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8일 (목)
(백) 부활 제3주간 목요일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성경자료

[신약] 신약 여행24: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다시 찾았다(루카 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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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12-01 ㅣ No.3534

[허규 신부와 떠나는 신약 여행] (24)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다시 찾았다”(루카 15,32)


잃어버린 아들 되찾은 아버지의 기쁨

 

 

되찾은 아들의 비유

 

루카 복음 15장의 비유에서 ‘되찾은 아들의 비유’(루카 15,11-32)는 앞선 두 비유, 곧 되찾은 양의 비유와 되찾은 은전 비유의 종합이면서 결론과도 같습니다. 예전에는 탕자의 비유로 불렸던 이 이야기의 의미를 좀 더 잘 전달하기 위해 현재에는 (잃었다가) 되찾은 아들의 비유로 부릅니다. 이야기 중심이 아들에서 아들을 맞아들이는 아버지로 옮겨간 셈입니다.

 

이 비유는 내용상 두 이야기로 이뤄져 있을 뿐 아니라 형태에 있어서도 두 이야기입니다. 비유는 각각의 이야기를 마무리 짓는 동일한 표현으로 끝나기 때문입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다시 찾았다”(루카 15,24.32). 첫 부분은 작은아들을, 둘째 부분은 큰아들을 주인공으로 삼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이야기에서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인물, 의미상 중심이 되는 인물은 바로 아버지입니다.

 

 

아버지와 작은아들의 이야기

 

첫째 이야기는 아버지와 작은아들을 다룹니다. 유산을 받아 먼 고장으로 떠난 작은아들은 재산을 탕진하고 심한 기근에 허덕입니다. 주변 고장을 찾아 돼지들이 먹는 열매로라도 배를 채우길 간절히 바랐다는 내용은 그가 처한 상황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생명을 담보 받지 못하는 상황에 있었음을 이야기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야 작은아들은 제정신이 듭니다. 우리말 표현에서도 느낄 수 있듯이 이전의 상태는 제정신이 아니었다는 것처럼 들립니다. 그는 아버지에게로 돌아가기로 마음먹습니다. 그리고 일어나 아버지에게로 갑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서 ‘회개’라는 표현은 사용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은 이러한 작은아들의 행동이 자신의 과오를 뉘우치고 그것을 바로 잡으려는 회개를 표현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비록 그것이 기근이라는 외적인 환경에서 온 것일지라도 말입니다.

 

이렇게 어렵게 돌아간 작은아들, 차마 다시 아들로 받아달라고 청하지 못하는 작은아들을 아버지는 따뜻이 맞이합니다. 복음은 “그가 아직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아버지는 가엾은 마음이 들어, 자비로운 마음으로 아들을 맞습니다. 아들이 떠난 후 아버지의 모습은 복음에서 설명하지 않지만 멀리 떨어진 아들에게 달려가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우리는 그가 작은아들을 끊임없이 기다려 왔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돌아온 작은아들, 그릇된 생각으로 잘못된 행동을 했던 이 아들이 돌아온 것은 큰 기쁨이었고 아버지는 아들을 위한 잔치를 벌입니다.

 

 

아버지와 큰아들의 이야기

 

둘째 이야기는 이러한 아버지에게 불만을 토로하는 큰아들의 이야기입니다. 한 번도 아버지의 뜻을 거절한 적 없이 매일 충실하게 아버지의 일을 했던 큰아들은 아우를 위해 잔치를 벌이는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아버지의 말에서 큰아들에게 주어진 가장 큰 선물은 아버지의 집에서 아버지와 함께 있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아직 그는 이것을 깨닫지 못한 것 같습니다.

 

이 비유는 ‘자비로운 아버지의 비유’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보여 주시는 잃은 이들을 찾고 그것에 기뻐하는 하느님의 모습과 그것을 쉽게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에 대한 비유입니다. 반복해서 표현되는 “죽었다가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다시 찾았다”는 말씀은 되찾은 양과 되찾은 은전의 비유를 요약해 줍니다. 잃은 양, 죽을지도 모르는 위험에서 되찾은 양과 잃었다가 다시 찾은 은전에 대한 내용은 이 짧은 표현 안에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아버지의, 하느님의 기쁨이고 모두 함께 즐길만한 잔치입니다.

 

사람들은 루카 복음만이 전하는 되찾은 아들의 비유를 복음서에서 찾을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로 여깁니다. 비유이지만 그 안에 하느님의 자비와 잃은 이들, 그리고 이미 하느님의 공동체 안에 있는 이들 모두를 아우르는 이야기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비유는 하느님의 자비를 통한 구원을 주제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복음의 가장 핵심적인 내용이기도 합니다.

 

[평화신문, 2016년 11월 20일, 허규 신부(가톨릭대 성신교정 성서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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