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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복시성] 조선 왕조 · 근현대 순교자 214위 시복시성을 향해(시복 추진 법정 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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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2-21 ㅣ No.1603

조선 왕조 · 근현대 순교자 시복 법정 연다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 · 홍용호 주교와 동료 80위

 

 

하느님의 종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와 하느님의 종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의 시복을 위한 법정이 열린다. 

 

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위원장 유흥식 주교, 이하 시복시성특위)는 2월 9일 서울 중곡동 천주교중앙협의회 제2소회의실에서 조선 왕조 순교자 133위와 근현대 신앙의 증인 81위 시복 추진에 대한 예비심사 관여자 회의를 열고, 오는 2월 22일 두 사안의 예비심사를 시작한다고 밝혔다. 

 

시복시성특위는 이날 시복 법정 개정을 위한 준비, 특히 1월 21일 발표된 ‘안건 착수와 법정 구성 교령’을 확인했다. 이어 위원장 유흥식 주교는 교령에 서명을 마쳤다. 교령 내용은 2월 22일 법정에서 공개된다.

 

- 이벽 요한 세례자.

 

 

이로써 주교회의가 2009년 추계 정기총회에서 조선 왕조 치하의 순교자와 증거자와 한국교회의 근현대 신앙의 증인에 대한 시복 조사를 추진하기로 결정한 지 8년 만에 총 214위 순교자에 대한 시복재판을 시작하게 됐다.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는 조선 왕조 치하에서 신앙을 위해 목숨을 바친 순교자들이다. 초기 교회 공동체에서 주요 역할을 하다가 1785년 순교한 이벽을 비롯해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 권철신(암브로시오) 등이 133위에 포함됐다.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는 근현대 신앙의 증인들로서, 1901년 제주교난과 한국 전쟁 직후 공산당의 박해로 순교했다. 이들 중에는 20명의 외국인 선교 사제와 3명의 외국인 수녀도 포함돼 있다.

 

하느님의 종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 시복 안건 소송을 위한 청원인은 김종강 신부(청주교구)이며, 재판관 대리로는 박동균 신부(서울대교구)가 임명됐다. 검찰관과 공증관에는 각각 최인각 신부(수원교구)와 시복시성특위 연숙진 간사가 임명됐다.

 

하느님의 종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 시복 안건 소송을 위한 청원인은 시복시성특위 총무 류한영 신부(청주교구)이며, 재판관 대리로는 박선용 신부(서울대교구)가 임명됐다. 검찰관은 이정주 신부(광주대교구)이며, 공증관은 시복시성특위 장후남 간사다. [가톨릭신문, 2017년 2월 19일, 최용택 기자]

 

 

조선 왕조 · 근현대 순교자 214위 시복시성을 향해 (상) 하느님의 종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


신앙의 씨앗 이 땅에 심은 한국교회 초석들

 

 

2월 22일 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위원장 유흥식 주교, 이하 시복시성특위)는 ‘하느님의 종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와 ‘하느님의 종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에 대한 예비심사를 시작한다. 조선시대와 근현대 순교자 214위에 대한 지역교회 차원의 시복재판이 시작되는 것이다. 2009년 주교회의가 ‘조선 왕조 치하의 순교자와 증거자’, ‘한국 교회의 근현대 신앙의 증인에 대한 시복 조사’를 추진하기로 한지 8년 만에 이뤄낸 쾌거다. 이와 때를 맞춰, 본지는 두 차례에 걸쳐 순교자들의 면면과 이들의 시복시성을 위한 그동안의 노력 및 절차를 확인하고, 향후 전망을 고찰한다.

 

 

한국교회는 1984년 ‘한국 103위 순교 성인’이 시성되고 2014년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123위’가 시복되는 기쁨을 맛봤다. 하지만 103위 시성과 124위 시복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 초석으로 신앙의 모범을 보였던 초기 순교자들은 시성 및 시복은 이뤄지지 못했다. 

 

이에 주교회의는 2009년 추계 정기총회를 통해, ‘조선 왕조 치하의 순교자와 증거자’와 ‘한국 교회의 근현대 신앙의 증인’에 대한 시복 조사를 추진하기로 결정했다. 이후 주교회의는 각 교구에서 제출한 자료를 바탕으로 시복 추진 대상자를 추려 133위를 결정했다.

 

이어 주교회의는 2013년, 새로 추진하는 시복시성 안건의 제목을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로 결정했다.

 

이번에 시복재판을 시작하는 조선 왕조 순교자 133위에는 조선 초기 순교자부터 교회의 박해가 끝나가던 병인박해 막바지에 순교한 이들까지 포함됐다. 

 

박해의 광풍이 가장 극심했던 병인박해(1866~1874) 순교자가 91명으로 가장 많다. 신유박해(1801~1802) 순교자는 19명으로 그 뒤를 이었다. 앵베르 주교와 모방·샤스탕 신부가 순교했던 기해박해(1839~1841) 순교자는 10명이며, 박해가 거의 끝나가던 무인-기묘박해(1878~1879) 순교자 4명도 포함됐다.

 

출신지별로는 대전교구 출신 순교자들이 35명으로 가장 많고, 서울대교구와 수원교구가 각각 27명과 23명으로 그 뒤를 따랐다. 청주교구 출신은 16명이다.

 

133위 순교자 중에는 귀족과 평민, 장애인 등 우리 삶에서 만날 수 있는 모든 계층의 사람이 포함돼 있다. 송 마리아와 신 마리아는 왕족이었으며, 전 야고보는 시각장애인이었다. 이들은 조선시대 당시 다양한 삶의 현장에서 신앙을 증언했으며, 그러한 삶은 신앙의 보편성과 정수를 잘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이벽 요한 세례자

 

조선 왕조 순교자 133위 중 대표인물은 이벽(요한 세례자)이다. 이벽은 18세기 조선 서학(西學)사상과 초기 천주교를 논할 때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서양문물에 능통했던 그는 서학의 배경에 천주교가 있음을 알았다. 

 

이벽은 권철신(암브로시오)과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이승훈(베드로), 정약용(요한), 정약종(아우구스티노) 등과 함께 천진암 강학회에서 신앙을 탐구했다. 이들은 강학회를 통해 동양의 종교와 사상을 천주교와 비교하며 천주교 신앙에 눈을 뜰 수 있었다. 

 

서학이 신앙으로 발전된 데에는 이벽의 공이 컸다. 그는 서학이 단지 학문이 아니라 다른 차원의 것이며, 믿고 실천하고 깨달아야 할 인생의 진리이자 영원한 생명의 진리임을 깨달았던 것이다. 정약종(2014년 시복)을 제외한 이들 신앙의 선조는 모두 이번 예비심사 대상자 133위 안에 포함되어 있다.

 

이후 이벽 등 신앙의 선조들은 이승훈에게 북경의 선교사를 만나 천주교 서적을 구해다 줄 것을 요청했다. 이승훈은 북경의 북당성당에서 그라몽 신부에게 세례를 받은 뒤, 관련 서적과 성물을 갖고 조선으로 돌아왔다. 당시 이벽은 서울 수표교 자신의 집에서 서적들을 더 열심히 읽고 공부한 뒤 선교에 나섰다. 마침내 수표교 인근 이벽의 집에서 이벽과 권일신이 이승훈으로부터 세례를 받음으로써 조선에 교회가 설립됐다. 조선 땅에서 처음으로 세례로 결속된 천주교 신앙공동체를 이뤄낸 것이다.

 

이벽은 동료들과 함께 교리를 전하는 데 더욱 열중했다. 이후 김범우(토마스)와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 그리고 유항검(아우구스티노) 등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또 김범우의 집이 있던 명례방에서 신앙 공동체 모임을 지속했다.

 

하지만 을사추조적발사건으로 명례방 모임이 발각되자, 이들은 유배나 배교를 강요당했다. 이벽도 부친에 의해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고 집 안에 갇힌 상태가 된다. 외부와의 접촉이 완전히 끊긴 채 이벽은 가족으로부터 배교를 강요받았다. 가족의 박해가 계속되자 이벽은 스스로 식음을 전폐하고 기도에 열중했다. 결국 그는 가족의 박해로 1875년 31세의 젊은 나이에 죽음을 맞이했다. 

 

이벽의 죽음에는 여러 설이 존재하고, 파리외방전교회 달레(Dallet) 신부는 「한국천주교회사」에서 그가 배교했다고 단정하기도 했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이벽이 조선 초기 교회의 기둥으로서 적극적으로 교리를 연구하고 가르쳤다는 것이다. 이벽은 자신이 가르치고 배운 것을 흐트러짐 없이 실천하고 양반 가문의 자제로서 할 수 있는 자신의 방법으로 신앙을 지키다 목숨까지 내놓았다.

 

 

지난 과정과 앞으로의 전망 

 

주교회의가 ‘조선 왕조 치하의 순교자와 증거자’ 시복추진을 결정한 이후, 각 교구는 조선 초기 교회에서 신앙의 모범을 보인 수많은 순교자 중 대상자를 선별했다. 대상자 선정은 오랜 시간에 걸쳐 조심스럽게 진행됐고, 사전 평가를 거쳐 133위가 결정됐다.

 

2013년 3월, 시복시성특위는 ‘역사 및 고문서 전문가위원회’를 구성하고 위원들을 임명했다. 이들은 12차례의 회의를 통해, 선별된 순교자에 대한 본격적이고 심층적인 연구를 진행했다. 이 과정에서 전문가들은 순교자들의 삶의 굴곡과 요소를 여러 각도에서 빈틈없이 검토했다. 논란과 이견의 소지를 보이는 대상자에 대해선 교차연구를 거듭했고,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면밀히 보고했다.

 

- 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는 2월 22일 ‘하느님의 종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와 ‘하느님의 종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에 대한 예비심사를 시작한다. 사진은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거행된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시복식.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그 사이, 주교회의는 2014년 추계 정기총회에서 ‘하느님의 종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 시복 추진 안건 담당 청원인으로 김종강 신부(청주교구 · 대전가톨릭대학교 교수)를 임명했다. 이어 2015년에는 조선왕조 순교자 133위의 약전을 교황청 시성성에 제출됐다. 이어 2016년 10월 5일 시성성으로부터 ‘장애없음’ 교령을 받았다. 

 

시성성의 ‘장애없음’ 결정으로 한국교회는 본격적으로 133위의 시복을 위한 예비심사를 착수할 수 있게 됐으며, 그 첫 법정이 2월 22일 열린다. 이제 한국교회는 이들 순교자들이 보여줬던 신앙의 증거를 찾고 판단하는 작업을 해야 한다. 지난 2014년 시복됐던 124위의 시복재판은 2004년 7월 5일에 시작해 2009년 5월 20일 마무리됐다. 이어 시성성의 재판문서 검토와 시복결정까지 5년이 더 걸렸다. 

 

133위에 대한 재판 또한 간단하지 않고 긴 시간과 복잡한 과정을 거치게 된다. 저작물에 대한 출판 저작물 검열, 법정에서의 자세한 검증의 시간, 학자들의 증언 및 검찰관의 부정적인 증언까지 종합해 재판문서를 작성하게 된다. 특히 초기 교회공동체가 시작되는 과정에서 주요한 역할을 했던 이벽 선조의 순교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는 만큼, 추후 재판 과정을 통해 검증과 추가 연구 등을 실시할 계획이다. 

 

시복시성특위 위원장 유흥식 주교는 “예비심사는 순교자들의 영웅적인 삶을 구체적으로 검증하는 일로, 장하신 순교자들의 순교를 정확한 사실에 입각해 증명하는 일이 계속 될 것”이라고 밝혔다. 유 주교는 아울러 “보다 중요한 일은 순교자들의 후손인 우리들이 그분들의 믿음과 삶이 일치했던 모습을 본받는 일”이라면서 “그분들의 믿음과 삶을 본받으려 노력하면서 끊임없이 기도해 달라”고 당부했다. [가톨릭신문, 2019년 2월 19일, 최용택 기자]

 

 

조선 왕조·근현대 순교자 214위 시복시성을 향해 (하) 하느님의 종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

 

공산정권 위협에도 교회 수호하며 신앙 증거

 

 

- ‘하느님의 종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 대다수는 6·25 한국 전쟁 중 순교했다. 한국교회 역사상 가장 최근에 순교한 이들로 ‘근현대 신앙의 증인들’이라고도 부른다. 사진은 홍용호 주교와 사제단.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 평양교구 제공.

 

 

‘하느님의 종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 대다수는 6·25 한국 전쟁 중에 순교했다. 한국교회 역사상 가장 최근에 순교한 이들로서 ‘근현대 신앙의 증인들’이라고도 부른다. 2월 22일 열린 이들의 첫 예비심사를 계기로, 본지는 근현대 순교자들의 장한 삶과 이들의 시복시성 재판을 위한 지난 과정을 알아보고, 향후 전망을 조망한다.

 

 

근현대 신앙의 증인 81위

 

‘하느님의 종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의 시복 추진은 지난 2009년 주교회의 추계 정기총회에서 결정됐다. 당시 주교회의는 ‘조선 왕조 치하의 순교자와 증거자’와 ‘한국교회의 근현대 신앙의 증인’에 대한 시복조사를 추진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주교회의는 각 교구로부터 시복 조사 자료를 접수하기 시작했으며, 근현대 신앙의 증인 자료를 신청한 교구 담당자들은 2009년 12월 10일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에서 첫 회의를 열었다. 이후 2012년 10월까지 8차례의 선정위원회 회의를 거쳐, 주교회의 시복시성특별위원회(위원장 유흥식 주교, 이하 시복시성특위)에 상정할 시복 대상자를 선정했다.

 

이어 2013년 주교회의 춘계 정기총회에서는 ‘한국교회의 근현대 신앙의 증인’ 시복 추진 안건의 제목을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로 확정했다. 이들은 1901년 제주교난 순교자와 6.25 한국 전쟁 전후 공산당의 박해로 목숨을 잃은 순교자들이며, 20명의 외국인 선교 사제와 3명의 외국인 수녀가 포함됐다. 주교 2명과 사제 48명, 신학생 3명, 수녀 7명, 평신도 21명으로 신분도 다양하게 분포돼 있다. 

출신지별로는 평양교구가 24명으로 가장 많고, 서울대교구가 22명, 대전교구 15명, 춘천교구 7명, 광주대교구가 5명으로 그 뒤를 따른다. 수원교구와 인천교구, 제주교구 출신은 각 1명이며, 샬트르성바오로 수녀회 2명, 서울가르멜수녀회 2명, 영원한도움의성모수도회 1명이 포함된다. 

 

근현대 신앙의 증인 81위에는 외국인 신부와 수녀들도 다수 포함돼 있다. 메리놀외방선교회의 패트릭 번(Patrick Byrne, 한국명 방일은) 주교와 성골롬반외방선교회 소속 사제 7명, 파리외방전교회 사제 12명, 서울가르멜수녀회 2명, 샬트르성바오로수녀회 1명이 바로 그들이다.

 

 

홍용호 주교

 

- 홍용호 주교.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 평양교구 제공.

 

 

근현대 신앙의 증인 81위 중 대표인물은 홍용호 주교다. 홍용호 주교는 해방 뒤 북한 지역을 점령한 공산정권이 점차 교회의 목을 조여 오는 가운데에서도, 교회 수호를 위해 서슴지 않고 목소리를 높였던 용감한 목자였다.

 

홍 주교는 1906년 평안남도 평원군 한천면에서 태어났다. 1920년 서울의 용산 성심학교에 입학했으며, 1933년 사제로 서품됐다. 홍 주교는 일제 말기인 1943년 3월 9일 제6대 평양대목구장으로 임명되고, 3월 21일에 착좌했다. 이듬해 주교로 서품된 홍 주교는 선교에 대한 남다른 열성으로 사제성소와 수도성소 계발에 온 힘을 쏟았다.

 

그는 어린이들을 특별히 사랑했으며, 가난한 이웃들과 친교를 나눠, 신자들은 그를 그리스도께서 바라시는 ‘착한 목자’의 표본이라고 평했다. 

 

하지만, 해방 후 공산화로 치닫던 북한은 차츰 교회건물을 빼앗고, 성직자·수도자들을 박해하기 시작했다. 홍 주교는 시시각각으로 조여 드는 공산세력의 위협에, 신자들에게 교구의 안녕을 위한 기도를 요청하기도 했다. 또한 메리놀회 사제들의 본국 송환으로 교구 사목이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평양교구 주교좌성당을 완공시키는 등 교회 수호를 위한 투지를 불사르기도 했다.

 

교회를 박해하던 북한 정권은 1948년 덕원수도원을 폐쇄하고 교회 모든 기관과 성당을 몰수하고, 성직자와 수도자를 체포하기에 이르렀다. 홍 주교는 이에 대항해 “한국에서 40여 년간 농업·교육·과학·문화 등의 발전에 허다한 공헌을 한 선교사들의 체포는 불법이며, 교회를 폐쇄한 것은 확실한 종교박해로서 북조선정권의 헌법위반”이라면서, “체포된 전원을 무조건 석방하고 교회를 즉시 개방하라”는 내용의 항의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북한 당국은 1949년 5월 14일 눈엣가시 같았던 홍 주교를 납치했다. 당시 홍 주교는 서포에 있는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를 찾아 첫 종신서원 예정자를 면담하고 귀가하던 중이었다. 

 

한편 교황청은 2013년 교황청 인물연감을 통해 그의 사망을 공식 인정해, 홍 주교의 시복시성을 위한 발판을 마련해줬다. 그동안 교황청은 홍 주교를 ‘실종’ 상태로 간주했지만, 2013년에는 평양교구장을 공석으로 비워둠으로써 홍 주교의 사망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홍 주교의 사망 인정으로 그의 시복 절차를 ‘장애 없이’ 진행할 수 있게 됐다. 시성절차법상 사망이 확인되지 않으면 시복 후보자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초대 교황사절 패트릭 번 주교

 

- 패트릭 번 주교.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평양교구 제공.

 

 

이번 예비심사 대상자에는 또 한 명의 주교가 포함돼 있다. 바로 대한민국 정부 수립 당시 초대 교황사절로 임명돼, 남한 정부의 합법성을 선포한 패트릭 번 주교다.

 

1888년 미국 워싱턴에서 태어난 번 주교는 1915년 사제품을 받고 메리놀외방선교회에 입회했다. 해외선교를 꿈꿨던 그의 한국행은 1922년 11월 메리놀회가 교황청 포교성성(현 인류복음화성)으로부터 평안도 지역의 포교권을 위임받으면서 이뤄졌다. 그해 11월 당시 사제였던 번 주교는 한국지부장으로 선출돼, 이듬해 한국에 입국했다.

 

메리놀 선교사들의 활약으로 평안도 지역의 교세가 확장되자, 교황청은 1927년 3월 17일 평양지목구를 설정하고 초대 지목구장으로 번 주교를 임명했다. 하지만 이듬해 번 주교는 메리놀회 참사위원으로 뽑혀 지목구장을 사임하고 본국으로 귀국해야만 했다.

 

그렇게 번 주교와 한국과의 인연이 끊어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1947년 비오 12세 교황이 그를 초대 주한 교황사절로 임명하면서 인연은 다시 이어졌다. 번 주교는 그해 10월 9일 입국해, 한국이 합법적인 독립국가임을 인정하는 교황청 문서를 발표했다. 이듬해 12월 12일 유엔 총회에서 한국이 합법적인 독립국가로 정식 승인 받도록 적극적으로 노력했다. 

 

1949년 홍 주교가 불법 납치되는 등 북한 교회 상황이 악화되자, 번 주교는 북한의 종교 박해를 신랄히 비판해 북한 공산 정권으로부터 협박을 받기에 이르렀다. 이윽고 6·25전쟁이 발발하자 번 주교는 교황대사관을 지키다가 7월 11일 공산군에 체포됐다. 당시 번 주교는 서울 소공동 삼화빌딩에 감금됐다가 인민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다. 번 주교는 이후 평양감옥, 만포, 고산진, 초산진, 중강진 하창리 수용소를 잇는 ‘죽음의 행진’을 겪으며 극심한 고문과 수난을 당하다 1950년 11월 25일 62세 나이로 수용소에서 순교했다.

 

 

현 상황과 앞으로의 예비심사 전망

 

주교회의가 2013년 춘계 정기총회에서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 시복 추진 안건 제목을 결정한 후, 시복시성특위는 그해 3월 13일 81위 하느님의 종들에 대한 역사적 검토를 진행할 역사 및 고문서 전문가위원회를 구성하고 첫 회의를 진행했다. 역사 및 고문서 전문가 회의는 2015년 8월까지 총 9차례의 회의를 통해 이들의 순교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고찰했다. 

 

그 사이 주교회의는 2014년 추계 정기총회에서 ‘하느님의 종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 시복 안건 담당으로 대전교구 김정환 신부를 임명했다. 하지만 김 신부가 개인사정으로 사직해, 2016년 주교회의 춘계 정기총회에서 시복시성특위 총무 류한영 신부가 청원인으로 임명됐다. 시복시성특위는 2015년 7월 3일 교황청 시성성으로부터 ‘장애 없음’ 교령을 받아 예비심사를 준비할 수 있게 됐다. 

 

이번 예비심사 대상자들 대부분은 6·25 한국전쟁 전후에 순교했다. 이들의 죽음은 대부분 실증적인 확인이 어려운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전쟁 중에 피랍돼 ‘죽음의 행진’을 걸으며 죽어갔지만, 죽음 자체를 확인하기 어려운 사례가 많다. 북한의 공산정권이 이들 성직자와 수도자, 평신도들을 비밀리에 체포하거나 처형하며 이들의 죽음을 감췄기 때문이다. 

 

남북이 분단된 상황에서 이들의 성덕과 죽음의 증거를 수집하는 일에는 한계가 있을 전망이다. 당장 예비심사의 첫 단계로 진행될 현장조사에도 어려움이 있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는 비단 우리나라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근현대에 이념으로 처형된 사람들의 공통점이기도 하다. 교황청 시성성이 ‘장애 없음’ 교령을 보낸 것은 이 안건을 추진할 만한 타당한 근거가 있음을 동의한 것이라고 풀이된다. 교황청은 실증적 순교 사실이 확인되지 않더라도, 윤리적 확신으로 순교 사실을 확인할 수 있도록 허락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한국교회가 추진한 시복 안건들은 주로 조선 왕조 치하에서 박해로 목숨을 잃은 순교자 중심이었다. 이번 근현대 신앙의 증인 81위에 대한 예비심사 시작은 현재와 가까운 시대의 신앙 증인들의 모범을 본받고 그들의 전구를 청하는 데 그 의미가 있다. 

 

주교회의 시복시성특위 위원장 유흥식 주교는 “한국교회가 순교자와 신앙의 증인들을 시복시성하는 이유는 시복시성자를 늘리려는 차원이 아니다”라면서 “사회의 어둠과 아픔이 있는 곳에서 어떤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진리와 정의를 증거하고,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이들의 순교 정신을 따르기 위함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가톨릭신문, 2017년 2월 26일, 최용택 기자]

 

 

214위 시복, 본격 궤도에 오르다

 

시복 예비 심사 법정 개정, 근 · 현대 순교자의 첫 번째 시복 재판으로 의미

 

 

하느님의 종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 그리고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의 시복 추진 예비 심사 법정이 2월 22일 서울 중곡동 한국천주교중앙협회의 대회의실에서 열렸다. 

 

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 위원장이며 시복 재판관인 유흥식 주교는 시성 절차법에 따라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에 법정을 구성하고, 지역 교회에서 진행하는 예비 심사를 합법적으로 추진할 것을 교령으로 선포했다. 이날 법정 개정식에는 서울대교구장 염수정 추기경과 시복 대상자 소속 교구와 수도회 대표들이 참석, 재판 과정을 지켜봤다. 

 

이번 법정은 103위 성인과 124위 복자에 이어 조선 왕조 치하에서 순교한 이들의 마지막 시복 재판이다. 아울러 주교회의 차원에서 추진하는 근ㆍ현대 순교자의 첫 번째 시복 재판이다. 

 

시복 예비 심사 법정은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의 시복시성 소송 청원서 낭독, 교황청 시성성의 소송 추진 교령과 ‘장애 없음’ 발표로 막을 올렸다. 

 

이어 시복 소송 관할권자인 서울대교구장 염수정 추기경과 마산교구장 배기현 주교의 관할권 위임장 낭독, 법정 구성 교령 발표, 법정 구성원들의 직무 수락 서약과 서명 순으로 진행됐다. 

 

법정 구성원인 재판관과 재판관 대리, 검찰관, 공증관은 성경에 손을 얹고 공정한 재판과 비밀 유지 등 합법적으로 법정을 운영할 것을 선서하고 서약했다. 이어 재판관과 재판관 대리, 검찰관들은 각 시복 예심 청원인들이 제출한 증인 명단을 확인하고 승인했다. 

 

유흥식 주교는 “6ㆍ25 전쟁 전후 순교자들의 가해자인 북한 공산주의자들이 현존하고 있어 재판 과정에서 예상하지 못한 어려움이 닥칠 수 있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그럼에도 “정확한 조사와 심사를 통해 우리 민족의 화해와 통일을 준비하는 시복 과정이 되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서울대교구장 염수정 추기경은 “법정 구성원과 증인들, 개정을 위해 수고한 모든 분께 감사드린다”면서 “이번 재판이 어렵지만, 이 어려움이 은혜로운 시간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한다”고 격려했다.

 

한편,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의 예비 심사 제2차 회기는 4월 27일에,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의 2차 회기는 5월 25일에 열린다. 장소는 서울 중곡동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이다. 

 

법정 구성원들은 한국 교회에서 진행되는 시복 예비 심사 과정만 대략 4~5년 정도 걸릴 것으로 예상하면서 신자들의 지속적인 기도를 요청했다. [가톨릭평화신문, 2017년 3월 5일, 리길재 기자]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 ·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 시복 추진 예비 심사 법정 개정


교회 초기 선조와 근 · 현대 신앙의 증인이 대상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의 시복 추진 예비 심사 법정이 개정됐다.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하느님의 종 214명의 명단과 주요 일람, 시복 추진 과정과 의미, 시복 절차 등을 정리했다.

 

 

추진 배경 및 과정

 

한국 가톨릭교회는 103위 성인과 124위 복자를 배출했다. 하지만 교회 창립 초기 순교한 신앙 선조들의 시복시성을 이뤄내지 못했다. 오늘을 사는 신앙 공동체 구성원과 함께 호흡했던 근ㆍ현대 신앙의 증인에 대한 시복시성의 필요성과 당위성이 대두했다.

 

한국 교회는 2009년 주교회의 가을 정기총회에서 조선 왕조 치하의 순교자와 증거자 그리고 한국 교회의 근ㆍ현대 신앙의 증인에 대한 시복 조사를 추진하기로 했다. 이어 주교회의는 2013년 봄 정기총회에서 두 안건에 대한 대표 순교자를 선정해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와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와 동료 80위’로 정해 교황청 시성성에 보고하면서 시복 추진 업무를 본격화했다.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는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가 청구인이 돼 2013년 교황청 시성성에 예비 심사 관할권을 마산교구에 허가해 달라고 요청함으로써 시복 추진 법적 절차를 시작했다. 시성성은 곧바로 그해 4월 교령으로 시복 추진을 허가했다. 이에 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는 역사 및 고문서 전문가 위원회를 구성해 10차례의 회의를 진행했다. 또 7차례의 실무자 회의와 8차례의 교구 담당자 회의를 거쳐 하느님의 종 133위의 영문 약전과 함께 ‘장애 없음’ 교령을 2015년 12월 21일 시성성에 보냈다. 시성성은 2016년 10월 5일 ‘장애 없음’ 교령을 선포했다. 교령을 접수한 마산교구장 배기현 주교는 시성 절차법에 따라 관할권을 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 위원장 유흥식 주교에게 위임했고, 유 주교는 이 안건의 재판관으로 2017년 2월 22일 예비 심사 법정을 개정했다.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와 동료 80위’도 같은 절차로 2010년 3월 11일 주교회의가 청구인이 되며 그 추진에 따른 권한을 서울대교구장에게 이양한다는 사실을 선언하고 이를 교황청에 보고함으로써 법적 절차를 시작했다. 시성성은 같은 해 4월 26일 이를 교령으로 허가했다. 또 시성성은 2015년 7월 3일 이들의 시복 재판 개정에 아무런 ‘장애 없음’을 발표했다. 2016년 10월 14일 서울대교구장 염수정 추기경은 시복시성특위 위원장 유 주교에게 이 안건에 대한 관할권을 위임했고, 유 주교는 재판관으로서 2017년 2월 22일 시복 예심 법정을 개정했다.

 

1949년 교구 사제 피정을 마친 뒤 평양 관후리주교좌성당 사제관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제6대 평양교구장 홍용호 주교와 사제단 18명(성 베네딕도회 사제 3명 포함)의 생전 마지막 모습.

 

 

주요 인물과 의미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는 조선 왕조 치하에서 신앙을 지키다 죽임을 당한 순교자들로, 초기 교회 공동체 주역인 이벽ㆍ김범우(토마스)ㆍ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ㆍ권철신(암브로시오)ㆍ이승훈(베드로)ㆍ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 등이 선정돼 있다. 또 1791년 신해박해, 1801년 신유박해, 1815년 을해박해, 1833년 정해박해, 1839년 기해박해, 1866년 병인박해, 1879년 기묘박해 순교자들이 포함돼 있다. 133위 모두 평신도인 것이 특징이다. 특히 김범우의 유배사(流配死), 이벽의 가문 처형, 황사영(알렉시오)의 능지처사가 순교로 확정돼 이들이 시복될 경우 한국 천주교회 창립사 부분이 새롭게 써야 할 만큼 폭발력을 지닌다. 현재 한국 교회에선 윤지충(바오로) 복자를 첫 순교자로 인정하고 있다.

 

홍용호 주교.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는 근ㆍ현대 시기 순교자들이다. 1901년 제주교난 순교자로는 신재순(아우구스티노)이 유일하게 선정됐다. 나머지 80위는 6ㆍ25 전쟁 전후 공산당 박해로 죽임을 당한 순교자들이다. 눈여겨볼 이는 김선영(요셉) 신부다. 그는 일제강점기 때인 1930년 4월 서울대교구 출신으로 중국에 파견돼 흑룡강성 일대에서 사목하다 귀국하지 못하고 중국 공산당 정부의 박해로 15년간 감옥에 갇혔다. 이후 8년간 강제노동수용소에서 고역을 치르다 병사했다. 이는 북한과 중국 공산당에 의해 죽임을 당한 순교자들이 이번 시복 대상자로 포함돼 있어 한반도 정세와 맞물려 그 진행 과정이 벌써 관심을 끌고 있다.

 

주교 2명과 사제 48명, 신학생 3명, 수녀 7명, 평신도 21명으로 신분도 다양하다. 이중 외국인 선교 사제 20명, 외국인 수녀 3명이 포함돼 있다. 소속 교구별로는 평양교구가 24명으로 가장 많고, 서울대교구 22명, 대전 15명, 춘천 7명, 광주대교구 5명으로 잇따른다. 수원ㆍ인천ㆍ제주교구 소속이 각 1명이 포함돼 있다.

 

수도회 및 선교회별로는 파리외방전교회 12명, 성골롬반외방선교회 7명, 샬트르성바오로수녀회 3명, 서울가르멜여자수도원 2명, 메리놀외방선교회ㆍ메리놀수녀회ㆍ영원한도움의성모수도회가 각 1명이다.

 

주교로는 제6대 평양교구장 홍용호 주교와 주한 초대 교황사절 패트릭 번 주교가 선정됐다. 평신도로는 주교좌 명동대성당 총회장 정남규(요한 세례자)를 비롯해 조종국(마르코), 송경섭(루카), 김한수(라우렌시오), 김정희(안드레아), 최삼준(프란치스코), 강유선(요셉), 송은철(파트리치오) 등이 뽑혔다.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는 근ㆍ현대 시기 순교자들이다. 1901년 제주교난 순교자로는 신재순(아우구스티노)이 유일하게 선정됐다. 나머지 80위는 6ㆍ25 전쟁 전후 공산당 박해로 죽임을 당한 순교자들이다. 눈여겨볼 이는 김선영(요셉) 신부다. 그는 일제강점기 때인 1930년 4월 서울대교구 출신으로 중국에 파견돼 흑룡강성 일대에서 사목하다 귀국하지 못하고 중국 공산당 정부의 박해로 15년간 감옥에 갇혔다. 이후 8년간 강제노동수용소에서 고역을 치르다 병사했다. 이는 북한과 중국 공산당에 의해 죽임을 당한 순교자들이 이번 시복 대상자로 포함돼 있어 한반도 정세와 맞물려 그 진행 과정이 벌써 관심을 끌고 있다.

 

 

주교 2명과 사제 48명, 신학생 3명, 수녀 7명, 평신도 21명으로 신분도 다양하다. 이중 외국인 선교 사제 20명, 외국인 수녀 3명이 포함돼 있다. 소속 교구별로는 평양교구가 24명으로 가장 많고, 서울대교구 22명, 대전 15명, 춘천 7명, 광주대교구 5명으로 잇따른다. 수원ㆍ인천ㆍ제주교구 소속이 각 1명이 포함돼 있다.

 

수도회 및 선교회별로는 파리외방전교회 12명, 성골롬반외방선교회 7명, 샬트르성바오로수녀회 3명, 서울가르멜여자수도원 2명, 메리놀외방선교회ㆍ메리놀수녀회ㆍ영원한도움의성모수도회가 각 1명이다.

 

주교로는 제6대 평양교구장 홍용호 주교와 주한 초대 교황사절 패트릭 번 주교가 선정됐다. 평신도로는 주교좌 명동대성당 총회장 정남규(요한 세례자)를 비롯해 조종국(마르코), 송경섭(루카), 김한수(라우렌시오), 김정희(안드레아), 최삼준(프란치스코), 강유선(요셉), 송은철(파트리치오) 등이 뽑혔다.

 

 

시복 절차와 전망

 

 시복시성은 교회가 복자 또는 성인을 공식적으로 선포해 신자들로 하여금 공적으로 공경하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성인은 보편 교회가, 복자는 해당 지역 교회가 공경한다. 하느님의 종은 순교자나 성덕이 뛰어난 증거자 가운데서 시복시성 추진 대상자로 선정된 이를 일컫는다. 하느님의 종의 영웅적 덕행을 교황청(시성성)에서 인정하면 ‘가경자’라 부른다.

 

시복시성은 해당 지역 관할 교구장에 의해 진행되는 ‘예비 심사’ 과정을 거쳐 교황청 시성성에서 이에 대한 심판을 담당하며, 교황에 의해 최종 재가된다.

 

한국 교회는 여러 교구에 순교자들이 있어서 관할 교구장이 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 위원장에게 관할권을 위임해 통합 추진하고 있다. 시복시성 재판은 교황청 시성 절차법에 따라 지역 교회에서 시복시성 대상자를 선정해 그들의 생애와 행적에 대한 약전을 시성성에 보낸다. 시성성은 이를 검토한 후 시복시성을 추진하는 데 ‘장애 없음’을 교령으로 통보한다. 이때부터 대상자들은 ‘하느님의 종’으로 불린다.

 

이후 시복시성의 모든 절차는 재판 형식으로 엄격히 진행된다. 재판관과 재판관 대리, 검찰관, 공증관으로 한 법정이 구성돼 증인을 심문하고 현장 및 증거를 조사한다. 증인은 주로 역사 전문가로 ‘하느님의 종’ 개개인에 대해 순교 사실과 성덕의 평판에 대해 심문한다. 현장 조사는 대상자들의 묘소와 순교지, 그들의 순교 사실과 성덕을 증명할 자료들을 조사한다. 순교자가 아닐 경우 반드시 기적 심사도 한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조서가 교황청 시성성으로 제출되면 시성성은 신앙촉구관, 신학자문위원, 기적심사관 등 여러 전문 기구와 전문 위원들이 이를 심의한다. 이들이 심의한 결론에 대해 시성성 위원 추기경과 주교들이 판결하고, 이 판결을 교황에게 보고하면 교황이 이를 재가해 가경자를 복자와 성인품에 올린다.

 

시복시성 재판 과정은 빨라야 10년 이상 걸린다는 게 통설이다. 몇백 년이 지난 서류가 아직 시성성 책상에 쌓여 있다는 말도 있다. 재판관인 유흥식 주교는 필요할 때마다 서류를 직접 챙겨 시성성 실무자와 만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들의 시복을 앞당기고 흠결 없이 진행될 수 있게 하는 것은 신자들의 기도와 현양 활동이다. 그래서 유 주교는 신자들에게 “기도하고 본받을 것”을 당부했다. [가톨릭평화신문, 2017년 3월 5일, 리길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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