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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자료

[구약] 구약 성경의 물신: 이스라엘의 바알 숭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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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9-17 ㅣ No.3817

[구약 성경의 물신] 이스라엘의 바알 숭배

 

 

이제 하느님 백성 안의 바알 숭배를 알아보자. 구약 성경은 바알 숭배의 직간접 증언들을 비교적 풍부히 전한다. 이따금 ‘불편한 사실’을 통해 진리에 인도될 때가 있다. 성경이 전하는 하느님 백성의 단면을 직시하고, 인간의 본질과 우리의 모습을 성찰해 보자.

 

 

바알 숭배 확장의 계기

 

이스라엘의 바알 숭배는 몇 가지 역사적 계기를 겪으며 발전되었다. 시작은 이집트 탈출 직후의 광야였다. 바알은 본디 이스라엘에 내재적인 신이 아니었다. 성경은 하느님 백성이 광야에서 이웃 민족을 접하면서 바알을 알게 되었다고 전한다. 사울과 다윗으로 이어지는 이스라엘의 건국 과정은 바알 숭배 유입의 큰 계기였을 것이다.

 

고대 근동 세계에서 다신교는 국제적 표준이자 외교적 이점이 많은 사상으로 보였을 것이다. 솔로몬 시대처럼, 부국강병을 위해서 다신교의 많은 요소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세력이 득세했을 때 바알 숭배는 호기를 맞았을 것이다.

 

세 번째 계기는 예로보암이다. 그는 ‘반(反)탈출 이데올로기’의 상징이었던 바알을 ‘탈출의 주역’으로 둔갑시킨 장본인이다. 후대 신학자들은 ‘예로보암의 죄’로 그의 잘못을 엄중히 비판하였다.

 

바알 숭배의 시작은 광야 시절의 프오르였다. 민수기 25장에 전하는 프오르의 사건은 이미 민수기 안에서 ‘프오르의 그 일’(31,16)로 전하는데, 후대에 발생한 본문들도 그 행위를 무척 구체적으로 기억한다. “프오르의 바알 신을 따라간 사람들”(신명 4,3)이나, “바알 프오르에 이르자 그들은 우상에 몸을 바쳐 저희가 사랑하던 것처럼 혐오스럽게 되어 버렸다.”(호세 9,10)든지, “프오르의 바알에게 굴종하여 죽은 것에게 바친 제물을 먹었다.”(시편 106,28)등이 대표적이다.

 

이렇게 “프오르에서 지은 죄”(여호 22,17)는 ‘광야 시절의 바알 숭배’를 대표하는 사건으로서 선명히 전승된다. 프오르가 엄밀한 의미에서 바알 숭배의 ‘역사적 시작’이라고 증명하기는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바알 숭배의 ‘신학적 기점’으로서 기억되는 점은 분명하다.

 

 

바알 인명과 지명, 신전과 제단

 

고대 이스라엘의 안팎에 바알과 관련된 인명과 지명이 매우 많은 점을 볼 때 바알 숭배가 만연했던 정황을 짐작할 수 있다. 바알 관련 인명은 매우 많지만, 지면의 한계 때문에 이 글에서는 생략하겠다. 바알 관련 지명도 대표적으로 바알 가드(여호 11,17 등), 바알 하몬(아가 8,11), 벳 바알(여호 13,17), 바알 프라침(1역대 14,11 등)등으로 구약 성경에 무척 흔하다고 할 수 있다. 왜 이런 지명에는 바알이라는 이름이 붙었을까? 그 이유는 이곳에 아마 바알 신전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바알은 인간의 보편적 욕망을 자극하고 권력과 풍요를 약속하는 신으로서 시리아·필리스티아 지역에서 널리 섬겨졌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안팎에서 바알 신전을 접하는 일은 별로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기드온이 허물었던 바알 제단은(판관 6,25)이스라엘 영토 내부에 바알 신전이 존재했을 가능성을 강하게 시사한다. 아합은 아예 북왕국의 수도 사마리아에 바알 신전을 세웠고(1열왕 16,32), 예후 시대에도 그 신전은 존재했다(2열왕 10,20). 그러므로 바알 신전이나 바알 제단은 하느님 백성에게 낯선 것이 아니었다.

 

 

바알의 예언자와 사제

 

바알 신전이 있었으니, 그 신전에 종사하는 사람이 있었을 것이다. 구약성경은 일종의 ‘바알 종교 전문가’를 기억한다. 먼저 엘리야가 대결한 “바알의 예언자 사백오십 명과 아세라의 예언자 사백 명”(1열왕 18,19)을 들 수 있다. ‘바알에 의지하여 예언하는 예언자’(예레 2,8; 23,13)도 여기에 속한다.

 

엘리야는 카르멜산의 대결 직전에 백성에게 “주님의 예언자라고는 나 혼자 남았습니다. 그러나 바알의 예언자는 사백오십 명이나 됩니다.”(1열왕 18,22)고 말했다. 아합 임금과 이제벨 왕비가 모두 바알 예언자를 후원하던 시절이었다. 하느님 백성 안에서 바알 예언자들이 임금의 녹을 먹고 나라를 좌지우지했지만, 주님의 예언자는 소수의 방랑 예언자로 명맥을 유지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다. 주님의 예언자 엘리야는 하느님 백성 안에서 여러모로 불리한 현실을 감내하며 바알 예언자와 경쟁하고 대결해야 했다.

 

구약 성경은 바알 사제도 기억한다. “바알의 사제 마탄”(2열왕 11,18; 2역대 23,17)은 아마도 당대 바알 숭배의 대표적 인물일 것이다. 비교적 후대의 예언서도 바알 사제들의 존재를 기억하는 것으로 보아(스바 1,4) 바알 사제는 꾸준히 이어졌을 것 같다.

 

 

바알 의례의 정황들과 바알 행진

 

신전과 사제와 예언자가 있었으니 바알 숭배자와 바알 의례도 있었을 것이다. 구약 성경은 바알 의례를 자세히 전하지 않아서 이스라엘 안에서 구체적으로 바알 의례가 어떠했는지 ‘역사적으로 재구성’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다만 우리는 몇 가지 정황을 가늠할 수 있을 뿐이다.

 

이스라엘의 임금 아하즈야는 부상을 입고 “에크론의 신 바알 즈붑에게” 문의했다(2열왕 1,2). 아마도 임금은 바알 사제나 바알 예언자를 시켜 바알의 치유를 간청했을지도 모른다. 임금이 공식적으로 문의했으니, 이 시대에 바알 숭배는 마치 국가의 공식적 종교처럼 비쳤을 법하다.

 

이 밖에도 바알 의례를 암시하는 구절들이 구약 성경에 많다. ‘바알 식사’(민수 25,2; 시편 106,28)나 바알 신상에 절하고(1열왕 18,26.28), 바알 신상에 무릎을 꿇거나 입 맞추는 행위라든지(1열왕 19,18; 참조: 로마 11,4), 바알의 이름을 부른다든지(호세 2,19), 바알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것도(예레 12,16)여기에 속한다.

 

요시야 임금은 “바알과 아세라와 하늘의 모든 군대를 위하여 만들어 놓은 기물들을 모조리” 태워 버렸다(2열왕 23,4). 바알 의례의 특징은 단지 바알만 섬기는 게 아니라 다른 다양한 잡신들도 함께 들여온다는 특성을 지녔음을 알 수 있다.

 

구약 성경은 바알을 향한 의례를 ‘바알에게 분향한다.’고 함축적으로 표현한다. 이 표현에는 구약 성경의 지혜가 들어 있다. 초나 향에 불을 붙이는 것은 사실 인류의 거의 모든 종교에서 공통적이다. 그래서 ‘바알에게 분향한다.’는 표현은 바알 의례와 관련된 구체적인 정보에 대해서는 신중하게 침묵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표현은 요시야 임금과 예레미야 예언자와 호세아 예언자의 본문에서 두드러진다. 이 셋은 모두 신명기계 신학과 밀접한 인물들로서 바알 숭배를 극복하려고 노력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요시야 임금은 바알에게 분향하던 사제와 바알 숭배 신도들을 내쫓았고(2열왕 23,5) 분향 단을 부수었다(2역대 34,4). 예레미야 예언자는 “바알에게 향을 피우려고 세운 제단”을 꾸짖고(예레 11,13), 그런 행위는 주님을 진노케 한다고 경고했다(예레 11,17; 32,29). 호세아 예언자는 바알에게 분향한 “그 여자”를 비판하며(호세 2,15) 바알에게 향을 피운 사람은 주님과 멀어진 사람들이라고 뚜렷이 지적했다(호세 11,2).

 

이런 바알 의례를 연구하면서 개인적으로 필자의 눈길을 끈 것은 ‘바알 행진’이었다. 백주 대낮에 바알 숭배자들이 바알과 관련된 의례를 행하면서 이스라엘의 길을 활보한 것이야말로 하느님 백성 안에 바알 숭배가 얼마나 만연했는지 알려주는 사건으로서 충분하지 않을까?

 

호세아 예언자는 “바알들의 축제일”에 “바알들에게 분향하고 귀걸이와 목걸이로 단장한 채” 쫓아갔다고 꾸짖었고(호세 2,15), 예레미야 예언자는 “네가 어찌 부정하지 않다고, 바알들을 따라다니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느냐? 골짜기에서 걸었던 네 길을 살펴보고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아라.”(예레 2,23)하고 외쳤다.

 

이런 말씀에서 바알 행진의 정황을 추측할 수 있다. 아마도 특정한 바알 관련 축제일에 바알 신전에서 특정한 바알 의례를 행한 다음, 바알 신상을 앞세우고 다수가 함께 행진했을 법하다. 고대 이스라엘인에게 바알 숭배는 낯선 일이 아니었다.

 

 

겸손과 성찰을

 

구약 성경은 때로 인간의 약점을 너무도 노골적으로 남김없이 지적한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지상의 공동체인 하느님 백성은 인간적 한계에서 완벽히 자유롭지 못하다. 오히려 개인적으로나 공동체 차원에서나 인간적 욕심에 빠져 허우적대는 부끄러운 역사가 적지 않다. 성경은 그런 역사를 담담하게 우리에게 전해 준다.

 

올바른 하느님 신앙을 실천하고자 심지어 하느님 백성 안에서 경쟁하고 충돌하는 역사는 깊이 묵상하게 만든다. 이런 부끄러운 역사적 기록을 우리에게 전해 준 성경 전승자들의 마음과 지혜를 조금이나마 헤아려 보는 것이 유익할 것이다. 지금 우리는 주님의 뜻에 합당한 결정을 내리고 있는가? 부끄러운 역사를 통해 구약 성경은 우리에게 근본적 결단을 요청하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결국 구약 성경은 바알 숭배를 극복한 참된 성공과 희망의 역사를 전한다. 다음 호부터 바알 극복의 신학을 알아보자.

 

* 주원준 토마스 아퀴나스 - 한님성서연구소 수석 연구원으로 고대 근동과 구약 성경을 연구하는 평신도 신학자이다. 주교회의 복음화위원회 위원이자 의정부교구 사목평의회 위원이다. 저서로 「구약 성경과 신들」과 「신명기 주해」 등이 있다.

 

[경향잡지, 2017년 9월호, 주원준 토마스 아퀴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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