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0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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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론자료

요한복음 1,1-18 태초의 말씀 (2016. 12. 25. 성탄 대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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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충희 [korangpo] 쪽지 캡슐

2016-12-23 ㅣ No.2155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있었고 그 말씀은 하느님이었다. 그 말씀은 바로 그 태초부터 하느님과 함께 있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그를 통하여 만드셨으니 모든 피조물 중에 그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말씀은 생명의 근원이었으며 이 생명은 사람들에게 빛을 가져다주었다. 그 빛이 어둠을 비추고 있는데 어둠은 결코 그것을 끄지 못한다.  

 

성서는 영성적 사건에 관한 기록이다. 영성적 사건이란 사람이 하느님과 협력하여 일으키는 활동이다. 사람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성령을 통하여 영성(spirituality)을 얻는다. , 사람은 성령의 힘으로 신적인 생명, 신적인 지혜, 무조건적인 사랑의 힘을 기른다. 이러한 맥락에서 태초는 사람이 하느님을 만나는 사건을 가리킨다. 태초의 사건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우주만물과 인생의 의미가 분명하게 밝혀진다. (성서에 있어서 태초는 우주 또는 역사가 시작된 시간의 출발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람으로서는 그런 종류의 태초를 도저히 알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 대부분은 태초를 시간의 시작이라는 의미로 당연한 듯이 받아들인다.)

 

말씀은 하느님의 뜻을 드러내는 생명 또는 사랑의 힘을 가리키는 상징어이다. 사람은 하느님의 말씀에 의해 그분의 아들로 태어난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아들은 아버지의 뜻을 세상에 드러내는 말씀이다. 하느님께서는 무조건적이고도 일방적인 사랑으로 아들에게 당신 자신을 내어주신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말씀은 곧 하느님의 아들이고 하느님의 아들은 곧 하느님이다. 사람의 아들은 사람이고 개의 아들은 개인 것처럼.

 

하느님께서는 아들을 통하여 이 세상에 온전하게 드러나신다. 이때 모든 피조물은 하느님의 아들에게 복종한다. 이를 풀어 말하면, 우주의 생성소멸, 생로병사, 희로애락을 포함하는 모든 세상사가 사람의 영적 성장에 도움을 주는 사건들로 변화한다. 모든 피조물은 하느님의 아들을 목적으로, 그를 돕기 위하여 존재한다.

 

생명의 지혜는 하느님의 아들을 통하여 세상을 비추고 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다. 그들은 육정에 굴복하여 보이는 것들에만 눈이 팔려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람의 지혜(=어둠)에 사로잡혀서 하느님의 지혜(=)를 거부하고 반대한다. 어둠은 스스로를 빛으로 착각한다. , 지혜롭다고 자처하는 사람은 결코 성령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러나 빛은 어둠에 결코 굴복하지 않는다. 어둠은 빛을 모르지만 빛은 어둠을 잘 알기 때문이다.

 

요한복음은 요한이 예수에 관하여 증언한 기록이다. 요한은 예수의 증언을 받아들여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말씀에 깃들인 생명을 얻고, 생명에서 퍼지는 지혜의 빛을 보았다. 그러므로 그는 독자들이 자신의 증언을 받아들여서 자신과 예수가 누리고 있는 그 지혜를 받아들이기를 권유한다. 요한의 증언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요한이 이제부터 증언하는 바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고 또한 예수가 누구인지도 알 수 있을 것이다.


 

하느님께서 요한이라는 심부름꾼을 보내셨는데, 그는 그 빛에 관하여 사람들에게 말해줌으로써 모든 이가 그의 소식을 듣고 믿게 하려고 온 것이다. 그 사람 자신은 빛이 아니었으니 그는 빛에 대하여 말하려고 왔을 따름이다. 이것은 참 빛이었는데 그 빛이 세상에 와서 모든 사람을 비추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의 예언자들은 하느님의 명령에 따라 마음을 다 하여 율법을 지킬 것을 독려하였다. 이스라엘 백성은 정성된 마음으로 율법을 지킴으로써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무른다. 그런데 세례자 요한은 예수라는 을 증언한다. 율법은 행위를 규제하여 마음을 하느님께 향하도록 하는 지혜이지만, 예수는 성령의 힘으로 사람을 변화시켜서 세상에 하느님의 자비를 드러내는 지혜이다. 율법과 성령은 처음과 나중, 수단과 목표의 관계에 있다. 이런 의미에서 율법도 사람들의 마음을 비추는 빛이기는 하다. 그래서 복음저자 요한은 예수를 율법과 비교하여 다시 참 빛으로 명명한다. ‘참 빛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한 인간으로서 세상에 하느님의 지혜를 드러낸다.

 

율법은 사람을 하느님께 향하도록 하는 지혜이며, 성령은 하느님으로부터 사람에게 오는 지혜이다. 율법이 사람의 행위를 규제하는 지혜라면 성령은 사람을 자유로운 생명으로 살리는 지혜이다. 예수는 성령으로 사는 사람의 완전한 모범을 보임으로써 이스라엘 백성을 넘어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 빛이다. 성령은 민족, 혈통, 지위, 지식 등 사람의 겉모습과 관계없이 모든 사람에게 열려있기 때문이다.

 

세례자 요한은 빛에 관한 소식을 전해주는 사람일 뿐이고 그 자신이 빛은 아니다. 그러나 빛을 전해주는 사람이 없다면 아무도 빛을 받아들일 수 없다. 다른 말로 바꾸어, 회개하여 하느님을 향하는 삶으로 돌아서지 않는다면 요한의 예언을 받아들일 수 없고 그에게는 참 빛도 소용이 없다. 어두움은 빛을 알아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물론 세례자 요한이 예수를 믿고 받아들인 순간 그 자신도 세상의 빛이다. 그러나 그는 세상에 자신을 알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빛을 비추어주는 예수를 알린다. 예수는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는 참 빛이다. 예수가 독자들에게 어떤 일을 하게 될지는 지금부터 차차 드러날 것이다.

 

 

말씀은 세상에 있었고 하느님께서는 그를 통하여 세상을 지으셨건만 세상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는 그 자신의 나라로 왔지만 그의 백성은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그를 받아들였으며 그를 믿었다. 그는 그들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능을 주었다. 그들은 혈통에서나 육정에서나 사람의 욕망에서 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서 난 것이다.

 

세상을 지음은 하느님의 창조사업에 동참하여 세상의 존재 의미를 완전하게 회복하였다는 뜻이다. 사람은 누구나 예수를 믿고하느님의 뜻에 순종함으로써 세상을 창조하며 그 주인이 된다. 여기에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은 를 하느님의 아들로 변화시키는 예수의 권능에 대한 믿음이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안심하고 자신을 완전하게 열어 성령을 받아들이며, 성령의 힘으로 스스로 세상의 주인이 된다. 예수는 몸소 그러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그의 가르침이 유효하다는 것을 믿을 수 있다. 예수를 믿고 스스로 세상의 주인이 되고 있음을 목격하고 나서야 비로소 예수가 세상을 창조하는 하느님으로서 모든 사람을 자유로운 생명으로 이끄는 주님(Lord)’임을 깨닫게 된다.

 

세상 사람들이 예수를 믿지 않는 것은 육정의 즐거움을 추구하느라 마음이 닫혀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예수를 믿고 세상의 주인이 되는 대신에, 피조물의 노예로 살아가는 것으로 만족하면서 예수를 믿지 않는다. 그들은 성령의 힘에 의지하는 대신에 쾌락, 재물, 명예, 권력을 최대한 확보함으로써 세상의 주인이 되려고 애를 쓰지만 오히려 비참한 육정의 노예로 추락한다.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인 것처럼, 예수를 믿고 성령을 받아들이는 사람도 하느님의 아들이다.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의 아들이 되기를 포기함으로써 스스로를 단죄하고 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스스로 하느님으로부터 나온 그분의 아들임을 알며 항상 아버지와의 긴밀한 친교에 머무른다.

 

 

말씀이 사람이 되었는데 그는 은총과 진리로 가득 채워져서 우리 가운데 살았다. 우리는 그의 영광을 보았으니 그 영광은 그가 아버지의 외아들로서 받은 것이었다. 요한은 그를 두고 외쳐 말하였다. “그분은 내가 이렇게 말했던 분이십니다. ‘그분은 내 뒤에 오시지만 나보다 위대하시다. 그분은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습니다.’”

 

그는 은총으로 가득차서 우리 모두를 끝없는 은총으로 축복하였다.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율법은 주셨지만 은총과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왔다. 아무도 하느님을 본 적이 없다. 하느님과 같고 그분 곁에 있는 외아들이 그분을 알려주었다.

 

예수는 세상 사람들과 뒤섞여 그들과 더불어 세상을 살았다. ‘은총(grace)’은 하느님의 사랑이며 '진리(truth)'의 참 모습, 또는 참 자아를 의미한다. 그것은 사람이 마땅히 지녀야할 신적인 본성인 동시에 마땅히 가야할 길이기도 하다. 진리는 세상의 주인 노릇을 하는 하느님의 아들이다. 예수는 자신의 참된 삶을 통하여 세상 사람들에게 참된 삶의 길을 알려주었다. ‘우리는 예수를 믿고 성령을 받아들임으로써 예수의 영광을 본다.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은 예수가 비참하게 패배를 겪은 모습만 볼 것이다.

 

세례자 요한의 발언을 깊이 새겨야만 한다. 루가복음에 의하면 요한은 예수보다 여섯 달 정도 먼저 태어났다. 그러나 요한은 그보다 더 의미심장한 영적 사건을 말하고 있다.

 

사람은 누구나 먼저 육적인 존재로 이 세상에 태어난다. 그러나 때가 되면 반드시 하느님을 사랑하려는 갈망을 품게 된다. 이것이 사람의 참된 본성이다. 그러므로 영적 인간은 육적 인간보다 나중에 온다. 그러나 사람의 목표는 영적인 완성이다. 영적인 인간이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면 사실 영적 인간은 육적 인간보다 먼저 있었던 것을 알게 되고, 그 동시에 예수는 인류 역사상의 누구보다도 먼저 있으면서 인류를 이끌고 있는 스승임을 깨닫는다. 예수의 제자는 예수의 권능을 목격하고 나서 비로소 그를 스승으로 고백하는 것이다.

 

율법은 이성적 의지를 하느님을 사랑하도록 이끌되 은총은 살아계신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이다. 율법은 은총으로 가는 수단에 불과하므로 은총이 율법보다는 훨씬 위대하다. 율법은 언어적 표현으로 주어지지만 은총은 하느님과 사람 사이에 이루어지는 살아있는 친교이다. 이때 사람은 자신이 하느님의 외아들임을 깨닫는다. 여기에서 외아들은 다른 어떤 존재와도 바꿀 수 없는 유일무이한 아들이라는 뜻이다. 예수 또한 외아들이지만 그는 세상을 창조하는 주님으로서의 외아들이다. 예수를 믿는 이들은 예수와 더불어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자격과 그에 따르는 권능이 주어진다. 사람은 하느님을 볼 수도 알 수도 없지만 세상 사람들은 예수의 제자들을 통하여 하느님을 보고 알 수 있다. 누구든지 예수를 믿는 사람은 스스로 하느님의 아들이 됨으로써 하느님을 안다. 새로운 하느님의 외아들은 또 다시 세상 사람들에게 하느님을 알린다.

 

외아들은 특별히 예수를 가리키는 말이지만 동시에 예수를 믿는 그의 제자들에게도 해당된다. 만일 예수 한 사람만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하느님은 예수를 믿는 제자들을 자녀라고 부르실 수가 없을 것이다. 영적 인간은 자신이 하느님으로부터 왔으며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유일무이한 존재라는 사실을 안다. 그는 하느님의 외아들임을 자각하는 것이다. (겉모습에 집착하는 육적 인간은 남들과 비교되는 양적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남과 비교하여 잘 생겼거나 못 생겼거나, 강하거나 약하거나, 부유하거나 가난하거나, 유식하거나 무식하거나, 지위가 높거나 낮거나, 지혜롭거나 어리석은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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