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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베르뇌 주교의 눈으로 본 병인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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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09-05 ㅣ No.777

베르뇌 주교의 눈으로 본 병인년 이야기


“러시아 세력 쫓아내면 신앙 자유 주겠다”

 

 

한국교회는 올해, 병인년 순교 150주년을 기념하고 있다. 병인박해는 역사상 가장 잔혹한 박해로 전해진다. 특히 순교자성월을 맞아, 본지는 병인박해의 시작, 병인박해와 절두산, 박해의 종식과 이후 교회재건 등의 내용을 3회에 걸쳐 소개한다.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이번 특집은 박해로 스러져간 이들이 직접 당시 상황을 소개하는 형식으로 재구성했다. 병인박해는 1866년 2월 23일 제4대 조선대목구장 성 시메온 베르뇌 주교(한국명 장경일· 파리외방전교회·1814~1866)가 체포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이에 따라 첫 회에서는 베르뇌 주교의 목소리를 통해 병인박해 전 교회의 상황과 박해 이유 등을 들어본다.

 

“섭정(흥선대원군)의 기별이 도착할 때가 지났는데?”

 

황해도와 평안도 순시를 위해 길을 나섰다가, 흥선대원군이 만나기 원한다는 기별을 받고는 서둘러 귀경했다. 그때가 1866년 1월 29일이었다. 한양에 도착한 뒤 초조한 마음으로 대원군과의 만남을 기다렸다. 대원군의 기별은 좀처럼 오지 않았다. 불안해졌다. “일이 틀어지는 것은 아니겠지?”

 

나와 대원군의 만남에 교인들이 어떤 기대를 걸고 있는지 안다. 신앙의 자유를 기대하고 있는 교인들은 벌써 한양에 큰 성당을 지을 이야기를 하고 있다.

 

 

■ 병인박해 이전의 조선교회

 

내가 제4대 조선대목구장 임명을 받고 조선에 입국한 것은 1856년이었다. 당시 조선교회는 기해박해(1839년)와 병오박해(1846년)로 큰 피해를 입었다. 앵베르 주교와 모방·샤스탕 신부, 김대건 신부도 그때 잃었다. 그래도 조선교회는 최양업 신부의 헌신적인 사목과 우리 프랑스 선교사들의 포교활동으로 점차 안정되고 체계화되고 있었다. 내가 입국했던 1856년 1만5000여 명이었던 신자 수는 1865년에는 2만3000여 명으로 늘어났다.

 

19세기 중반 이후, 조선 국내외 상황도 조선교회에 유리한 방향으로 전개됐다. 종교의 자유는 여전히 금지된 채로 있었지만, 우리 선교사들은 비교적 자유롭게 활동을 할 수 있었다. 신자들 사이에서는 신앙의 자유에 대한 희망이 싹트기 시작했고, 교회는 박해의 상처에서 벗어나 더 넓은 지역으로 복음을 전파하고 있었다. 

 

이러한 조선교회의 성장에는 대외적 영향이 컸다. 조선사람들이 ‘양이’(洋夷)라고 부르던 서구 열강의 위협이 점차 늘어갔다. 1840년대 후반, 영국과 프랑스, 미국, 러시아 등 서구 열강의 선박들은 조선 연해에 빈번하게 출몰했고, 백성에게 피해를 입히기까지 했다. 조선 조정은 양이가 조선을 침입할지도 모른다고 우려했다. 제1차 중·영 전쟁(1840~1842)에서 청나라가 영국에 일방적으로 패배해, 막대한 전쟁 배상비까지 물면서 경제적 손실을 입자 조선 조정은 더욱 긴장했다.

 

이런 상황에서 1846년, 프랑스 동양함대 사령관 세실은 군함 3척을 이끌고 충청도 홍주 외연도에 나타났다. 세실 사령관은 1839년 기해박해 때 조선 조정이 앵베르 주교와 모방·샤스탕 신부 등 프랑스 선교사 3명을 죽인 것을 문책했다. 또 앞으로 프랑스 사람을 가혹하게 해치는 일이 있으면 큰 재앙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경고하고 떠났다. 이렇듯 조선은 프랑스 함선으로부터 직접적인 위협을 받는 상황이어서, 프랑스 침략을 유발할 수 있는 천주교 박해를 완화할 수밖에 없었다.

 

국내적으로는 1849년 철종의 즉위가 큰 영향을 미쳤다. 철종은 천주교 박해로 인한 아픈 상처를 갖고 있었다. 할머니 송 마리아와 큰어머니 신 마리아는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했다. 철종의 할아버지 은언군도 천주교에 연루돼 강화도에서 처형됐다. 당시 세도 정권을 장악했던 안동김씨 세력은 천주교 박해로 철종을 자극할 필요가 없었다.

 

이에 조정의 대신 중에서도 천주교를 믿는 이들이 계속 늘어났다. 대대로 권력을 세습하던 북인 가문 출신의 승지 남종삼(요한)과 그의 집안사람들이 천주를 믿었다. 흥선대원군의 부인 민 대부인도 교리문답과 기도문을 공부했다. 민 대부인은 아들 고종이 왕위에 오르자 나를 찾아와 감사미사를 청하기도 했다. 대원군의 딸도 천주교를 따랐다. 대원군 집안 외에도 천주교를 받아들인 왕의 친인척들이 더 있었다. 

 

나는 파리외방전교회에 보낸 1858년 7월 6일자 편지를 통해 “이 나라의 양반가 사람들 중 한 명이 신앙을 받아들였다”면서 “만일 왕의 가까운 친척이 열심히 믿게 되면 많은 개종이 뒤따를 것”이라고 기대를 표시했다.

 

 

■ 방아책과 종교의 자유

 

나를 포함한 프랑스 선교사들과 교인들은 조만간 신앙의 자유를 누리게 되리라 희망했다. 이러한 희망을 더욱 부풀게 한 것은 러시아의 남하를 프랑스 주교의 힘으로 막고자 한 ‘방아책’(防俄策)이었다. 

 

승지 남종삼과 나의 복사 홍봉주 등이 방아책을 대원군에게 제의했던 것을 알고 있었다. 교인들은 중국에 있는 프랑스 함대의 힘을 이용하면 러시아의 조선 진출을 막을 수 있고, 이를 통해 신앙의 자유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나도 예전부터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예상하고는 있었고, 이를 신자들에게 알려왔다. 러시아인들이 북쪽 변방을 침범할 것이며, 이를 막기 위해서는 조선이 영국과 프랑스와 먼저 조약을 맺어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이윽고 1864년 러시아의 남하가 현실화되자, 이를 두려워한 대원군은 나에게 “만일 러시아 사람들을 쫓아낼 수만 있다면 종교의 자유를 주겠다”고 제의했다. 하지만 나는 러시아의 남하를 막을 힘이 내게는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이런 사실을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장 알브랑 신부에게 보낸 1864년 8월 18일자 편지에도 썼다. 나는 대원군의 제의에 대해 “이 나라에 유익한 일을 하기를 매우 바라지만 러시아 사람들과 나라가 다르고 종교가 달라 이들에게 아무런 영향을 미칠 수 없다”고 밝힌 바 있다. 하지만 암암리에 대원군을 비롯해 조정의 대신들과 접촉하면서 방아책에 대해 계속 논의했다. 

 

1865년 9월과 11월, 두 차례에 걸쳐 러시아인들이 또 다시 통상을 요구한 사실이 세상에 알려졌다.  

 

교인 중 김면호와 홍봉주는 그해 11월 서로 상의해, 나와 다블뤼 주교 등 프랑스 주교들을 이용해 프랑스와 영국 두 나라와 동맹을 맺어 러시아에 맞서자는 계책을 적은 서한을 대원군에게 전달했다. 나는 탐탁지 않았지만 “섭정이 만나겠다고 하면 궁궐에 들어가겠다”고만 전했다.

 

대원군은 김면호의 서한에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다만 대원군의 부인이 교인들에게 희망적인 소식을 전했다. 즉 누가 방아책에 대한 새로운 서한을 대원군에게 보내면 반드시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전갈이었다. 민 대부인은 유모 박 마르타를 통해 서둘러 대원군에게 편지를 한 번 더 보내는 한편 지방에 있는 주교들을 한성으로 올라오도록 당부했다.

 

이번엔 승지 남종삼이 나섰다. 홍봉주로부터 박 마르타의 이야기를 들은 남종삼은 새 청원서를 작성해 대원군에게 직접 제출했다. 대원군은 청원서를 읽고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고, 그 자리에 있던 좌의정 김병학을 포함한 대신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튿날 대원군은 남종삼을 불러 프랑스 주교들이 러시아의 조선 침략을 막을 수 있는지 재차 확인 한 뒤, 우리를 만나보고 싶다는 뜻을 알려왔다. 방아책을 통한 신앙의 자유가 손에 닿을 듯 보였다.

 

 

■ 대박해의 시작

 

하지만 러시아의 남하를 막고 조선에 신앙의 자유를 가져올 것으로 기대됐던 남종삼의 방아책 청원서는, 대원군의 변심으로 물거품이 됐다. 대원군이 만남을 제의해 나와 다블뤼 주교는 지방에 있다가 급히 한양으로 올라왔지만, 소식을 듣고 올라오는 동안 많은 시간이 지연됐다. 그 사이 러시아의 통상요구도 사그러들어 대원군은 우리들을 만날 필요가 없어졌다. 중국이 외국인 선교사를 처형했다는 동지사의 보고도 대원군의 태도 변화에 일조했다.

 

그뿐 아니었다. 남종삼이 제출한 방아책 청원서는 천주교 박해의 빌미가 됐다. 당시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안동김씨 세력은 외국에 나라를 개방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안동김씨 세력은, 풍양조씨 세력이 나와 비밀리에 접촉하고 조선과 프랑스의 통상을 위해 프랑스 선박의 내항을 추진해 온 사실도 알게 됐다. 대원군은 천주교와 내통했다는 비난을 피하고, 자신의 불안한 정치적 입지를 다지기 위해 천주교를 탄압하는 방향으로 입장을 바꿨다.

 

나는 이러한 사실을 모른 채 대원군의 기별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2월 19일 최형과 전장운의 체포 소식이 들려왔다. 일이 틀어졌음을 직감하고 한양의 모처에서 은신했다. 하지만 2월 23일 배교자 이선이의 밀고로 나는 은신처에서 체포됐다. 이어 조정은 ‘포고령’을 내리고 천주교인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를 시작했다. 박해의 광풍은 전국에 휘몰아쳤다. [가톨릭신문, 2016년 9월 4일, 최용택 기자, 그래픽 장지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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