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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ㅣ 봉헌생활

수도원 뜨락에서: 기도하고 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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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3-17 ㅣ No.582

[수도원 뜨락에서] 기도하고 놀자

 

 

우리의 기도는 하느님의 ‘일’

 

‘기도하고 일하라.’(Ora et labora)라는 베네딕토회의 모토가 말해주듯이 베네딕토 수도원에서는 기도를 가장 으뜸가는 일로 내세운다. 특히 공동기도는 ‘하느님의 일’(Opus Dei)이라고 부르며 “아무것도 하느님의 일보다 낫게 여기지 말아야 한다.”(성 베네딕토의 「수도규칙」 43,3)고 더욱 강조한다. 기도를 왜 일이라고 불렀을까 싶었는데, 새벽부터 밤까지 하루에 일곱 번씩 성당을 오가며 살아보니 기도도 정말 ‘일’이다. 좋아서 하는 기도니 ‘하느님의 일’에 참여할 때 마음이 설레고 행복할 것 같지만, 실상은 하루하루 성당과 일터를 무덤덤하게 오간다.

 

같이 사는 형제들을 보아도 딱히 나만 그런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가끔 비몽사몽으로 아침기도를 드리다보면, 나도 모르게 손목의 힘이 스르르 빠지면서 기도책이 자유 낙하를 하는 때가 있다. 떨어지는 책을 고양이처럼 잽싸게 받아내고 나면 정신이 번쩍 든다. 등줄기가 서늘해지고 ‘이러다 한번 망신당하겠다.’는 생각에 고개를 흔들고 자세를 고쳐 잡는다.

 

혹시 내가 조는 모습을 누가 눈치챘을까 하여 살며시 주위를 둘러보면 겟세마니 동산에서 기도하던 제자들 같은 모습의 수사님들도 몇몇 보인다. 이마에 무거운 추를 달아놓은 듯 고개를 떨구고 계신 수사님, 그네를 타듯 상반신을 앞뒤로 흔들고 계신 수사님, 어항 속 수초처럼 몸이 이리저리 흔들리는 수사님. 그 모습을 보니 웃음이 나면서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인사불성으로 베드로 사도 가 된 것 같던 내 기분(?)은 약간의 ‘안도감’으로 바뀐다. 

 

신자석을 둘러보다가 꼿꼿한 자세로 기도를 바치던 신자들의 말똥말똥한 눈들과 마주치기라도 하면 부끄러워져 얼굴이 화끈거린다. “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따르지 못하는”(마르 14,38) 우리 모습을 다 들켜버렸으니 신자들이 얼마나 실망할까 싶어서다. 다행히도 수도원을 찾아오는 사람들은 우리의 나약하고 인간적인 모습에 별로 실망하지 않는 것 같다. 기도할 때 졸기도 하고 음도 자주 틀리는데, 방문객들은 그래도 날마다 우리가 함께 기도하는 모습에서 큰 위안을 얻는다고 한다.

 

격려 차원의 인사말일 수도 있겠지만, 해마다 수도원에 피정하러 오시는 것을 보면, 함께 기도하면서 우리의 능력을 넘어선 무엇인가를 해내고 있었다는 자각이 든다. 대단한 감동은 없어도 이렇게 날마다 우직하게 하느님을 삶의 중심에 놓고 생활하니 적어도 가시적으로나마 ‘기도하는 교회’의 모습을 세상에 드러내주었던 것 같다. 우리의 보잘것없는 기도가 정말 ‘하느님의 일’이었던 것이다.

 

 

수도원에서 기도하고 일한다는 것은

 

기도도 일은 일이지만, 노동은 진짜로 일이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입구 위에 붙어있는 구호 곧 “노동이 자유롭게 하리라.”(Arbeit macht frei) 같은 그런 끔찍한 느낌의 일은 물론 아니다. 하지만 실제 일터는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 아무리 트랙터와 첨단 농기계를 이용하고 일꾼도 사서 쓴다고 해도 이만 평이나 되는 배밭의 책임을 맡은 두세 명이 가꾸고 돌본다는 것은 육체적으로 힘에 부치는 일이다.

 

게다가 모든 일과표도 일보다 기도 중심으로 돌아가니, 일의 흐름도 자주 끊기고 결과적으로 능률도 떨어지고 생산성도 줄어든다. 하지만 이런 것은 괜찮다. 힘들면 일을 줄이면 되고, 일이 줄어서 수입이 줄면 지출도 줄이면 된다. 그래서 기도할 수 있는 시간이 보장되고, 형제들이 일 때문에 몸과 마음이 지쳐 쓰러지는 일만 없다면, 노동은 얼마든지 줄일 수 있다.

 

베네딕토 성인은 「수도규칙」 ‘제48장 매일의 육체노동에 대하여’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한가함은 영혼의 원수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은 정해진 시간에 육체노동을 하고 또 정해진 시간에 성독(聖讀)을 할 것이다”(1). “자신의 손으로 노동함으로써 생활할 때 비로소 참다운 수도승들이 되기 때문이다”(8). 이처럼 직접 노동을 하든 성경 묵상을 하든 좌우지간 수도자는 ‘일’을 해야 한다.

 

그런데 이런 권고도 하셨다. “만일 누가 너무나 무관심하고 게을러서 공부나 독서를 하려고 하지 않거나 할 수 없거든, 그런 사람에게는 할 일을 맡겨 놀지 못하게”(23)하고, “병들거나 허약한 형제들에게는 한가하지도 않고 과도한 일에 짓눌려 도망치지 않을 정도의 일이나 기술을 맡겨라”(24). 여기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가 수도원에서 하는 일은 모두 ‘하느님을 찾는’(Quaerere Deum) 방편이다.

 

이런 것을 모르고 수도원에 들어오면, 일 때문에 생활에서 많이 걸려 넘어진다. 요령을 피우며 힘든 일은 요리조리 다 피해가는 ‘뺀질이’가 되거나, 주인의식 없이 시키는 일만 하며 불만 가득한 ‘노예’가 된다. 아니면 일의 목적을 잊어버리고 일 자체에 함몰되어 더 중요한 일을 생각할 여유가 없는 ‘일 중독자’가 되기 일쑤이다.

 

수도원 노동의 진짜 어려움은 노동 자체가 아니라 노동에서 따라오는 “순명과 모욕을 참아 받는 데”(「수도규칙」 58,7) 있는 것 같다. 일이 힘든 게 아니라 같이 일하는 사람 때문에 힘들다는 뜻이다. 사회 같으면 돈을 벌기 위해서라도 참고, 정 못 참으면 서로 안 볼 수도 있다. 아니면 아예 일자리를 옮길 수도 있지만, 수도원에선 죽을 때까지 서로 끌어안고 살아가야 한다. 이 일이 수도생활에서 겪게 될 진짜 ‘일’이다.

 

그래서 누가 수도원에 들어오려고 하면 “하느님께 나아가는 길에서 당하게 될 모든 어려움과 시련들을 그에게 미리 알려”(「수도규칙」 58,8)주라고 한다. 그러니까 수도원에서 ‘기도하고 일한다.’는 것은 공동체 안에서 공동기도에 열심히 함께하고 공동체 형제들과 마음 맞춰 무슨 일이든 자발적으로 열심히 하는 것이다. 이런 것이 바로 수도자가 “참으로 하느님을 찾는지”(「수도규칙」 58,7)를 알아보는 표지가 된다.

 

 

‘기도하고 놀자’의 시대

 

기도하고 일해야 된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기도와 일이 조화를 이루어 “모든 일에 있어 하느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도록”(ut in omnibus glorificetur Deus) (「수도규칙」 57,9) 하려면 ‘빈틈’이 필요하다. 우리가 하는 일이 노력에 비해 사랑의 열매를 자주 맺지 못하는 까닭은 ‘쉴 틈’, ‘놀 틈’이 없기 때문일지 모른다. 휴식과 여유를 주는 ‘빈틈’이 없으면 열정은 브레이크가 고장 난 자동차처럼 되어버리기 쉽다.

 

곧 해야만 하니까 하는 것이지 무엇을 위해서 또는 무엇 때문에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잊어버린 채 무조건 열심히만 하게 된다. 우리가 그랬다. 수도원을 찾는 신자들이 언제라도 수사들의 기도 소리를 들을 수 있게 공동기도를 사수했고, 골병이 들지언정 해야 될 일들은 무조건 다 끝내야 했다.

 

그 결과 ‘기도하고 일하라.’는 되는데 이것이 점점 힘드니까 자꾸만 서로 원망하는 마음이 생겼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이란 말처럼 지나침은 미치지 못함과 같다. 기도도 빠져보니 기도의 힘을 새롭게 느낄 수 있음을 작년부터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이어져온 민중총궐기 촛불집회에 공동체 형제들과 참석하면서 깨달았다. 배밭에서 오로지 기도하고 일만 하던 수사님들이 토요일마다 촛불을 들고 뿔 나팔을 불며 청와대로 행진하였다.

 

당연히 그 시간 수도원 전례는 매우 썰렁할 수밖에 없었지만, ‘박근혜는 하야하라.’라는 피켓으로 우리 모두는 하나가 되었다. “수도원까지 왜 그러냐?” “너무 심한 것 아니냐?”는 소리가 들려올 때는 정말 수도원이 너무 앞섰나 하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동안 너무 수도원 안에만 있었으니 이 기회에 좀 많이 나가보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늘 관념적으로만 생각했던 예언자직을 우리 형제들이 실제로 거리에서 실천해 본 뒤로는 공동체 결속이 더욱 강해졌다는 느낌이 든다. 모두 기도와 일을 불평 없이 더욱 자발적으로 열심히 하는 것 같다. 사회와 연대한다고 수도원 안에서 하는 기도가 좀 소홀해져 원장으로서 늘 마음이 찜찜했는데, 기대치 않던 선물을 받은 느낌이다.

 

기도하고 일하라고 해서 정말 기도만 하고 일만 하는 것은 아니다. 1월에는 강원도 화천의 산천어 축제에 공동체 소풍도 다녀왔다. 수도원에 성소자 한 명, 지원자 한 명 없을 정도로 “사람 낚는 어부”(마르 1,17)에는 젬병인 우리이지만, 진짜 물고기는 다들 얼음구멍에서 잘 건져올렸다. 낚싯줄에 걸린 물고기를 손에 번쩍 든 수사님들의 얼굴이 천국을 낚아챈 어린이들처럼 행복해 보였다.

 

형제들과 잡은 고기를 회로도 먹고 구워도 먹으며 소주잔을 부딪치며 생각했다. ‘기도하고 일하라.’(Ora et labora)의 시대는 가고, ‘기도하고 놀자.’(Oremus et ludamus)의 시대가 왔다고.

 

어제에 사는 사람은 우리를 ‘박근혜 퇴진’을 외친 촛불시민 또는 ‘종북좌파’로 볼 것이고, 내일에 사는 사람은 우리더러 ‘기도하고 일하는 수도승이 되어야지 지금 뭐하는 것이냐?’며 걱정하는 말을 하겠지만, 오늘을 사는 우리는 하느님 안에서 세상모르고 즐겁게 노는 행복한 가족일 뿐이다.

 

* 최종근 파코미오 - 성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에 입회하여 1999년 사제품을 받았다. 교황청립 성안셀모대학에서 전례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지금은 성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원장을 맡고 있다.

 

[경향잡지, 2017년 3월호, 글 최종근 · 그림 김선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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