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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한국 교회의 근현대사 열두 장면: 1950년 한국 전쟁과 신앙의 증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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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9-17 ㅣ No.927

[한국 교회의 근현대사 열두 장면] 1950년 한국 전쟁과 신앙의 증인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시작되었다. 북한군은 3일 만인 6월 28일 서울을 점령했고, 7월 하순에는 부산과 경상도를 제외한 남한 전역을 장악했다. 그러나 9월 15일 인천 상륙 작전의 성공과 함께 전세가 역전되었다. 유엔군은 9월 28일에 서울을 수복하고, 10월 19일에 평양을 점령하였다.

 

압록강까지 진격했던 국군과 유엔군은 중국의 참전으로 1950년 12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후퇴를 거듭했고, 1951년 1월 4일에는 서울을 다시 북한군에게 내주게 되었다. 그러다가 전열을 정비하여 서울을 재탈환하고 삼팔선 부근까지 회복했다. 그러나 이후 전쟁은 교착 상태에 빠졌다가 1951년 7월 개성에서 휴전 회담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1953년 7월 27일 휴전 협정서에 조인하면서 전쟁도 중단되었다.

 

한국 전쟁으로 300만 명 이상이 사망했고, 수많은 시설이 파괴되었다. 그 와중에 한국 교회가 입은 인적·물적 피해도 컸다. 각지의 교회 시설이 파괴되었으며, 수많은 성직자와 수도자, 신자가 신앙인이라는 이유로 희생되었다.

 

 

남한 지역의 육이오 희생자

 

북한군은 1950년 6월 말부터 9월 중순까지 남한을 점령했는데, 이 시기에 안타깝게도 많은 가톨릭계 인사가 납치되거나 행방불명되었고 사망하기까지 하였다. 먼저 춘천 소양로본당의 콜리에 신부, 삼척본당의 매긴 신부, 묵호본당의 렐리 신부가 1950년 6-8월에 피살되었다.

 

대전에서는 1950년 9월에 브렌난 몬시뇰과 쿠삭 신부 등 성골롬반외방선교회 성직자들과 폴리 신부, 페랭 신부, 몰리마르 신부 등 파리외방전교회 성직자들이 피살되었다. 그리고 홍성본당의 강만수 신부도 이 시기에 대전에서 살해되었다.

 

서울에서는 1950년 7월 3일에 도림동본당의 이현종 신부가 총살되었고, 용산 신학교에 있던 이재현 신부, 정진구 신부, 백남창 신부는 9월 17일에 납치당한 뒤 행방불명되었다. 그리고 전주에서는 신학생인 전기수와 고광규가 9월 26일에 피살되었다.

 

성직자뿐만 아니라 평신도들도 피살되거나 행방불명된 사람이 많았다. 1950년 7월에는 서울 도림동본당의 서봉구와 공주본당의 최종수가 피살되었고, 9월에는 서산본당의 백낙선, 예산본당의 윤갑수, 합덕본당의 윤복수, 송상원, 박영옥이 피살되었다. 그리고 서울에 거주하던 김정희, 김한수, 조종국, 송경섭, 정남규는 9월에 체포된 뒤 행방불명되었다.

 

‘죽음의 행진’을 겪은 이후 사망한 외국인 성직자와 수도자들도 있다. 죽음의 행진이란 서울에서 평양으로 끌려간 다음 1950년 9월에서 이듬해 1월 사이에 만포, 고산, 초산, 중강진을 거쳐 하창리 수용소로 이동했던 고된 과정을 말한다.

 

초대 주한 교황 사절이었던 번 주교, 파리외방전교회의 비에모 신부, 공베르 형제 신부, 뷜토 신부, 카다르 신부와 성골롬반외방선교회의 카나반 신부 등이 1950년 11월 중강진에서 병사하였다.

 

샬트르성바오로수녀회의 베아트릭스 수녀와 가르멜수녀회의 메히틸드 수녀와 데레사 수녀도 1950년 7월에 체포되어 죽음의 행진을 겪었다. 베아트릭스 수녀는 1950년 11월 중강진 부근에서 살해되었고, 나머지 두 수녀는 중강진에서 병사하였다. 

 

서울교구의 유영근 신부도 납북되어 강계로 끌려가다가, 1950년 10월 하순-11월 초 우현령(자강도 송원군 월현리)북쪽에 있는 용연 근처의 산길에서 병사하였다.

 

 

북한 지역의 육이오 희생자

 

공산 정권이 북한 교회를 탄압하기 시작한 것은 1949년부터였다. 평양교구의 홍용호 주교와 신부들은 1949년 5월부터 12월 사이에 체포되었다. 그리고 신학생인 이규식과 평신도인 김운삼, 송은철, 강유선, 최삼준도 1949년에 체포되었다. 이들은 감옥에 갇혀 있다가 옥사하거나 유엔군이 북진하던 1950년 10월 무렵에 처형된 것으로 추정된다.

 

1950년 6월 24-26일에는 안주본당의 이경호 신부, 진남포본당의 조문국 신부, 의주본당의 김교명 신부가 체포되었다. 그리고 장정온 수녀는 1950년 10월 4일에 체포된 뒤 피살되었고, 서원석 수녀는 1950년 10월 8일에 행방불명되었다.

 

황해도에서 사목하던 서울교구의 성직자들도 많이 희생되었다. 은율본당의 윤의병 신부, 정봉본당의 이순성 신부, 매화동본당의 이여구 신부는 1950년 6-7월에 납치된 뒤 행방불명되었다. 또한 이여구 신부와 함께 활동하던 샬트르성바오로수녀회의 김정자 수녀와 김정숙 수녀도 매화동본당을 습격한 공산당원들에게 맞아 10월에 사망하였다.

 

송림본당의 유재옥 신부는 10월 5일 해주 해변에서 생매장되었고, 송화본당의 서기창 신부와 사리원본당의 전덕표 신부, 재령본당의 양덕환 신부도 10월에 체포된 뒤 처형되었다.

 

함경도에서 사목하던 베네딕토회 수도자들도 1949년에 체포되었다. 사우어 주교 아빠스를 비롯한 덕원수도원의 모든 수도자와 원산 · 고원 · 고산 · 영흥 · 흥남 · 함흥 본당에서 사목하던 수도자들, 그리고 원산, 함흥, 신고원에 있던 수녀들이 체포되어 평양의 인민 교화소로 보내졌다.

 

이들 중 중죄인으로 분류된 사우어 주교와 김치호 신부 등 10여 명을 제외한 사람들은 옥사덕 수용소(자강도 전천군 별하면 쌍방리)로 이송되었다. 그리고 평양에 남아 있던 사우어 주교는 1950년 2월 7일에 옥사했고, 나머지 사람들도 10월 이전에 모두 사망하였다.

 

옥사덕 수용소로 보내진 수도자들은 옥사덕, 만포, 관문리, 옥사덕으로 이어지는 ‘죽음의 행진’을 겪었고, 강제 노동에도 동원되었다. 그러면서 영양 부족, 과로, 추위, 탈진 등으로 병을 얻어 17명이 사망하였다.

 

 

육이오 희생자의 시복 추진

 

김일성은 ‘종교를 믿으면 계급 의식이 마비되고 혁명하려는 의욕이 없어진다.’고 하면서, 종교를 아편으로 규정했다. 그리고 남한을 점령한 공산 정권은, 성직자와 회장들에게 ‘노기남 주교가 이승만과 공모하여 북침을 계획하고 무고한 인민을 학살했으며, 신부들은 신자들을 착취하고, 평신도 지도자들은 제국주의와 결탁하여 국가를 멸망의 길로 끌어넣었다.’는 내용의 자술서를 쓰도록 강요했다. 종교에 대해 이러한 인식을 갖고 있던 북한 정권이 남북한 지역에서 성직자와 신자들을 탄압한 것은 당연한 결과라고 하겠다.

 

이러한 탄압 속에서도 ‘남아 있는 양들을 버리고 목자가 혼자 피신할 수 없다.’는 것이 당시 성직자들의 기본 입장이었다. 그 결과 본당에 남아 있던 사제들은 모두 체포되었고, 곁에서 그들을 지키던 평신도들도 같은 운명을 맞이했다. 합덕본당의 페랭(Perrin) 신부는 ‘끝까지 교우들과 함께 있다가 순교하겠다.’고 했고, 잡혀가던 페랭 신부의 길을 막아선 윤복수 회장과 송상원 복사도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이처럼 한국 전쟁을 전후하여 많은 성직자와 신자들이 죽음으로 공산 정권에 맞서 신앙을 지켰다. 한국 교회는 이들의 신앙과 덕행을 기리고자 ‘근현대 신앙의 증인’에 대한 시복 작업을 추진하고 있다. 성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에서는 사우어 주교를 비롯한 38명의 대상자를 선정하여 2007년부터 시복을 추진하였고, 2017년 현재에는 예비 심사를 마무리하는 단계에 와 있다.

 

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에서도 근현대에 신앙을 증언하고 희생된 분들에 대한 시복 시성의 안건을 추진하였다. 안건 준비는 2009년부터 시작하였고, 2012년에 홍용호 주교를 비롯한 81명을 시복 대상자로 선정하였다. 이들에 대한 예비 심사 법정은 2017년 2월 22일에 개정되었다.

 

한국 교회에는 103위 성인과 124위 복자가 있다. 그리고 조선왕조 치하의 순교자 133위에 대한 시복도 추진 중에 있다. 그런데 이분들은 모두 박해 시대의 순교자들이다. 이것으로 보아 지금까지 시성 시복에 대한 한국 교회의 관심은 주로 박해 시대에 집중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한국 교회의 역사는 100년의 박해 시대 이후 140여 년의 긴 시간이 흘렀다. 따라서 이제는 140년에 대한 관심도 가질 필요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근현대 신앙의 증인’의 시복 추진이, ‘기억되어야 할 분들을 기억하려는 작업’이자, 우리의 근현대사 연구를 활성화시키는 계기가 되기를, 신자이자 연구자의 한 사람으로서 기대해 본다.

 

* 방상근 석문 가롤로 - 내포교회사연구소 연구위원으로 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 역사와 고문서 전문가위원회 위원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19세기 중반 한국천주교사 연구」, 「왜 천주교 박해가 일어났을까?」가 있다.

 

[경향잡지, 2017년 9월호, 방상근 석문 가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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