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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화] 언론의 의미에서 바라본 디지털 미디어와 가톨릭 신앙인으로서의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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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10-07 ㅣ No.1034

언론(言論)의 의미에서 바라본 디지털 미디어와 가톨릭 신앙인으로서의 나

 

 

소셜 미디어(Social Media) 혹은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ocial Network Service) 등으로 불리며 기존의 일대다 관계의 정보 전달을 주목적으로 하는 미디어와는 달리, 다대다 관계로 쌍방향성을 가지고 정보 공유는 물론이고 이를 통해 관계 형성까지 그 목적으로 하는 수많은 콘텐츠의 등장은 우리 사회의 많은 것들을 바꾸어 놓았다.

 

특히 정보의 공유라는 면에서 일방적이고 수동적인 정보 습득을 떠나, 능동적인 정보의 수집은 물론이고, 오히려 내가 정보 배포의 주체가 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공통되는 관심사, 정보를 중심으로 온라인 상의 커뮤니티(Community)들을 형성하게 되었다.

 

한국의 경우, 인터넷의 급속한 발전과 더불어 1990년대 후반을 기점으로 어린 시절 동창들을 찾아주고 만날 수 있었던 인터넷 사이트들과 미니홈페이지(속칭 미니홈피)서비스와 주요 포탈들을 통해 ‘카페’라 불리는 수많은 온라인 커뮤니티들이 등장했다. 이를 통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형성은 오프라인에서의 만남과 친교를 통해서만 이루어진다는 과거의 통념은 사라지고, 온라인 안에서도 그것이 가능하다는 관념이 새로 생겨나게 되었다.

 

이후 스마트폰의 등장과 대중화로 인해 2010년을 전후로 소셜미디어에도 큰 변화가 일었다. 덩치 큰 컴퓨터(와 모니터), 그리고 (물리적인) 인터넷 연결이 없이는 불가능했던 서비스들이 다른 것들은 일체 필요 없이 내 손안의 스마트폰에서 가능하게 되므로 인해 언제, 어디서든, 내가 원하면 언제든지 온라인에 접속할 수 있는 환경이 주어지게 된 것이다.

 

본격적인 스마트폰 시대에 들어서면서, 그에 딱 적합한 소셜 미디어들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게 되었는데, 이들이 바로 앞에서 언급한 페이스북(Facebook), 트위터(Twitter), 인스타그램(Instagram), 한국형 서비스인 카카오스토리(Kakaostory) 등이다. 이러한 서비스들의 특징은 굳이 나열하지 않아도 너무나 잘 알려져 있고, 누구나 접근하기 쉽게 서비스되고 있다. 자신의 개인적인 일상이나 이야기들의 공유는 물론, 사진과 동영상들의 공유도 쉽게 할 수 있어 ‘누구나 언제 어디서 쉽고 편하게 접속하고 보고 어떤 주제든 나눌 수 있는 온라인 공간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스마트폰의 등장과 더불어 급속히 발전한 이러한 온라인 소셜 서비스들이 그전의 온라인 서비스들과 무슨 차이가 있고,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생각하기 쉽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오늘날 이런 소셜미디어들(편의상 SNS라고 지칭하기로 한다)에게서 제일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은 다음의 세 가지이다. 첫째로, ‘누구나’ 이 서비스를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로는 ‘언제 어디서든지’ 접속가능하다는 것이다. 마지막 셋째로는 특별한 주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주제의 이야기든지’ 나눌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세 가지 특징이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이 사회에서 지금의 소셜 미디어가 이렇게 급속도로 사람들에게 호응을 얻게 되고, 또 그로 인해 소셜 미디어가 가지게 된 영향력은 이 세 가지 특징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의 SNS 등장 이전에는 인터넷상의 커뮤니티들은 각자의 공통적인 관심사라든지, 취미생활이라든지 공통의 주제 아래에 모이는 것이 대부분이었다.(대표적인 예로, 주요 포탈들의 카페서비스를 생각해 볼 수 있겠다)

 

그러기에 카페나 인터넷 사이트들이 표방하는 주제들이 개인의 관심사에 부합하지 않을 경우에는 굳이 그곳에 가입할 필요도 없었고, 실제로 어떤 곳들은 그 인원들을 가려 받는 경우도 생기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각자의 커뮤니티들의 규모가 그렇게 거대하지는 않았었다.(물론 개중에 거대 커뮤니티들도 존재했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스마트폰의 등장 이전에는 앞에서 말한 제약들로 인해 커뮤니티 구성원들의 활동들이 지금의 SNS처럼 (상대적으로) 활발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러한 제약들을 넘어서 누구나, 언제 어디서, 어떠한 주제로도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소셜서비스는 실제로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기에 충분했고, 또 그로 인해 가입자들의 폭발적인 활동량과 정보량으로 그 성장을 이루어내게 되었다. 남녀노소의 구분없이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고, 언제 어디서든 접속이 가능함으로 인해 내 이야기를 하는 것을 넘어서 내 옆에 서 일어나는 일들을 사진과 동영상으로 찍어서 올림으로 그 현장감을 더할 수 있다.

 

정치, 문화, 경제 등의 모든 주제에 있어서 개인적인 의견이나 생각들을 나눔으로써 지금까지의 그 어떤 서비스보다 방대하고 현실적이고 현장감이 넘치는 정보들을 공유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소셜미디어의 발전과 성장은 또 다른 여론(輿論)의 지표가 되었고, 이는 미디어뿐만이 아닌 우리 개개인이 언론(言論)의 역할을 할 수 있게 하는 탄탄한 디딤돌과 바탕으로 그 의미를 굳히게 되었다.

 

* 홍민용 알로이시오 -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 신부. 미국 보스턴 Northeastern University에서 미디어를 전공하고 미디어를 통한 복음선포에 힘쓰고 있다. [성모기사, 2017년 1월호, 홍민용 알로이시오]

 

 

언론(言論)의 의미에서 바라본 디지털 미디어와 가톨릭 신앙인으로서의 나

 

 

매스 미디어, 특히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는 새로운 여론(輿論)의 지표가 되었고, 이러한 소셜 미디어의 확장은 스마트 폰 등 모바일기기의 발전에 힘입어 개인과 그들이 속한 공동체를 넘어 사회에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언론(言論)의 역할까지 가능케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앞서 이야기하였다.

 

솔직히 뉴스나 신문 등을 보지 않고, 트위터나 페이스북 등 SNS만 보아도 내 주변과 사회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사람들이 어떤 생각들을 가지고 있는지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스마트폰 하나만 있으면 전 세계와 다 통할 수 있는 최첨단, 정보화의 시대에 이러한 모습은 당연하고, 놀랍지 않다.

 

허나 볕이 드는 곳에는 늘 그늘이 생기기 마련이다. 거대한 정보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주지만, 그 정보의 홍수 속에서 진실을 찾아내기란 쉽지 않다. 필자는 이 글을 통해 언론(言論)이라는 개념을 계속 이야기하고 강조하고 있는데, 특히 개개인이 얼마나 스스로 언론의 한 부분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다. 오늘날 개인은 소셜 미디어를 통해 개개인의 말이나 글로 자기 생각을 드러내는 것을 넘어서 여론을 형성하게 되었다.

 

다시 말해, 내가 SNS나 다른 손쉽게 접할 수 있는 인터넷 매체들을 통해 내어놓는 생각과 말들이 다른 사람에게 얼마나 영향을 줄 수 있는지, 그리고 내가 인터넷 미디어들을 통해 하는 말과 행동들이 얼마나 진실에 가까운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게다가 인터넷을 통해서 생각과 말과 행동을 하는 적극적인 네티즌이 아닌, 거기에 있는 정보만을 받아보는 소극적인 인터넷 사용자라도 내가 접하게 되는 그 수많은 정보가 진실인가 거짓인가, 실제로 일어난 일인가 일어나지 않은 일인가에 대해 판단을 해야 할 수 있다는 것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인터넷과 그를 통한 매체들의 발전으로 우리는 정보의 배포자가 될 수도, 언론의 한 부분이 될 수도, 또한 동시에 그 정보들을 받아보는 사용자가 될 수도 있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쏟아져 나오고 있는 정보들, 그리고 내가 SNS 등의 인터넷매체들을 통하여 하게 되는 말이나 행동들이 얼마나 진실에 가깝고 사실에 가까운지에 대해 식별할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 요구된다. 필자는 이것을 ‘디지털 식별력’이라고 부르고 싶다.

 

수많은 디지털 정보 속에서 옳고 그름, 진실과 거짓을 구분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무엇인가를 식별한다는 것에는 어떤 기준이 필요하다. 물론 디지털 식별을 이야기할 때, 수많은 기준 역시 존재하고, 이러한 기준들 또한 개인과 공동체, 사회마다 다양할 수 있기에 여기서 그들을 다 이야기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이 글의 서두에서도 이야기했듯이, 가톨릭 신앙인으로서 어떠한 기준을 가지고 디지털 정보사회에서 식별력을 가질 것인가에 대해 분명히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단지 남들이 다들 그렇게 말하고 있기에, 또는 인터넷이나 SNS에서 보게 되는 단편적이고 검증되지 않은 지식의 파편이나 가십거리들에 쉽게 휘둘리는 것이 아니라, 신앙적이고 가톨릭적인 흔들리지 않는 기준이 우리 신앙인들에게 필요한 것이다.

 

가톨릭 신앙인으로서 우리가 디지털 매체들을 사용하는 데에 있어 첫 번째로 가져야 할 식별력은 마르코복음의 이 말씀에 잘 나타나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 우리 신앙인들에게 있어서 첫 번째 사명은 바로 복음 선포이다.

 

복음 선포라고 하면 광범위하고 많은 것들을 이야기할 수 있기에 어떻게 보면 복음 선포와 디지털 매체의 사용이 무슨 상관이 있냐고 반문할 수 있겠지만, 복음 선포의 사명을 띤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디지털 매체 또한 복음 선포의 수단이 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다시 말해, 인터넷이나 SNS를 통해 가벼운 일상의 일이나, 사회가 돌아가는 모습들이나, 나아가서는 사회적이거나 정치적인 이슈들을 말하고 나눌 수 있겠지만, 단순히 가십거리들에 대한 또는 재미를 위한 정보의 나눔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주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적극적이고 전통적인 선교방식 즉, 실제로 성경 말씀을 인용하고 신앙생활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교회를 알릴 수도 있겠지만, 내가 인터넷 매체를 통해 전달하게 되는 생각이나 말들, 행동들에 있어서 늘 내가 신앙인이라는 것을 잊지 않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단적인 예로 교회 안에서의 신앙생활과 일상생활 안에서는 그러지 않으면서 인터넷이라는 보이지 않는 공간 속에서 남을 쉽게 판단하고 헐뜯거나, 거짓을 이야기하는 것은 일상생활뿐만이 아니라 디지털 사회 안에서도 심각한 죄를 지을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 신앙인들은 사랑과 정의와 평화라는 복음적 가치들을 인터넷 등의 디지털 사회를 포함한 이 세상에 전달해야 하는 의무 또한 있음을 기억하는 것, 이것이 우리에게 요구되는 가톨릭적 디지털 식별력의 첫 번째라고 할 수 있다. [성모기사, 2017년 2월호, 홍민용 알로이시오]

 

 

언론(言論)의 의미에서 바라본 디지털 미디어와 가톨릭 신앙인으로서의 나

 

 

디지털 매체의 사용에 있어서 두 번째로 우리가 가져야 할 식별기준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문서 중 하나인 ‘사회 매체에 관한 교령(Inter Mirifica, 놀라운 기술)’에 잘 기술되어 있다. 특히, ‘사회 매체에 관한 교령’ 1장 중 ‘8. 여론’은 이렇게 서술한다.

 

“여론은 오늘날 각계각층의 시민 생활에, 사생활이든 공생활이든, 커다란 영향력과 권위를 행사하고 있으므로, 사회의 모든 구성원은 이 분야에서도 정의와 사랑의 의무를 완수하여야 한다. 따라서 사회 매체의 힘으로도 올바른 여론을 형성하고 전파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사회 매체에 관한 교령(Inter Mirifica, 놀라운 기술)

 

‘사회 매체에 관한 교령’은 ‘여론(輿論)’의 영향력과 권위를 강조하면서 여론을 형성하는데 지대한 영향력을 끼치는 사회 매체, 특히 오늘날에는 디지털 매체가 올바른 여론을 형성하고 전파하는데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 말은 필자가 강조하는 ‘언론(言論)’의 의미와 맞물린다. 필자는 지난 글에서 언론(言論)의 뜻에 대해 이렇게 강조하였다.

 

“첫째로 ‘개인이 말이나 글로 자기의 생각을 발표하는 일, 또는 그 말이나 글’, 두 번째로는 ‘매체를 통하여 어떤 사실을 밝혀 알리거나 어떤 문제에 대하여 여론을 형성하는 활동’을 지칭한다. 디지털 시대 전의 언론은 두 번째 의미에 더 가깝고 더욱이 매체를 통해 개인의 의사를 표현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지만, 지금 디지털 시대의 ‘언론(言論)’은 우리의 삶과 동떨어진 것이 아닌 우리 생각과 행동의 표현 수단이 되었다.”(2016년 10월호 참조)

 

교회가 강조하는 이러한 노력과 주의가 매체 자체뿐만이 아니라 매체에 영향을 끼치고 여론을 형성하는 주체인 우리 개인에게 요구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노력과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것일까? 이 해답 또한 교령에 잘 드러나고 있다. “사회의 모든 구성원은 이 분야에서도 정의와 사랑의 의무를 완수하여야 한다.”

 

어떻게 보면 앞에서 언급한 첫 번째의 것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일 수 있겠다. 복음에서 가장 강조되고 자주 언급되는 것이 바로 ‘정의와 사랑’이기 때문이다. 정의와 사랑, 문자적인 의미로도 이론적인 의미로도 우리는 그 뜻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데에 있어서 아는 것과 행함의 괴리 또한 무시할 수 없다는 것 또한 자명하다. 이러한 상황은 우리가 디지털 매체를 활용할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특별히 오늘날의 디지털 매체(물론 디지털 매체뿐만이 아니라 전반적으로 일어나는 사회적인 현상)를 사용에 있어서 이러한 괴리가 일어나게 되는 가장 큰 이유를 ‘분열’이라는 단어로 설명하고 싶다. 디지털 매체의 발전은 우리의 삶에 많은 발전과 풍요로움을 가져왔다.

 

불과 십 년 전만 해도 오늘날의 모습은 전혀 상상할 수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러한 급속한 성장은 필연적으로 그 기술들을 활용하고 이용할 수 있는 세대들과 그러지 못하는 세대들 간의 차이를 빚어냈다.

 

단적인 예로 스마트폰의 발전으로 급성장하게 된 SNS의 경우 그것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자신을 더욱 드러내고 또 소통의 도구로 삼는 젊은 세대와 스마트폰을 활용하는 것만 해도 벅차기에 SNS는 생각도 하지 못하는 기성세대들과의 차이가 있다.

 

물론 젊은 세대 못지않게 뒤처지지 않는 기성세대들도 많이 있고, 젊은 세대라고 해서 무조건 이러한 발전들을 잘 따라가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이러한 차이들은 소통에 있어서 갈등을 야기할 수 있고, 이러한 차이들이 단순한 다름이 아닌 차별로 이어지게 됨으로써 단절과 분열을 야기할 수 있다.

 

이 예가 극단적일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 인터넷이라는 공간 안에서 수많은 사람이 소통하는 가운데, 또 수많은 그룹이 가상의 공동체를 이루며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면서 이러한 갈등과 분열이 곳곳에 일어나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더구나 정보의 홍수 속에서 어느 것이 진실이고, 어느 것이 거짓이냐를 판단하는 기준들이 서로 너무나 다르고, ‘이것이 좋고, 저것은 싫다’ 하는 기호의 문제가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라는 판단의 기준으로 변해버리면서 이러한 공격적인 성향이 대화와 소통의 매체를 싸움의 장으로 변질하게 만들어버리는 경향도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교회가 말하는 “정의와 사랑”은 그 길을 잃을 수밖에 없다. 주님을 믿고 따른다는 신앙인들이라면 인간 사회에서 당연하게 발생하는, 또 그 인간 사회의 한 단면인 디지털 매체 안에서의 소통에서 일어나게 되는 차이와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그것을 차별의 근거로 삼고 있지는 않은지, 내가 그 분열의 원인이 되고 있지는 않은지 분명히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성모기사, 2017년 3월호, 홍민용 알로이시오]

 

 

언론(言論)의 의미에서 바라본 디지털 미디어와 가톨릭 신앙인으로서의 나

 

 

디지털 매체 사용에 있어서 마지막으로 우리가 가져야 할 식별의 기준은 2015년 프란치스코 교황의 제49차 홍보 주일 담화문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소통의 의미를 곁에 있음의 소중함을 깨닫고 서로 더욱 다가가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커다란 도전은 단순히 정보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대화하는 방법을 다시 배우는 것입니다. 현대의 영향력 있고 중요한 커뮤니케이션 매체들은 정보의 생산과 소비만을 부추기고 있습니다. 정보는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안 됩니다. 너무도 흔히 정보가 사실들을 단순화시키고, 다양한 입장과 관점이 서로 맞서게 하며, 사람들이 사실을 전체적으로 보기보다는 한 쪽으로 치우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이 담화문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부분은 '소통'이라는 단어이다. 물론 담화문을 전체적으로 읽어보면 교황께서는 가정의 중요성과 그 안에서의 소통을 강조하고 계시지만, 이는 결국 매체들 안에서 정보를 주고받고 활동하는 우리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디지털 매체 사용과 소통과의 관계에 대해 알아보기에 앞서, 이제까지 늘 그래왔듯이 ‘소통’이라는 단어의 사전적인 의미를 살펴보도록 하자.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을 살펴보면 ‘소통’의 사전적인 의미는 두 가지다. 첫 번째는 “막히지 아니하고 잘 통함”이고 두 번째는 “뜻이 서로 통하여 오해가 없음”이다. 어떻게 보면 첫 번째 의미나 두 번째 의미나 크게 그 뜻이 다르지는 않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대화하거나 마음을 나누는 데 있어서 막힘이 없고, 서로 오해하거나 다투지 않는 모습을 표현하는 단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이 소통이 디지털 매체 안에서 어떻게 진실과 거짓, 옳고 그름을 구별하는 판단의 근거가 될 수 있을까? 다시 한번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담화문을 보자.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커다란 도전은 단순히 정보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대화하는 방법을 다시 배우는 것입니다.” 디지털 매체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하면 바로 정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여기서 이야기하는 정보는 또한 콘텐츠라고도 표현할 수 있다)

정보를 공유하고, 그 정보에 대한 의견을 서로 나누는 것이 오늘날 디지털 매체가 우리 사회 안에서 활동하는 가장 기본적인 역할이며, 사람들은 그 활동 속에서 또한 자신을 표현하고 드러내게 된다. 하지만 정보의 공유라는 점에만 집중하게 되면, 수많은 정보의 바닷속에서 정보의 생산자들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 위해 좀 더 자극적이고 선정적이거나, 또 대부분의 또는 특정 사람들의 입맛에만 맞는 정보들을 생산하게 되고, 정보의 소비자들은 어느 것이 진실하고 옳은 것인지 판단하기 전에 그런 것들만 찾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교황님께서는 분명히 매체의 정보 생산과 소비 이전에 대화하는 방법의 중요성을 말씀하고 계신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대화, 즉 소통 없이는 상대방의 의사를 알 수가 없다. 그리고 제대로 된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을 때엔 오해나 다툼, 분열이 생기기 마련이다.

이러한 일반적인 인간관계의 모습이 디지털 매체를 사용함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정보의 공유, 콘텐츠 생산과 소비에 있어서, 단순히 주고받는 관계를 넘어서 서로 대화하고,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명확히 잘못된 모습이다. 대화와 이해는 어떻게 보면 앞에서 언급한 첫 번째 식별력의 기준인 ‘복음 선포’와 두 번째 식별력의 기준인 ‘정의와 사랑’과 그 뜻을 같이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담화문에서도 잘 나와 있듯이, “소통의 의미를 곁에 있음의 소중함을 깨닫고, 서로 더욱 다가가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어야한다. 이를 위해 얼굴을 보며 대화하는 공간이 아니기에 상대방을 함부로 대하거나, 나의 이야기만 일방통행으로 전달하는 그런 가상의 공간이어서는 안 된다. 대신 서로 더욱더 존중하고 더 귀를 기울이고, 마음으로 더욱 가까이하고자 하고 친밀 하고자 하는 그런 공간이 되어야 한다. [성모기사, 2017년 6월호, 홍민용 알로이시오]

 

 

언론(言論)의 의미에서 바라본 디지털 미디어와 가톨릭 신앙인으로서의 나

 

 

지금까지 디지털 미디어의 특성과 발전, 디지털 미디어를 중심으로한 사회적인 변화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적 흐름을 신앙 안에서 어떻게 따라갈 것인지 알아보았다. 사실 디지털 미디어에 대해 이야기할 때, 많은 사람(특히 미디어에 관심을 가지지 않거나 이런 변화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지 않는 연세가 높으신 분들)이 어려워하거나 아예 들어보지도 않고 피한다.

하지만 디지털 미디어는 젊은이들만이 공유하는 도구가 아니다. 우리 삶에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매일 들고 다니는 스마트폰으로 메시지를 주고 받는 것 또한 디지털 미디어를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미디어를 활용하고 있으면서도 그 영향과 사용에 크게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것은 새로운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디지털 미디어를 통해 주고받는 메시지나 SNS에 올리는 한 마디는 다른 이들에게 큰 영향을 줄 수 있고, 의식없는 사용은 어느 순간 이를 손에서 놓지 못하는 노예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신앙인으로서 디지털 미디어를 활용할 때는 신앙적인 측면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적극적인 모습은 물론이거니와 우리 삶 안에서 신앙을 드러내듯이 가상공간에서도 그러해야 한다.

디지털 미디어의 발전은 정보의 공유와 인간관계에 있어서 새로운 지평을 가져왔다. 다시 말해, 이전의 미디어와 달리 디지털 미디어에서는 개인이 정보의 중심에 서있고, 이로 인해 물리적인 한계를 넘어 새로운 관점의 인간관계를 형성하고 이어가면서 식별력의 중요성이 더욱 커지게 되었다.(필자는 전에 이를 디지털 식별력이라고 불렀다) 신앙인은 신앙인으로서 어떠한 기준을 가지고 이러한 디지털 정보사회에서 어떻게, 어떠한 식별력을 가질 것인가에 대해 더욱 고민해봐야 한다.

필자가 제시한 기준은 다음과 같다. 첫째, 디지털 미디어의 사용에 있어서도 신앙인의 첫 번째 사명인 복음 선포를 잊지 말아야한다. 단순한 재미나 정보공유의 차원을 넘어 복음 선포를 위해서 적극적으로 디지털 미디어를 활용하는 것이다. 물론 가상공간에서의 말과 행동에 책임감있는 모습을 보여야한다.

둘째,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문헌 중 하나인 ‘사회 매체에 관한 교령(Inter Mirifica, 놀라운 기술)’에 나오듯이 정의와 사랑의 의무를 수행하도록 노력해야한다. 자유로운 생각과 의견, 정보의 공유가 보장되는 온라인 공간의 특성상 과하게 자신의 입장과 생각만을 강조해 분열과 다툼이 심심치 않게 일어나는 것이 현실이다. 틀림이 아닌 다름을 인정하고, 서로 보듬어주며 진리와 그에 따른 정의를 분명히 이야기할 수 있는 모습이 필요하다. 마지막 식별력은 디지털 미디어의 가장 기본적인 특성이라고 할 수 있는 ‘소통’하고자 하는 모습이다.

사실 필자가 언급한 이 세 가지 디지털 식별력은 디지털 미디어를 활용하는 데 있어서 뿐만이 아니라, 우리 인간의 본질적인 삶 안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되고 필요한 것들이다. 다시 말해서 디지털 미디어의 사용에 있어서 무엇인가 특별히 따로 필요한 신앙적인 모습이 있는 것이 아니라, 신앙 안에서 우리가 평소에 중요시하던 그런 모습들이 디지털 매체를 통한 정보 공유와 소통에 똑같이 요구된다.

문제는 현실 세계와 디지털 매체가 만들어가고 있는 가상세계, 다시 말해 보이지 않는 공간 속에서의 의사소통이 이루어지는 이러한 공간을 전혀 별개로 보고 행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 두 공간에서의 모습이 서로 괴리를 이루거나 아니면 후자의 공간, 즉 인터넷상에서의 공간은 신앙적인 측면에서 바라볼 필요가 전혀 없다는 잘못된 생각을 갖는다.

필자는 지금까지 이 글을 쓰면서 ‘언론(言論)’이라는 단어를 강조해 왔다. 언론은 첫 번째로 “개인이 말이나 글로 자기의 생각을 발표하는 일, 또는 그 말이나 글”, 두 번째로 “매체를 통하여 어떤 사실을 밝혀 알리거나 어떤 문제에 대하여 여론을 형성하는 활동”을 지칭한다.

디지털 미디어의 발전과 더불어 언론이라는 단어는 더 이상 신문이나, 티브이 등의 일방적인 정보전달 수단만을 이야기 하지 않는다. 각 개인 개인이 나의 말이나 글로 나의 생각을 이야기하고, 어떤 사실을 밝혀 알리거나 어떤 문제에 대하여 여론을 형성하는 활동을 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디지털 미디어의 시대에 한 명의 신앙인으로서, 또한 ‘언론’의 한 부분으로서 어떻게 말하고 행동할 것인지 고민해봐야 할 것이다. [성모기사, 2017년 7월호, 홍민용 알로이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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