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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교회ㅣ기타

추기경 정진석 회고록19: 야훼이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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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10-08 ㅣ No.406

[추기경 정진석] (19) 야훼이레


전쟁 고아들 눈망울 떠올리며 식량 구하러 동분서주

 

 

- 6ㆍ25 전쟁 당시 미국 천주교회는 굶주린 피난민과 시민들을 대상으로 활발한 구호 활동을 펼쳤다. 사진은 구호 식량을 타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리는 어린이들.

 

 

기적같은 만남

 

진석은 부산에서 김영식 신부님을 만난 것 외에 아무 소득 없이 귀대했다. 어머니를 찾기 위해 부산 곳곳을 온종일 돌아다니고도 어머니를 찾지 못하니 무서운 마음이 덜컥 앞서기도 했다. 진석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엄마! 살아 계시지요? 전 잘 있습니다. 어머니가 무척 보고 싶습니다. 성모님! 어머니를 지켜 주세요!’

 

얼마 후 미군 부대가 부평으로 올라오면서 진석도 함께 이동했다. 인천 부평에 가기 전 진석은 서울에 들러 어머니의 흔적이 묻어 있는 집에 들르고 싶었다. 동네 어귀에 들어서던 진석은 입구에 선 사람을 보고 깜짝 놀라고 말았다. 거짓말처럼 어머니가 거기 계셨던 것이다. 마치 꿈을 꾼 듯 한동안 멍하니 있던 진석은 한걸음에 달려가 어머니 손을 잡았다. 

 

“엄마! 어디 다친 데는 없으세요? 어떻게 지내셨어요?” 

 

“난 다행히 많은 분이 도움을 주셔서 잘 지냈다. 매일같이 널 위해 기도했는데 우리 아들도 살아서 건강한 것을 보니 성모님께서 보호해 주셨구나.”

 

마침 어머니도 부산에서 다시 서울로 올라와 동네 초입에 다다르던 길이셨다. 한강에서 기약 없이 헤어진 지 3년 만에 길 위에서 모자 상봉이라니, 정말 기적 같은 일이었다. 그 순간 진석은 어떤 상황에서도 하느님과 성모님이 돌봐 주신다는 믿음을 굳게 가지게 됐다. 이때부터 하느님께서 원하시면 모든 것을 배려하고 보호해 주신다는 아브라함의 ‘야훼이레’ 믿음이 평생 진석을 지키는 원동력이 됐다.

 

어머니를 만나 꿈같은 지난 시간을 생각하니 한숨만 나왔다.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겼고 결국 살아서 어머니를 만났으니 말이다. 눈물 없이 그동안의 일을 이야기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진석은 어머니가 걱정하실까 봐 눈물을 꾹 눌러 억지로 참았다. 대신 어머니의 지난 시간을 재차 확인했다.

 

어머니는 부산의 한 성당에서 도움을 받아 한 가정집에서 쌍둥이의 보모를 지내셨다고 했다. 더는 말씀하지 않으셨지만, 매일같이 가슴을 졸이며 얼마나 힘들게 남의 집에서 지내셨을까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그래도 전쟁의 난리 속에서 건강하신 것에 감사했다. 진석과 어머니가 집에 도착해 들어가니 집은 텅 비어 있었다. 다시 한 번 전쟁의 비참함이 진석의 가슴에 차가운 바람처럼 불어왔다. 진석이 부평으로 간다고 하자 어머니는 따라가겠다고 하셨다. 오랜만에 만난 아들과 또다시 생이별하기는 싫었던 것이다. 

 

어머니는 망설임 없이 길을 나서셨다. 길을 떠나기 전, 어머니는 진석과 당신의 보금자리였던 집을 그대로 옆집 아주머니께 선물했다. 어머니 당신께서 피난을 간 사이 전장으로 향하던 아들에게 여비를 마련하라고 재봉틀을 구매해준 옆집 아주머니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었다. 재봉틀을 사준 그 돈이 당신 아들이 전쟁 중에 살아남은 목숨값이었다고 어머니는 굳게 믿었다. 

 

목숨을 구해준 은인에게 모든 것을 건넨 어머니는 그때부터 평생을 남에게 주는 삶을 사셨다. ‘야훼이레’의 삶이었다. 어머니는 자신이 가진 무언가를 지금 당장 필요로 하는 다른 이가 있으면 그에게 주셨다. 이후에 자신이 그것이 필요한 때가 되면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실 것이라 굳게 믿었다. 그런 모습은 진석에게도 평생 큰 영향을 끼쳤다.

 

어머니는 진석을 따라 부평에 와서 삯바느질을 시작했다. 낯선 곳에 살면서도 오갈 곳이 없는 아이들을 데려다 공부도 시키고 돌봐줬다. 그중에서 성소에 뜻이 있는 이는 수녀원에 보내기도 했다. 진석도 부평 미군 부대에서 열심히 주어진 일을 했다. 

 

진석은 1951년 5월부터 1년 넘게 통역 일을 하면서 미군과 생활하다 보니 자연히 영어 실력이 많이 늘었다. 중학교 때 훌륭한 선생님에게 배운 영어 공부가 전쟁을 거치면서 아주 요긴하게 사용됐다. 영어 회화뿐 아니라 영어 번역에도 도움이 돼 한평생 영어는 진석에게 아주 가까운 벗이 된 셈이었다.

 

 

잊지 않고 김영식 신부 찾아가

 

- 당시 고아들을 보살폈던 김영식 신부.

 

 

시간이 흘러 1952년 8월 15일 성모승천 대축일에 진석은 약속대로 김영식 신부님을 찾아갔다. 어머니를 찾아 부산에 갔을 때 영어 통역을 찾는 분이 계시다는 친구의 말을 듣고 인사드렸던 신부님이었다. 김 신부님은 진석을 보고 깜짝 놀라셨다. 

 

“내가 월급은 못 준다고 했을 때 ‘돈 걱정은 하지 마세요’ 라기에 자네가 우리와 함께 일해 주는 것을 거절하는 줄 알았어.”

 

반갑게 맞아주시는 김 신부님 뒤로 고아들이 보였다. 신부님은 고아들을 위한 식량을 미군 부대에서 충당해 아이들을 돌보고 계셨다. 그런데 아이들은 진석이 고아원을 처음 방문한 날도 점심도 못 먹고 굶주리고 있었다. 그래서 진석은 도착한 날부터 김 신부님과 함께 식량을 구하러 나갔다. 신부님은 미군들의 고해성사와 미사를 해주고 식량을 얻으셨다(당시 미사는 라틴어였다). 진석은 신부님 옆에 서서 미군 장교에게 고아원 사정을 설명하고 필요한 물자를 얻었다.

 

미군 장교는 보통 “고아원이 어떻게 운영되고 있느냐? 고아들이 몇 명이나 되는가?” 하고 질문을 했다. 내용을 설명하고 먹을 것이 전혀 없어 고아들이 굶주리고 있다고 대답하면 미군들은 고맙게도 물자를 풍부하게 줬다. 하지만 고아원에 원생들이 많아 이내 식량이 떨어지곤 했다. 그래서 김 신부님과 진석은 일주일에 한 번 정기적으로 미군 부대를 방문해 미사를 드리고 식량을 가지고 돌아왔다. 그래서 한 주일 식량을 사용하고 나면 조금 남아 식량을 비축할 수 있었다. 

 

진석은 영어를 할 수 있는 덕택에 이내 미군에게 구걸 도사(?)가 돼 열심히 고아들의 식량을 챙겼다. 때로는 자존심이 상할 일도 없지 않았지만 자신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배를 곯는 고아들의 눈망울을 생각하면 전혀 창피하지 않고, 오히려 힘이 솟았다. 어렵고 힘들기도 했지만 처음으로 맛보는 사랑과 나눔의 체험이자 보람과 기쁨의 시간이기도 했다. 고아들은 자신들을 위해 먹을 것을 구해다 주는 진석을 마치 친오빠처럼 생각하며 따랐다.

 

명동성당은 두 번이나 북한군 수중에 들어갔고 미군의 엄청난 공습에 주변이 모두 폐허가 됐지만 명동성당은 웅장한 모습을 여전히 지니고 있었다. 유엔군이 서울을 탈환할 때 명동성당과 일대에 북한군 부대가 주둔해 있어 미군은 폭격을 감행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윤을수 신부가 미군 리지웨이 사령관에게 간곡하게 부탁한 덕분에 명동성당은 폭격을 피해 형체를 보존할 수 있었다.

 

그 시절 명동성당은 한국 구호 활동의 성지였다. 1953년 7월 27일 휴전 협정으로 전쟁은 종료됐으나 3년간의 전쟁으로 엄청난 인명 피해와 경제적 피해가 뒤따랐다. 전쟁으로 황폐해진 농촌의 많은 농민이 서울을 비롯한 도심지로 이동했고, 북한 지역에서 내려온 피란민들도 대부분 도시로 몰려들었다. 이중 서울로 이주한 피란민들은 서울의 중심부인 중구 일대에 집결했다.

 

 

명동성당, 활발한 구호 활동 펼쳐… 교세 증가에도 기여

 

명동성당은 그들의 연락과 안식을 위한 장소가 됐다. 명동본당은 성당 복구와 함께 피란민들과 시민들에 대한 구호 활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했다. 과거에도 명동본당의 구호 활동은 미국 가톨릭복지위원회의 원조 아래 활발하게 전개됐다. 미국 가톨릭복지위원회 산하 조직인 가톨릭구제위원회는 이미 1946년 한국에 진출한 후 명동본당에 사무실을 마련하고 한국 정부와 협조해 양곡과 의복 등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 주면서 활발한 구호 활동을 펼치고 있었다. 

 

6ㆍ25 전쟁 이후에도 이들의 원조 활동은 계속됐는데 미국 가톨릭 교회의 도움으로 명동성당은 구호 활동의 중심지가 돼 구호물자의 통로 및 배부처로 기능했다. 이러한 구호 활동은 밀가루 신자를 낳는다는 비아냥도 없지 않았지만 한국 교회 교세 증가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 당시 천주교회에서 펼친 사회복지 활동도 이 시기 교세 성장의 주요한 원인이 된 것만은 사실이다.

 

[평화신문, 2016년 10월 9일,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홍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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