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5일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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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수도회 성인들의 생애와 영성: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4) 자비를 베푸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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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2-12 ㅣ No.893

[수도회 성인들의 생애와 영성]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4) 자비를 베푸는 삶


하느님 숨결 따라 가장 낮은 곳으로

 

 

- 다미아노 십자가 앞에서 기도하는 프란치스코. 아시시 프란치스코 대성당 벽화.

 

 

예수께서 사셨던 유다 사회처럼 프란치스코가 살던 당시에도 한센병 환자들은 병자인 동시에 죄인이며 벌 받은 자로 간주되었다. 따라서 그들은 사람들에게 기피 대상이었고, 평범한 사람들이 사는 성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아무도 그들과 상종하지 않았고 그들에게는 어떤 사회적인 권리나 보호도 제공되지 않았다. 

 

물론 어느 사회에나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은 존재하지만, 단순히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이라는 표현만으로 당시 한센병 환자들의 처지를 온전히 설명할 수는 없다. 일반적으로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이라 함은 공동체 안에서 마땅히 받아야 할 대접과 보호를 받지 못하는 이들을 의미하기 마련인데, 한센병 환자들은 아예 공동체 밖으로 내쳐진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철저하게 세상 밖에 던져져 있었고, 그들의 인간성이나 삶은 사회적 고려 대상이 전혀 아니었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 곁으로

 

반면 프란치스코는 그들과는 전혀 다른 부류의 사람이었다. 그에게는 공동체에 소속된 이의 권리가 주어졌고 마땅한 의무도 부과돼 있었다. 성벽의 보호 안에서 살았고, 귀족은 아니었지만 모든 기회가 열려 있었으므로 그 자신이 원하기만 한다면 노력 여하에 따라 무엇이든지 이룰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다. 한마디로 프란치스코가 그 시대의 중심에 있는 주류였다면 한센병 환자들은 그 시대의 가장 작은 이들이었다. 

 

그런데 하느님의 손길은 프란치스코를 가장 작은 이들 속으로 이끄셨다. 그리고 그는 유언에서 자신이 그들 안에서 한 일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대신 “자비를 베풀었습니다”라는 짤막한 말로 이야기한다. 자비를 베풀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보나벤투라가 쓴 성인의 대전기는 한센병 환자들 안에서 그가 한 일들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진실한 겸손에 대한 사랑으로 자기 자신을 한센병 환자에게 바쳐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위하여 그들에게 시중들며 그들과 함께 살았다. 그는 그들의 발을 씻어주고 상처의 고름을 짜주고 깨끗하게 씻고는 싸매주었다. 그들에게 지극히 헌신했으며 그들의 상처에다 입을 맞추었다. 그는 곧 복음에 나오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한 몫을 담당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프란치스코가 그들 안에서 베푼 ‘자비’의 내용이다. 그는 한센병 환자들의 종이 되어 주었다. 성 보나벤투라는 이러한 그의 모습을 ‘착한 사마리아인’에 비유하는데, 사실 착한 사마리아인은 프란치스코의 자비를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사마리아인은 쓰러진 이웃을 보살폈지만, 자신이 가던 길을 멈추지는 않는다. 그러나 프란치스코는 그들과 함께 머무르며 그들처럼 살았고, 그들에게 좋은 이웃으로서 봉사한 것이 아니라 종처럼 시중들었다는 점에서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주님께 받은 자비를 전하다

 

무엇이 세상의 주류였던 프란치스코로 하여금 세상의 작은 자들 안에서 종처럼 살아가는 선택을 가능하게 했을까. 그것은 바로 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시어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셨고, 내가 이미 바로 그 넘치는 자비를 받은 이라는 깊은 인식이었다.

 

즈카르야는 요한의 탄생 앞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우리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높은 곳에서 별이 우리를 찾아오시어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이들을 비추시고 우리 발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요한 1,78-79) 성자께서 당신의 지위를 모두 버리고 종의 신분을 취해 인간들 안에서 인간과 함께 인간들처럼 머무르시고 섬김의 삶을 사셨던 것은 바로 하느님의 크신 자비다. 그리고 인간은 모두 그 자비의 빛 속에 머무름으로써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서 벗어나 평화의 길로 접어드는 궁극의 구원에 이르게 된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셨다. 그리고 자신이 그 자비의 빛 속에 머무르고 있음을 인식하는 이들에게는 내가 받은 그 자비를 똑같이 남에게 베풀어야 한다는 것이 피할 수 없는 의무 조항으로 다가온다. 내가 받은 자비에 감사하면서 보답하는 궁극의 행위는 나도 그것을 남에게 베푸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태오 복음서 18장에서 임금에게 1만 탈렌트의 빚을 탕감받은 매정한 종이 100데나리온을 빚진 친구를 고발한다. 그러자 임금은 그를 다음과 같이 질책한다. ‘이 악한 종아, 네가 청하기에 나는 너에게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겸손히 당신을 낮춰 자비를 베푸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체험, 보잘것없는 자신이 누구보다 큰 빚을 탕감받았다는 이해는 프란치스코의 회개 여정을 이끌어 가는 강력한 힘이 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자비를 베푸셨던 것처럼 나도 자비를 베푸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한센병 환자들 안에서뿐만 아니라 그의 온 삶은 일관되게 자비를 베푸는 삶 그 자체였다. 로체터(A. Rotzetter)가 ‘사랑에서 사랑으로’라고 비유했던 것처럼 자신이 입은 자비와 사랑은 고스란히 그가 세상을 향해 베풀어야 할 동기와 목표가 됐다.

 

[가톨릭평화신문, 2017년 2월 12일, 최문기 신부(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 유대철 베드로 수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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