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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기회의 불평등: 같은 자본주의, 더 불평등한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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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08-13 ㅣ No.1333

[경향 돋보기 - 기회의 불평등] 같은 자본주의, 더 불평등한 한국

 

 

경쟁에서의 상처

 

자본주의 사회에서 불평등은 경쟁의 기회, 과정, 결과가 공정하지 않음을 뜻한다. 이 세 영역 가운데 기회의 불평등은 다른 두 측면보다 악랄하다. 과정의 평등은 사각의 링에서 시합을 한다고 했을 때 심판이 공정한 판정을 해야 함을 말한다. 좋은 사회는 이런 철학을 바탕으로 교육과 법체계를 형성한다. 경쟁하는 이들을 편견 없이 대하고, 성과에 대한 보상이 납득할 수준으로 이루어지게 하는 방식이 그러하다. 나라마다 실현정도의 차이는 크지만 인간의 노력으로 어느 정도 불평등을 최소화할 수 있다.

 

결과의 평등은 문득 어휘의 결합만 보면 현실성이 없어 보이지만 그것은 한국 사람들이 ‘결과가 공정하다.’는 것을 오해하기 때문이다. 결과의 평등은 경쟁의 승자와 패자에게 ‘똑같은’ 보상을 하라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비록 지더라도’ 누구든지 경쟁과정에서의 상처를 치료받을 수 있어야 하며, 또한 승패와 상관없이 ‘약속된’ 개런티(다른 말로 ‘합리적 생활비’)가 보장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이 금액은 ‘가족이 인간의 존엄성을 누리며 사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는 수준이어야 한다. 이 또한 나라마다 차이는 있지만 노력에 따라 충분한 현실성이 있다. 최저임금의 수준을 어디에 맞추는지에 따라 ‘경쟁에 진 자’에게 보장되는 삶의 질은 달라진다. 교육과 의료를 어느 정도 국가가 책임지는지에 따라 ‘같은 최저임금을 받아도’ 개인이 느끼는 궁핍함은 차원이 다르다.

 

하지만 기회가 평등하기는 어렵다. 아주 예전부터 그랬다. 농경사회부터 개인의 생산성에 따른 격차가 발생하면서 사유재산이 형성되었고, 자연스레 ‘상속’의 개념이 등장했다고 학자들은 보고 있다. 태어날 때 ‘어떤 수저’를 물고 태어났는지가 이때부터 중요했다는 것이다.

 

그 이전의 수렵 · 채집 시절에도 기회는 불평등했다. 정착하지 못하고 늘 유목을 해야만 했던 상황에서, 태어날 때부터 장애를 가진 이들은 말 그대로 평범하게 살 기회조차 없었다. 그만큼 기회의 불평등은 역사가 길다. 인간이 무리를 지은 곳에서는 필연적이다. 그리고 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에 따라 ‘같은’ 자본주의지만 ‘다르게’ 살아가는 사회가 등장한다.

 

 

기회의 불평등이 왜 심화되었을까

 

여기서 한국사회의 ‘기회의 불평등’이 왜 유독 심해졌는지에 대한 이유가 발견된다. 좋은 사회는 기회의 완전한 평등이 어렵더라도 불평등의 정도를 줄일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해야 한다.’는 사회철학을 가지고 있다. 이런 곳에서는 기회 불평등의 정도를 개인이 ‘감당할 만한’, 그래서 ‘극복할 만한’ 수준을 벗어나지 않게 한다. 그래서 출발선이 다른 개인을 돕는 걸 마다하지 않는다. 이를 ‘역차별’이라고 하는 사람도 없고, ‘복지병’이라면서 비난하는 정치인도 없다.

 

하지만 한국사회에서 기회는 늘 불평등했는데 굳이 그럴 필요가 있느냐고 말하는 사람이 부지기수다. 이들은 “언제는 그런 적이 없었느냐! 태어날 때 부모를 잘 만나는 것도 팔자!”라면서 틀에 박힌 반론을 편다. 잘못된 사회를 내버려두니 상황은 악화된다.

 

기회의 불평등이 ‘더’ 심화된 이유로 학자들은 경제구조의 변화를 지적한다. 어떤 변화인지를 살펴보고 ‘유별난’ 한국사회의 불평등을 온전히 설명하고자 한 걸음 더 나아가자. 저성장의 시대에 기업은 어떻게든 비용을 절감하려고 인건비를 줄인다. 정리해고가 쉬워지고 비정규직 노동자의 비율을 늘리는 식이다.

 

그러면 자연스레 정규직이 될 수 있는 문이 바늘구멍이 되는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 좁은 문을 통과하고자 하는 이들은 점점 늘어간다. 일을 해도 가난한 시대이다. 그래서 티끌을 모은다면 티끌일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는 ‘어떤 곳’에서 ‘무슨 일’을 하는 것이 지난날에 비해 엄청나게 중요하게 여겨진다. 대기업인지 중소기업인지를 따져야 하고, 정규직인지 비정규직인지를 고려해야 한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문제부터 보자. 한국에서 중소기업의 노동자는 대기업의 60% 수준의 급여를 받는다. 대기업과 동일한 대우를 기대할 순 없지만 ‘차이’가 있다면 이는 감당할만한 수준이어야 한다. 대기업에서 300만 원을 받을 때 중소기업에서 180만 원을 받는 것은 결코 ‘마찬가지’가 아니다. 중소기업을 선택하는 것이 곧 삶의 질이 추락됨을 뜻한다. 단지 임금만 차별받는 것이 아니다. 대기업의 경우 국민연금의 가입률이 95%가 넘지만 중소기업은 64.1%에 지나지 않는다. 한국사회에서 중소기업에서 일한다는 것은 현재는 물론 노후까지 불안함을 예약하는 꼴이다.

 

여기에 비정규직 문제까지 고려하면 ‘대기업 정규직’만 바라보는 수많은 사람이 쉽게 이해된다. 비정규직의 월평균 임금 149만 7천 원은 정규직에 대비하여 55.8%에 지나지 않는다. 이 수치는 정부의 통계이다.

 

노동자 통계에 따르면, 비정규직은 정규직과 대비하여 49.9%의 급여를 받고 있다. ‘밥만 먹고 살라.’는 뜻이다. 그 차이가 지속적으로 확대되고 있다는 것도 문제다. 2002년도에는 정규직이 100만원을 받을 때 비정규직은 67만 1천원을 받았다. 더 이상 나빠질 것도 없는 상황이라 다들 그랬는데, ‘더’ 나빠졌다. 앞날마저 어둡다.

 

한국은 비정규직 노동자가 정규직으로 전환되는 비율이 매우 낮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16개국을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한국은 비정규직으로 채용된 지 3년 뒤 정규직으로의 전환 비율이 22.4%에 지나지 않아, 평균 53.8%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정규직으로 전환은커녕 해고되기 일쑤다. 한국에서는 비정규직으로 채용된 지 3년 내 해고될 확률이 26.7%인데, 이는 OECD의 평균인 16.9%에 비해 월등히 높은 수치다.

 

 

바늘구멍을 통과하려는 경쟁

 

상식적인 사회는 어떤 일자리든 ‘인간의 존엄성’이 보장되게 해야 한다. 하지만 한국사회는 모든 것을 ‘개인 탓’으로 돌렸다. 노력해서 대기업의 정규직이 되면 될 일 아니냐면서 시큰둥했다. 사회에 기대할 것이 없음을 알게 된 개인들은 발버둥을 친다. ‘나’는 (‘우리 아이’는) 좀 더 공부하면 ‘안정된 곳’으로 취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이런 ‘나’가 너무 많다. 그러니 문제가 해결되기는커녕 바늘구멍을 통과하지 못하는 사람들만 적체된다. 지금까지 투자한 비용을 고려하면 쉽사리 다른 쪽으로 눈을 돌릴 수도 없다. 이건 눈이 높아서가 아니라 ‘다른 쪽’이 워낙 엉망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열 명 뽑는 정규직 일자리에 천 명이나 만 명이 모이는 병목현상이 발생하게 되고 경쟁은 치열해진다.

 

이 지경에 이르면 ‘시험으로’(학점, 영어 점수) 사람을 구분하는데 한계가 있기 때문에 ‘과거의 흔적’을 겨룬다. 여기서부터 기회의 불평등은 감당할 수준을 넘게 된다. 학원에 다닐 돈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토익(TOEIC) 점수는 개인이 노력을 하면 어느 정도 성과가 난다. 하지만 비행기를 타고 가 외국에서 지내다 오는 ‘어학연수’는 개인이 마음만 먹는다고 쉽게 선택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자신의 부모가 어떠한지가 중요해진다.

 

이런 ‘경제적 변화’만으로 한국사회의 기회 불평등을 온전히 설명할 수는 없다. 얼마 전 타계한 앨빈 토플러가 「제3의 물결」에서 말했듯이 제조업 중심의 고성장 시대의 퇴조는 한국만의 상황이 아니라 세계적 추세다. 그런데 왜 한국의 상황이 더 절망적으로 변했을까? 이를 이해하려면 경제구조의 변화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태도를 보아야 한다.

 

좋은 사회는 경제적 상황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걸 천재지변처럼 이해하지 않는다. 하지만 한국에는 사회 ‘안’의 경제가 아니라, ‘경제=사회’로 착각하는 사람이 많다. ‘경제유발 효과가 좋다면’ 제대로 검증도 하지 않고 무조건 괜찮다고 하고, ‘지금 경제가 나쁘면’ 개인의 자유가 제한되어도 상관없다.

 

그래서 기업이 “지금이 위기상황이다.”라고 말하면 어제의 정규직이 오늘 비정규직이 되어도 상관없다. 대기업이 중소기업이나 협력업체에 무슨 짓을 해도 어쩔 수 없다고 한다. 그러니 기업은 “이러다 다 망하면 누가 책임질래?”라는 협박을 난무하면서 최저임금을 찔끔찔끔 올린다. 기업이 ‘탐욕스러워서가’ 아니라, ‘기업의 탐욕’을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인 사람들 때문에 한국의 불평등은 악화된다.

 

사람들이 판을 깔아주니 기업들은 어떻게든 자신들의 이윤을 늘리려고 젖 먹던 힘을 다해 고안해 낸다. 월급을 줄이려고 ‘시급제’로 급여를 계산하더니, 1분, 2분의 ‘분단위’로 노동단가를 계산하는 ‘분급’이라는 초유의 급여체계를 만들기도 한다. 일자리의 한쪽이 이토록 엉망이 되니 ‘골고루’ 분포되어야 할 사람들의 선택이 한쪽으로 몰릴 수밖에 없다. ‘일단 나부터’ 살고 봐야 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병목현상’은 더 심해졌고 자연스레 바늘구멍을 통과하려고 경쟁하는 목록이 많아졌다. 그러니 자꾸만 ‘출발선의 다름’이 개인의 발목을 잡게 된다. ‘한국이 부모의 지위에 의해 자녀의 계층 상승 기회가 닫혀 있는 폐쇄적 사회인가?’ 이 물음에 20대의 78.8%가 ‘그렇다.’라고 응답한 건 놀라운 일이 아니다.

 

 

기회의 평등은 왜 필요한가

 

불평등은 인류의 숙명일 수 있다. 하지만 오십보백보가 거기서 거기가 아니고 무려(!) 두 배 차이인 것처럼 불평등의 무게는 사회마다 다르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자본주의 국가는 다 오십보백보다. 하지만 미세한 차이가 삶의 질을 완전히 다르게 결정한다. 이는 신의 은총이 있고 없고의 차이가 아니라 어떤 제도적 장치를 구축했는지의 차이에 지나지 않는다.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곳을 지향한다는 것은 결코 헛된 망상이 아니다.

 

기회의 불평등이 줄어들어야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기회의 불평등을 ‘감당할 수준’으로 이해하는 개인들은 다양한 선택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개인이 다양한 일을 할 수 있게 되면 그 사회는 문화적 폭이 넓어진다. 이는 궁극적으로 개인의 시야에 영향을 미친다. 다양한 것이 많기에, 사회적으로 ‘다양성을 존중’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진다. 곧 긍정적 순환이 이루어진다.

 

이를 체험한 개인들은 자연스레 ‘좋은 사회를 만드는 것’에 관심을 가진다. 왜냐하면 국가가 ‘기회의 불평등’을 줄이고자 노력할수록 자신의 생각이 존중받을 수 있는 사회적 토대가 견고해진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익적인 가치를 무시하지 않고 ‘대중의 분노(공분)’에 참여하는 것을 시민의 자격이라 여긴다. 연대와 협력을 이상한 이념의 잣대로 보지도 않는다. 일상에서의 ‘개인성’을 인정받고자 사회에 ‘집단적으로’ 목소리를 표출하는 것이 자연스러워진다. 그렇게 좋은 사회는 ‘더’ 좋아진다.

 

* 오찬호 요셉 - 사회학 박사로 서강대학교 사회과학연구소 선임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 저서로는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 괴물이 된 이십대의 자화상」, 「진격의 대학교 : 기업의 노예가 된 한국대학의 자화상」 등이 있다.

 

[경향잡지, 2016년 8월호, 오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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