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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강도영 마르코 신부 서한집(강도영, 최승룡 역, 천주교 수원교구 미리내 성지,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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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5-06 ㅣ No.895

[자료] 《강도영 마르코 신부 서한집》

강도영, 최승룡 옮김, 천주교 수원교구 미리내 성지, 2016

 

 

1. <뮈텔 문서>와 강도영 신부 서한

 

<뮈텔 문서>는 제8대 조선 대목구장인 뮈텔(Mutel, 閔德孝) 주교가 조선 선교사로 활동하던 시기에 수집해 놓은 문서군(文書群)을 총괄하여 부르는 호칭이다.1) <뮈텔 문서>에 포함된 문서는 총 13,451건에 이르는데, 그중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것은 각 지역(본당)에 파견되어 활동하던 신부들의 서한과 연말 보고서이다. <뮈텔 문서>에 수록된 문서를 여러 가지 방식으로 분류할 수 있지만 대표적인 것이 시기별 구분과 작성자별 구분이다. 한국교회사연구소(이하 ‘연구소)에 보관된 각 문서에는 연도와 날짜순으로 순서를 매긴 ‘분류번호’가 붙어 있는데, 날짜가 확인이 안 되는 경우(연례보고서)에는 일련번호가 없기도 하다. 작성자로 구분할 경우 대부분은 대목구장 주교2)에게 서한과 보고서를 보낸 신부(프랑스인 신부, 한국인 신부)이며, 프랑스 신부는 프랑스어로, 한국인 신부는 라틴어로 문서를 작성했다. 이러한 서한과 보고서를 포함한 <뮈텔 문서>는 1880년대에서 1930년대 초까지 각 지역 교회사는 물론 한국 천주교회사 전체를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뮈텔 문서>에는 신자와 일반 민중 사이의 분쟁, 정부 및 지방 관아와의 마찰, 동학(東學) 농민 운동과 의병의 봉기, 일제 총독부의 정책과 그 여파 등 천주교회와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다양한 사안이 포함되어 있어 한말과 일제 초기의 한국 근대사를 연구하는 데도 필요한 자료이다.3)

 

이러한 역사적 가치에 주목하여 교회사가들은 <뮈텔 문서>의 자료들을 1차 사료로 활용하고 있으며, 교구나 본당 차원에서 관련 문서의 내용을 교구사 · 본당사에 반영하거나 원문을 번역하여 자료집 형태로 발간하기도 했다.

 

기원이 19세기 말까지 올라가는 유서 깊은 본당의 자료집에는 초기 본당 주임 신부의 서한이 번역되어 있는데, 그 신부의 서한이 모두 실린 것은 아니고 해당 본당 재직 시기에 작성된 문서를 <뮈텔 문서>에서 선별해서 번역한 것이다.4)

 

교구 차원에서 교구사 자료집의 일환으로 선교사들의 서한이 번역했는데, 해당 교구와 관련된 선교사의 서한을 <뮈텔 문서>에서 뽑아 시기별로 편집하거나 본당별로 배치했다. 이 경우에도 개별 선교사의 전체 서한을 번역하지는 않았다.5)

 

교구나 본당 차원이 아니라 개별 선교사에게 초점을 맞춰 그 선교사와 관련된 자료들을 모아 자료집을 간행하는 경우도 있다. 해당 선교사가 사목하던 시기가 뮈텔 주교의 대목구장 재임기와 겹칠 경우 <뮈텔 문서> 중에 그 선교사가 작성한 문서를 뽑아 자료집에 싣게 된다.6)

 

이처럼 교구사나 본당사, 개별 선교사(신부)의 자료집 편찬에 <뮈텔 문서>는 가장 핵심적인 기초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본당 설정 120주년을 맞아 2016년 4월에 미리내 본당이 연구소에 의뢰하여 역주 · 간행한 《강도영 마르코 신부 서한집》(이하 《서한집》)은 본당의 초대 주임이었던 강도영(姜道永) 신부7)가 작성한 서한을 모은 것이다. 현재 남아 있는 자료는 <뮈텔 문서>에 포함된 라틴어 서한과 보고서가 사실상 전부이기 때문에 <뮈텔 문서> 중 강도영 신부의 서한 130통과 그와 관련된 드브레 신부의 서한 2통을 연구소의 최승룡 신부와 연구원들이 판독하고 역주했다.

 

이 자료집은 강도영 신부의 서한만을 대상으로 하고 있지만, 강도영 신부가 사제품을 받고 첫 번째로 부임하여 선종할 때까지 33년 이상을 사목 활동하던 곳이 미리내 본당이라는 점에서 본당사 자료집의 성격도 아울러 가지고 있다.

 

 

2. 강도영 신부의 사목 활동과 미리내본당의 초기 역사(1896~1929)8)

 

《서한집》9)은 강도영 신부가 뮈텔 주교나 드브레 주교, 동료 선교사에게 보낸 서한과 보고서로 구성되어 있다. 그 내용에는 본당 운영 및 신자 관련 문제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이와 관련된 역사적 사건이나 사회 배경도 자주 언급되고 있다. 따라서 이 서한집을 통해 강도영 신부 개인의 신앙과 활동을 살펴볼 수 있을 뿐 아니라 미리내 본당 초기의 모습, 특히 본당이 가장 활성화되었을 때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교회사적으로 ‘미리내’라는 지명은 1846년 순교한 김대건 신부의 묘소가 있는 곳으로 등장하지만, 이미 이곳에 ‘교우촌’이 형성되어 있었다. 그러고 병인년(1866) 전에는 프티니콜라 신부, 칼레 신부, 오메트르 신부 등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이곳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병인년 박해 후 선교사들이 순교하거나 중국으로 피신했기에 신자들도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그 후 개항기를 맞이하여 선교사들이 재입국하여 사목 활동을 하면서 1884년에 처음으로 미리내의 교세 통계표가 나오게 된다. 그리고 왕림 본당의 공소로 관할되어 오다가, 1896년 4월 26일에 본당으로 승격되었다.

 

1896년 5월 20일 미리내 본당에 부임한 강도영 신부는 33년간 사목 활동을 했는데 이 시기는 구한말에서 일제강점기에 걸친 격변기였다. 이러한 시대적 변화와 맞물려 본당의 교세 및 관할 영역과 사목 활동 내용도 변화를 겪지 않을 수 없었다. 강도영 신부의 사목 활동 시기를 크게 나누면 1913년 5월 17일 압고지 본당이 미리내 본당에서 분리 · 설정되는 시점을 분기로 삼을 수 있겠다.10)

 

강도영 신부가 부임할 당시 동학 농민 운동과 청일전쟁, 명성황후 시해 사건 등 정국이 혼란하고 치안이 불안한 상태였으며 본당 내의 사목활동도 어려움이 많았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강도영 신부는 공소를 신설하고 교세를 확장했으며 신자들의 문제를 해결해 나갔다.11) 1907년에는 현재 미리내 성 요셉 성당을 자연석 석조 건물(80평)로 신축했고, 본당 교육기관인 ‘해성학원’을 설립하여 소년 소녀들에게 기도와 문답, 한글 등을 가르쳤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강도영 신부는 양지, 죽산, 이천, 광주, 용인, 양성 일대를 관할하고 공소 수가 34개소에 이르는 넓은 지역을 사목하게 되었다. 1906년 이후에는 강도영 신부가 광범위한 지역과 많은 신자들을 효율적으로 사목하는데 한계를 느끼고 본당 분리를 추진했다. 여러 차례 시도 끝에 압고지 공소가 새로운 성당 후보지로 확정되고, 1913년에 압고지 본당이 분리 · 설정되었다. 이러한 미리내 본당의 비약적 성장과 본당 분리 과정은 《서한집》을 통해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1913년 압고지 본당의 설정으로 미리내 본당은 20개 공소, 신자수 1,887명 규모(1914년 통계)로 줄어들었고, 관할 영역도 현재의 용인시 남부와 이천시 서부 지역을 포함하는 정도가 되었다. 좀 더 효율적인 사목 활동이 가능할 것으로 기대했지만, 제1차 세계대전(1914~1919)의 발발과 1920년대 사회 경제적 위기 속에서 미리내 본당은 여러 가지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었다. 압고지 본당 분리부터 강도영 신부가 선종할 때까지는 이러한 위기를 극복해 나가면서 안정적인 본당 운영과 사목활동에 노력하던 시기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들도 프랑스 본국의 징집 대상이 되어 선교사의 3분의 1 이상이 본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게다가 전쟁이 장기화됨에 따라 징집된 선교사들의 귀환도 늦춰졌고 새로운 인력 충원도 불가능했다. 결국 징집을 면한 선교사와 한국인 신부들이 그 몫까지 분담해야 했다. 강도영 신부도 1914년 말부터 왕림 본당의 일부 공소를 맡게 되었는데 현재의 화성, 평택 지역의 13개 공소가 그 대상이었다. 1917년에는 다시 관할 지역을 조정해서 주변 본당 신부와 공소를 교환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교세는 부진하고 본당 사목은 원활하지 못했다. 1920년에 선교사들의 귀국으로 본당 사목이 정상화되자 강도영 신부는 1914년 당시의 관할 지역을 사목하게 되었다.

 

그런데 1921년 이후에도 교세는 회복되지 않고 전반적인 하향세를 보였다. 화전민이 많았던 미리내 본당 신자들에게 가장 위협이 된 것은 일제의 전매제도(1921년)이었다. 이 정책으로 담배 가격이 하락함으로써 화전민 신자들은 점점 가난하게 되고 빚에 쪼들리게 되었다. 게다가 각종 자연재해와 전염병은 많은 신자들의 목숨을 앗아가고 생활 기반을 파괴해 버렸다. 따라서 일자리와 새로운 터전을 찾아 타지로 떠나는 신자들이 생겨나고 외부 세상의 풍습이 교우촌에 들어와 젊은이들이 노름에 빠지거나 냉담해지게 되었다.

 

이러한 위기 상황 속에서 강도영 신부는 자신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신자들을 돕기도 하고, 담배 농사 대신 양잠업을 권장해서 경제적 곤궁을 벗어나게 하려고 했다. 노름에 빠지지 않도록 청년들을 모아 타이르는 활동도 벌였고, 각 공소마다 주일 교리학교를 만들어 선생을 지명하고 교리를 가르치도록 하였다. 또한 강도영 신부는 1924년 보좌 신부로 온 박동헌 신부에게 은이 지역을 나눠줌으로써 1927년 ‘남곡리 본당’(현재 양지 본당)을 설립하도록 했다. 1925년 복자로 올려진 김대건 신부 기념 강당을 1928년 7월에 건축하여 9월 라리보 주교의 강복식을 갖기도 했다.

 

미리내 본당은 1910년대 후반 제1차 세계대전의 여파와 1920년대 계속되는 경제난과 사회적 혼란으로 생활 터전이 흔들리면서 교세가 줄어드는 위기를 맞게 되었다. 그러나 강도영 신부는 김대건 신부와 페레올 주교의 무덤을 모신 순교자의 후손이라는 자부심을 바탕으로 신앙 전통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한편으로 새로운 사업을 시도하고 교회 공동체를 쇄신하면서 위기를 극복해 나갔던 것이다. 당시 본당의 구체적 위기 상황과 이를 대처해나가는 강도영 신부의 노력은 《서한집》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3. 《강도영 마르코 신부 서한집》의 교회사적 가치

 

강도영 신부는 김대건 신부, 최양업 신부에 이어 세 번째로 사제품을 받은 한국인 신부였고, 그의 사제서품식은 한국 땅에서 최초로 거행된 것이었다. 그는 구한말에서 일제강점기에 걸친 격변기에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들과 함께 활동하면서 한 본당을 33년간 맡아 사목했다. 초창기 한국인 신부로서 강도영 신부의 사목 활동과 미리내 본당의 역사가 그가 작성한 연례 보고서와 서한에 담겨 있다는 점에서 《서한집》의 교회사적 가치가 크다.

 

《서한집》을 통해 본당 주임이자 한국인 신부로서 강도영 신부가 맡아서 수행했던 다양한 역할과 성과를 살펴볼 수 있고, 강도영 신부 개인의 신앙과 인식을 이해할 수 있다.

 

《서한집》은 강도영 신부가 사목하던 시기의 미리내 본당과 지역 사회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지역 교회사 연구의 1차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설정 당시 미리내 본당 관할 영역은 현재의 용인시와 광주시, 성남시, 이천시, 안성시 일부를 포괄하는 광범위한 지역이었다. 1913년 압고지 본당 분리와 1927년 양지 본당 분리로 미리내 본당의 관할 영역이 축소되었지만, 1910~1920년대 급변하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주변 본당들이 사목을 원활히 하지 못할 때에도 미리내 본당은 그 역할을 대신하여 수행함으로써 한국 천주교회의 발전에 이바지하였다. 이후 시대적 변화 속에서 미리내 본당은 두 번이나 공소로 전락했고 지역 본당보다는 대표적인 순례성지로서 위상이 높지만, 현재도 본당으로서 역할을 수행하면서 120년의 역사를 이어오고 있다. 따라서 《서한집》은 미리내 본당은 물론 압고지 본당, 양지 본당, 용인 본당을 포함한 지역 교회사(본당사)연구의 기초 사료로서 활용가치가 높다. 또한 구한말 ~ 일제강점기 시기(1890~1920년대)의 사회 변화, 신자들을 포함한 일반민중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도 한국 근대사 연구의 자료로도 가치가 있다.

 

강도영 신부와 미리내 본당의 초기 역사를 좀 더 깊이 연구하기 위해서는 《서한집》과 더불어 관련 자료를 함께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서한집》 부록에서도 참고 자료로 독일 성 베네딕도회 오틸리엔 연합회의 베버 총아빠스가 1914년 출판한 《조선》(Im Lande der Morgenstille)의 미리내 성당 방문기(사진 포함)12)를 실었다. 《서한집》의 각주에서 소개된 《뮈텔 주교 일기》나 《경향잡지》 같은 교회언론 기사도 참조해야 하며, 특히 <뮈텔 문서>에 포함된 주변 본당 신부들의 서한13)과 강도영 신부의 보좌였던 박동헌 신부의 서한 등도 함께 비교 · 연구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관련 자료와 함께 검토 · 연구될 때 《서한집》이 한국 교회사에서 차지하는 역사적 가치는 더욱 커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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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서들의 대부분은 뮈텔 주교가 조선에 입국하여 활동하기 시작한 1880년에서 파리 외방전교회의 신학교 지도자로 임명되어 귀국하기 전인 1885년까지 5년간, 그리고 조선 대목구장으로 임명되어 다시 조선에 입국한 1891년에서 사망할 때까지 42년간 등 총 47년 동안에 집중되어 있다. 그 종류는 뮈텔 주교 자신이 받은 서한(공한 및 사한)과 보고서, 교회 안의 공문서(公文書), 성직자와 신자들의 사문서(私文書), 외교 문서와 신문 기사, 전보, 안내장, 각종 메모와 명함, 초대장 등 매우 다양하다.

 

2) 신부들이 보낸 서한과 보고서의 수취인은 대부분 뮈텔 주교이지만 부주교로서 실제 대목구 행정을 담당했던 드브레 주교나 라리보 주교 앞으로 보낸 것도 <뮈텔 문서>에 포함되어 있다.

 

3) 뮈텔 주교는 수집한 문서를 교회 내의 문서와 교회 밖의 문서로 구분하여 연도별로 정리한 뒤, 한지로 포장하여 100개의 종이 상자에 보관하고 있었다. 이 문서 상자들은 뮈텔 주교 사후에 유품들과 함께 명동성당 지하실로 옮겨져 보관되었다. 1965년에 한국교회사연구소의 최석우 신부가 지하실에서 문서 상자를 발견하고 서울대교구의 허락을 얻어 동 연구소로 이관하면서였다. 최석우 신부는 교회사가 이원순 교수에게 문서 정리를 의뢰하였고, 서로 협의한 끝에 문서군의 명칭을 <뮈텔 문서>로 명명했다.

 

4) 1990년 연구소에서 왕림 본당의 의뢰를 받아 역주 · 간행한 《천주교 왕림(갓등이) 교회 본당 설립 100주년 기념집(I)》에 실린 서한들은 모두 <뮈텔 문서>에서 뽑은 것이며, 같은 해 연구소에 편찬한 《구합덕본당 100년사 자료집》의 ‘성직자들의 서한’ 역시 <뮈텔 문서>에 근거한 것이다.

 

5) 1988년 인천교구와 연구소가 편찬한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 서한문》(자료로 본 인천교구사 제2집)은 <뮈텔 문서>에서 현재 인천교구 관할 지역과 관련된 자료를 발췌하여 번역한 것이다. 여기서는 시기별로 문서를 배치했다. 1994년 대전교구 홍보국과 연구소가 편찬한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 서한집》(대전교구사 자료 제1집)이나 1995년 연구소가 함경도 천주교회사 간행사업회의 의뢰를 받아 편찬한 《함경도 선교사 서한집》 I · II(함경도 천주교회사 자료집 제1집)도 <뮈텔 문서>에서 해당 내용을 뽑은 것이다. 두 자료집은 본당별로 역대 주임 신부들의 서한을 선별해서 번역했다. 2015년 춘천교구 교회사연구소에서 간행한 《강원도 프랑스 선교사 서한집》 I · II은 춘천교구에서 2004년에 간행한 ‘서한자료집’(Lettres du Kangwon Do)을 번역한 것인데, 이 ‘서한자료집’ 역시 <뮈텔 문서>에서 강원도 지역에서 활동한 선교사들의 서한을 뽑아 판독한 것이다.

 

6) 2014년 내포교회사연구소에서 역주·간행한 《라리보 주교 자료집》 I(1907~1948)에는 라리보 주교가 뮈텔 주교에게 보낸 문서가 포함되어 있으며, 2016년 수원교회사연구소에서 역주 · 간행한 《몰리마르 신부 자료집》에는 몰리마르 신부가 부주교 라리보 주교에게 보낸 서한이 포함되어 있다. 이 문서들도 모두 <뮈텔 문서>에서 뽑은 것이다.

 

7) 강도영은 1863년 8월 6일(음 6월 22일) 서울에서 강 요셉과 우 막달레나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고모인 강 마리아의 권유로 사제가 되기로 마음먹고 19세인 1882년에 블랑 주교가 세운 한한학교(韓漢學校)에 입학하여 1883년에 4명의 동료와 함께 말레이 반도에 있는 페낭(Pinang) 신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페낭의 열대 기후와 풍토 때문에 유학 간 신학생들이 병사하는 일이 계속 생기자 블랑 주교는 페낭의 신학생들을 다시 불러들였다. 강도영은 1892년 7월 동료 신학생 5명과 함께 귀국하여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에 편입했다. 1896년 4월 26일에 서울의 약현(현 중림동 약현)성당에서 강성삼 라우렌시오, 정규하 아우구스티노와 함께 사제품을 받았다. 이 서품식은 한국에서 거행된 최초의 사제 서품식이었다. 강도영 신부는 5월 20일 서울을 떠나 첫 사목지인 안성 미리내 본당(현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 미산리 소재)에 부임했고, 그곳에서 33년간 사목하다가 1929년 3월 12일에 선종했다.

 

8) 《서한집》의 해제에서는 강도영 신부의 활동에 초점으로 맞춰 서한집의 내용을 본당 관련, 교구 관련, 사회 관련으로 구분하여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는 강도영 신부의 사목활동을 시기별로 구분하고 미리내 본당의 초기 역사 과정에 초점을 맞추겠다.

 

9) 서한집은 1부 번역본, 2부 라틴어 판독본, 3부 부록으로 구성되어 있다. 수록된 서한 132통은 시기별로 배치되었으며, 각 서한마다 ‘분류번호’가 병기되어 있다.

 

10) 이석원, <미리내 본당의 변모와 역사적 의의 - 본당 교세 및 관할 공소 변화를 중심으로 ->, 《교회사학》 5, 수원교회사연구소, 2008 참조.

 

11) 박해 시기 이래 신자들이나 신자 마을을 괴롭히는 사건들이 종종 일어나기도 했고, 반대로 1886년 한불조약으로 선교사의 국내 거주와 활동이 허용된 이후 서양인 신부나 주교의 이름을 팔아서 이익을 꾀하려는 무리들도 나타나 교회의 명성에 먹칠을 하곤 했다. 따라서 가난하고 힘없는 신자들을 위해 신부가 발 벗고 나서서 해결을 해줘야 했으며, 불량한 신자들을 훈계하거나 처벌을 해야 했다.

 

12) 2012년 분도출판사에서 번역 간행한 《고요한 아침의 나라》의 내용을 옮긴 것이다.

 

13) 왕림 본당의 알릭스 신부, 르각 신부, 김원영 신부, 하우현 본당의 샤플랭 신부, 르각 신부, 페랭 신부, 윤예원 신부, 압고지 본당의 정규량 신부 등이 강도영 신부와 함께 사목 활동을 했었다.

 

[교회사 연구 제48집, 2016년 6월(한국교회사연구소 발행), 이석원(수원교회사연구소 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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