로 그렇게 하신 듯 보입니다. 그분은 아기 예수님과 더불어 성인 놀이하시면서 당신 자신도 성녀가 되신 것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마치 장난감 기차를 갖고 운전 놀이를 하고 또 하던 어린 소년이 (…) 철도 기관사가 되거나 아니면 역장직(驛長職)이라도 맡게 되곤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

 

그렇습니다, 우리 성교회도 커다란 운송회사, 천국을 향한 철도국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저는 생각해봅니다, 여기에 교통을 관장하는 성인들께서 아니 계시다면 우리는 무슨 꼴을 당하겠는가고…. 벌써 이천년 전 부터 이 철도국은 꽤나 많은 재난을 겪어왔으니 가장 심각했던 궤도 이탈과 충돌 사고만을 들어보더라도 아리우스파며 네스토리우스파, 펠라기우스파 등의 이단들, 동방 교회 및 루터의 분리…, 등등을 당해온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종래 성인들이 아니 계셨다면 여러분께 말씀드리거니와 그리스도 교회 공동체는 뒤엎어져버린 객차며 불타버린 차량 더미에 지나지 않고 철길은 비에 젖어 못쓰게 되었을 것입니다. 잡초가 무성하게 덮어버린 철로 위로 그 어떤 기차도 벌써 오래 전부터 달리지 못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들께서 여하간 제 말에서 교회는 움직임 그 자체, 추진력으로 나아가는 힘이라는 생각만은 취해주시기를 바랄 따름입니다. 하 많은 경건한 남녀교우, 신앙인들이 교회란 그저 보호처, 도피성이며 일종의 영적 안식처라고 믿고 있는 것과 달리, 아니 믿는 것처럼 행세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말입니다. 그네들은 소위 이 영적 안식처의 유리창 너머로 지나가는 사람들, 저 ‘바깥사람들’, 이 안락한 집안에 자리를 잡지 못한 사람들, 더러운 진창을 걸어가는 사람들을 구경이나 하며 기쁨 어린 자만에 젖어 있는 실정입니다. (…)

 

창조는 사랑이 이뤄낸 작품입니다. (…)한데 바로 이 우주, 세상에 고통이 있음이 걸림돌이 아니라, 자유가 있음이 바로 걸림돌일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피조물을 자유롭게 하셨다는 사실, 바로 그것이야말로 걸림돌 중의 걸림돌입니다. 왜냐하면 온갖 나머지 다른 걸림돌은 바로 그 사실에서부터 나오기 때문입니다. (…) 바로 이 순간, 이 세상 그 어느 곳에, 외로운 어느 성당 구석 자리에, 아니 어느 아무런 집에, 아니 적적한 길 어느 모퉁이에 불쌍한 사내 한 사람이 있어 두 손을 모으며 자기가 무슨 말로 하는지도 잘 모르면서 아니 말로는 하지 않고 또 못하면서도 좋으신 하느님께서 자기를 자유로운 인간으로 빚어주셨음을, 사랑할 수 있는 존재로 지어내 주셨음을 감사드리고 있지 않겠습니까.

 

다른 어느 곳에서는, 어느 이름 모를 곳에서는, 이제는 더 이상 뛰지 않게 될 아가의 작은 가슴에 마지막으로 얼굴을 묻은 한 엄마, 하느님께 그 기진맥진한 마지막 호소를 봉헌하며 이제 죽은 아기 곁을 지키는 어머니가 있지 않겠습니까. 마치 씨앗을 흩뿌려 심는 손길처럼 드넓은 우주에 태양계들을 흩뿌려 주신 그 ‘음성’이, 온 세상을 진동하는 그 ‘음성’이 막 그 여자의 귀에 이렇게 부드럽게 속삭여주고 계실 것입니다 : “나를 용서하여라, 언젠가는 그대도 알게 되고 이해하게 되겠지, 그리고 나에게 감사를 돌리리라. 그러나 지금은, 내가 지금 너에게서 원하는 것은 네가 나를 용서하는 것이니, 딸아, 용서해다오.” 바로 이런 지경의 사람들, 고통의 무게에 지친 저 부인과 저 가여운 남자는 신비의 한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우주 창조의 중심에, 하느님의 비밀 바로 그 한가운데에. (…)

 

제 믿기로는 저자들의 깨달음은 그들 지성보다 뛰어난 어떤 능력으로 된 것인데, 지성과 전혀 충돌하는 것이 아니면서도 인간의 모든 기능을 동시에 다 모으며 활동하게 하여 그들 인간성의 근본까지를 끌어들이는 저 영혼의 깊고도 저항할 수 없는 도도한 움직임에 의해 그들은 그렇게 깨달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그 사나이와 여인이 그들 운명을 받아들이는 바로 그 순간 그들은 겸손히 그들 존재 자체를 받아들인 셈이며 이제 ‘창조’의 신비는 그들 안에서 완성되는 것이니, 그들은 정작 스스로 미처 알지도 못한 채 그려 보이는 행동을 통해 전인적인 존재의 투여라는 대 모험을 하고 있는 터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바오로 성인의 말처럼 또 다른 그리스도가 됨으로써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자기 자신을 완전히 이루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그런 그들은 성인입니다.

 

하느님의 집은 사람들의 집이지 사람을 뛰어넘는 초인(超人)들의 집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초인들을 뜻하지 않습니다. 성인들이라고 해서 더 초인인 것도 아닙니다. 아니 오히려 덜 그럴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인들은 인간적인 사람들 중에서도 가장 인간적이기 때문입니다. 성인이라 함은 숭고한 사람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분들께 숭고함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숭고함이 그분들을 필요로 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인들은 플루타르크 영웅전에 나오는 식의 영웅이 아닙니다. 어떤 영웅은 인성을 뛰어 넘는 듯한 착각마저 주는데 비하여 성인은 인성을 뛰어넘지 않고 그것을 그대로 받아 안아 그 인성이 최선으로 구현되도록 노력하는 분이시니 그 차이를 아시겠습니까?

 

성인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모범, 곧 완벽하게 사람이셨던 <그분>께 가장 가까이 가고자 애쓰는 사람입니다, 더할 나위 없이 단순한 마음으로. 얼마나 소박한가 하면 바로 영웅들을 당혹케 하고, 평범해마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안도감을 줄 수 있을 정도로 말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영웅들만을 위해 죽으셨던 것이 아니라 비겁하고 소심한 사람들을 위해서도 죽으신 것이 아닙니까. 예수님의 벗들이 그분을 정작 잊어버려도 그분의 대적자들은 그분을 잊지 않습니다.

 

(…)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순교자들에게 두려움 없이 죽음의 자리로 이행하는 영광된 길을 친히 열어주신 한편으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 앞서서 저 죽음 고뇌의 깊은 암묵 속으로 먼저 걸어가 주십니다. (…)

 

그럼 이제, 이 자리를 시작할 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마치 직조공이 짜 들어가는 피륙 아래 끊임없이 왔다 갔다 하는 실 꾸러미처럼 내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고 오가는 생각을 우리 함께 나눔으로써 얘기를 맺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우리 신앙에 대해 너무나 이해하기 어려워하는 사람들은 창조된 우주만물 안에서 인간이 가지는 저 놀라운 존엄에 대해 너무나 불완전한 생각을 갖고 있기에 그러하다는 생각 말입니다. 그들은 창조 안에서 가지는 제 고유한 위치에 인간을 위치시키지 않아서 그리 생각하나 봅니다. 그런데 그 자리란 하느님께서 그곳으로 친히 내려오시도록 친히 높여주신 바로 그 자리입니다. 우리가 사랑할 수 있다는 점만 보아서도 우리는 하느님 모상으로 그분과 닮게 창조되었습니다. 성인들은 바로 사랑의 천재성을 가진 분입니다. 아, 물론 극소수에 국한된 특권과도 같은, 이를테면 예술가 특유의 천재성과 같은 그런 능력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인들은 자기 자신 안에서, 자기 존재의 심연으로부터 그리스도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씀하신 그런 물을 솟구치게 할 수 있는 분이라고 말하는 것이 보다 정확하겠지요, “이 물을 마시는 자들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신 그런 물을. 그 물은 바로 우리 각자 안에 있습니다. 하늘 아래, 하늘 향해 열린 깊은 저수조처럼. 물론 그 수면은 이런저런 찌꺼기며 부러진 나뭇가지, 낙엽 등등으로 덮여 어질러져 있고, 때로는 죽음의 냄새도 올라오는 그런 물웅덩이겠지요. 그 물 위로는 차갑고 냉혹한 어떤 빛이 빛나고 있으니 그것은 합리적 이성의 빛일 터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탁한 수면 바로 한 꺼풀 아래, 금방 물은 또 얼마나 투명하고 신선한지요! 또 그보다 좀 더 깊은 수층, 영혼은 제 본연의 모습 그대로, 더할 나위 없이 깨끗한 물보다도 더 무한히 맑게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빛으로서 태초로부터 존재하는 빛이시며 창조된 만상을 적시는 빛입니다. 바로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고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 되신 것입니다. (…)

 

신앙이란 바로 그런 사람들 안에 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의 내면 생명을 채우고 있으니, 신앙은 내적 삶 자체입니다. 바로 그 내적 생명에 의해서 모든 사람들은 부유하거나 가난하거나 무식하거나를 떠나 신성, 달리 말해 보편적 사랑과 만날 수 있습니다. 피조된 만물은 바로 마르지 않는 그 사랑이 솟아 오른 결과입니다. 그런데 가위 광란적인 활동욕에 사로잡힌 비인간적인 현대 문명은, 기분전환에 미친 듯 몰입해야 직성이 풀리는 이 현대문명은, 타락된 정신력마저도 가공스럽게 거세되어 가는 현대문명은 바로 이 내적 생명에 대적하고 있습니다. 그럼으로써 인간성을 이루는 근본마저 무너져 내리고 있습니다.

 

이 대담 중 나는 여러분께 창조의 걸림돌, 스캔들은 고통이 아니라 자유의 문제라고, 자유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사랑(愛德)>이 바로 창조의 스캔들이라고 말씀드릴 수도 있었겠습니다. 즉, 인간 말들이 본연의 의미를 간직하고 있다 한다면 나는 <창조>는 <사랑>의 드라마라고 말했을 터입니다. 모랄리스트들은 성덕을 곧잘 사치품으로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성덕은 필요이며 긴급한 요청입니다. 사랑이 이 세상 안에서 완전히 식지 않는 한, 이 세상에 성인들을 꼽을 수 있는 한, 다른 어떤 진리들은 잊혀질 수도 있습니다. 잊혀져도 무관합니다, 잊혀졌다 해도 썰물이 되면 모습을 드러내는, 제자리 지키고 있던 바위처럼 그 진리들도 오늘 다시 드러나기 마련이니까요. 정녕 <성덕>이, 바로 <성인들>께서, 이 내적 생명력을, 만일 그것이 없다면 온 인류가 완전히 멸망에 이르는 실추로 떨어지고 말 바로 그 내적 생명력을 지키고 계십니다.

 

사람이 야만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무한 창궐 중인 전체주의가 불러들이는 질곡이라는, 그 어떤 야만보다 더한 야만의 난폭함에서, 그 위험에서 헤어나기 위해 필요한 힘을 찾을 곳은 정녕 자신의 내적 생명에서입니다. 아, 현금의 시대는 더 이상 성인들의 시대가 아니라고, 성인들의 시간은 지나갔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법한 세태입니다. 그러나 제가 어디선가 쓴 적이 있듯이 성인들의 시간은 언제나, 영원히 다시 도래합니다.”

 

[성모기사, 2017년 7월호, 정영란 마리아네스(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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