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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사목] 영화 속 인간과 세상: 누군가에게 조종당한다는 것은? 컨트롤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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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4-25 ㅣ No.1000

[영화 속 ‘인간과 세상’] 누군가에게 조종당한다는 것은? 컨트롤러

 

 

SF, 액션, 로맨스 / 멜로 / 2011.03.03 개봉 / 12세 이상 관람가 / 105분 / 감독 조지 놀피.

 

 

할 말을 잊게 하는, 뻔뻔한 거짓말과 고대 무속 신화 같은 막장 드라마가 그것도, 대통령을 주인공으로 펼쳐지고 있는 2016년 가을의 대한민국. 어떤 소설과 영화가 이보다 더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을까. 아무리 제멋대로라지만 상상력도 ‘상식’과 ‘보편적 가치’ 위에서나 가능한 법.

 

이런 참담한 현실 때문에 새삼 떠올린 영화 <컨트롤러>. 살아가면서 당신은 한 번쯤 이런 의문을 품어 본 적이 있는가. “나의, 아니면 저 사람의 삶이 누군가에 의해 모두 조종당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고.

 

많은 영화가 “그럴지도 모르지.”라고 이야기한다. 게임의 주인공이 되어 화면 속에 들어가 전투를 펼치는 ‘모션 컨트롤러 시대’는 이미 지났다. 인간의 감정까지 읽어내 조종하는 ‘이모션 컨트롤러 시대’이다. 누군가 내 꿈속에 들어와 조작하는 일도 얼마든지 가능해질 수 있다.

 

아예 존재 자체를 다른 사람에게 강탈당하는 〈본 아이덴티티〉와 <언노운〉 같은 영화들도 있다. 물론 상상이지만 자신 있게 허구라고 말할 수 있을까. 자신 없다. 지금은 더더욱. 단지 우리가 모르고 있었을 뿐, 지금 우리는 그런 사람이 대통령인 나라에 살고 있다.

 

이런 영화들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해 되묻는다.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는 인간은 누군가 내 삶을 침범하지 않을까 불안하다. 그 불안은 어떤 존재가 내 삶을 모두 조종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의심으로 연결된다. 〈인셉션〉처럼 꿈속에서 다시 꿈을 꾸고, 꿈속의 상황을 누군가 조작하는 일이 터무니없다는 것을 알지만,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내 꿈까지 조종하고 있다는 느낌.

 

삶이 자유의지의 산물임을 인식하고, 그것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지극히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누군가에 의해 자신의 삶이 조종당하는 것을 끔찍이 싫어한다. 조지 놀피 감독의 <컨트롤러>도 그런 인물이 주인공이다.

 

이 영화의 원작인 <조종팀>을 쓴 필립 K. 딕은 아이작 아시모프처럼 외계인의 존재나 우주전쟁, 로봇이 지배하는 세상을 상상하지는 않는다. SF명작으로 꼽히는 리틀리 스콧 감독의 〈블레이드 러너〉의 원작인 소설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나 영화 〈토탈리콜〉의 원작인 <도매가로 기억을 팝니다> 등에서 보듯, 그는 전쟁이나 오염으로 삶이 혼란스러운 세상을 이야기한다.

 

소설 〈조종팀〉도 마찬가지다. 조정국의 요원들이 자신들만의 비밀통로를 통해 공간이동을 하면서 주인공의 일과 사랑, 미래를 감시하며 그의 행동을 조종하고 통제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역할을 빼고는 특별하지 않다. 냉혹하거나 잔인하지 않고 실수도 하고 인간적인 감정도 드러낸다.

 

조지 놀피 감독은 이 소설을 더 극적인 영화로 만들기 위해 보험회사 세일즈맨인 주인공을 장래가 유망한 젊은 하원의원 데이비드(맷 데이먼)로 바꾸고, 무용수 엘리스(에밀리 블런트)를 등장시켜 일과 사랑 사이에서 인간의 자유의지를 시험했다.

 

그 시험은 선거운동 도중에 학창시절 악행이 밝혀져 낙선이 확실시되자 패배 연설을 준비하기 위해 화장실에 들어간 데이비드가 엘리스를 보고 첫눈에 반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물론 조정국에서 계획한 ‘단 한번 만남’이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엘리스와 다시 만나고 싶고, 가까워지고 싶지만 뭔가 잘 되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어떤 존재가 방해하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

 

그 느낌은 맞다. 데이비드와 엘리스 사이의 사랑은 조정국이 계획한 미래가 아니기 때문이다. 누구라도 자유의지를 고집해 자신들이 만든 미래 설계대로 움직이지 않으면, 요원들이 즉각 나타나 우연을 가장해 제자리로 돌려 놓는다. 데이비드에게도 그렇게 했다. 그런데 아뿔싸! 요원의 실수로 데이비드와 엘리스는 다시 만나고, 둘은 사랑의 감정을 확인한다.

 

그러자 조정국 요원들이 데이비드 앞에 직접 나타나 자신들의 존재를 설명하고는 ‘계획된 미래’로 가도록 강요한다. 엘리스와의 만남은 물론이고 과거 부모의 죽음, 대학진학과 정치적 성공과 실패, 심지어 친구들까지 그들의 조종에 의한 것이란 사실을 알게 된 데이비드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다. 순순히 그들을 따라 대통령이 되는 안전한 성공의 미래로 갈 것인가, 아니면 그들의 온갖 방해공작으로 실패할 확률이 큰 위험한 사랑을 고집할 것인가. 그는 고민한다.

 

데이비드는 우리를 대신해 인간의 진정한 존재가치가 어디에 있는지 보여 주려 했다. “중요한 건 내가 누구냐는 것이다. 나는 내 운명을 선택할 권리가 있고, 난 그녀를 선택했다.”고 소리친다. 조정국이 최후의 방법으로 엘리스의 미래를 가지고 데이비드를 협박하지만, 진정 그녀를 사랑하는 그의 마음까지 바꾸지는 못한다. 그 마음으로 인간은 스스로 운명을 개척하는 존재이니까.

 

<컨트롤러>는 왜 누군가가 사람의 현재는 물론 미래까지 하나하나 계획하고 통제한다고 상상했을까. 일종의 인간사회에 대한 비판이자, 자유의지에 대한 불신이다. 인간은 그동안 자유의지를 올바르게 사용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전쟁과 학살, 부패와 차별을 반복한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이성으로 욕망을 통제하지 못하는 인간에게 자유의지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인간은 여전히 중요한 결정을 하기에는 미숙한 존재이지만, 스스로 그 과정을 통해 성장하고 발전한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원동력은 ‘사랑’이다. 순수한 마음과 의지로 누군가를 진실로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자유의지가 아니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자유의지가 없는 인간은 로봇이나 인형과 다름없다. 그래서 누군가 그것을 뺏으려 한다면 그가 외계인이든, 초능력을 가진 조정자든, 사이비 교주든 데이비드처럼 용감히 맞서 지켜야 한다. 그들이야말로 ‘악마’의 다른 모습이며, 인간의 삶과 미래는 자신이 직접 계획하고 만들어야 가치가 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도 우리를 조종하는 대로 움직이는 ‘로봇’이 아닌, 자유의지를 가진 피조물로 창조하셨다.

 

대한민국을 분노와 절망과 치욕에 빠뜨린 ‘최순실 - 박근혜 게이트’도 결국 사악한 ‘컨트롤러’와 그 밑에서 자유의지를 포기한 대통령과 하수인들의 짓이다. 그렇게 외치던, 국가와 국민에 대한 ‘사랑’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었다면. 그나마 그 자유의지가 우리 국민들에게는 살아 있음이 다행스럽고, 자랑스럽다.

 

[평신도, 2016년 겨울(계간 54호), 이대현 요나(국민대 겸임교수 ·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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