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0일 (토)
(백) 부활 제3주간 토요일(장애인의 날)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선교ㅣ복음화

커뮤니케이션(의사소통)과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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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11-15 ㅣ No.619

[미디어 세상] 커뮤니케이션(의사소통)과 교회 (1)

 

 

인간이 사회 미디어 커뮤니케이션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서 큰 선익을 얻을 수도 있고 큰 해악을 입을 수도 있습니다. 흔히 ‘미디어’가 선익이 되기도 하고 해악이 되기도 한다고 말하지만, 그것이 인간의 통제를 벗어나는 맹목적인 자연의 힘은 아닙니다. 커뮤니케이션(의사소통) 행위가 예기하지 못한 결과를 가져오는 경우가 종종 있기는 하지만, 미디어가 좋은 목적에 이용되는가 나쁜 목적에 악용되는가, 또는 올바른 방법으로 이용되는가 나쁜 방법으로 악용되는가 하는 것은 사람들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교회가 사회 미디어 커뮤니케이션에 관심을 갖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습니다. 하느님 구원의 역사는 모든 의사 전달 형태와 방법을 이용한 하느님과 인간의 커뮤니케이션(의사소통)을 이야기하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신앙에 비추어 볼 때, 인간 커뮤니케이션의 역사는 커뮤니케이션의 붕괴를 상징하는 장소인 바벨 탑<주님께서는 그들을 거기에서 온 땅으로 흩어 버리셨다. 그래서 그들은 그 성읍을 세우는 일을 그만두었다. 그리하여 그곳의 이름을 바벨이라 하였다. 주님께서 거기에서 온 땅의 말을 뒤섞어 놓으시고, 사람들을 온 땅으로 흩어버리셨기 때문이다. 창세 11,4-9 참조)>에서부터 육화를 통해 세상에 오신 성자를 통한 커뮤니케이션과 성자께서 승천하시어 보내신 성령의 힘으로 커뮤니케이션이 복구되는 성령 강림 사건과 이상한 언어의 선물<“지금 말하고 있는 저들은 모두 갈릴래아 사람들이 아닌가? 그런데 우리가 저마다 자기가 태어난 지방 말로 듣고 있으니 어찌 된 일인가? 파르티아 사람, 메디아 사람, 엘람 사람, 또 메소포타미아와 유다와 카파도키아와 폰토스와 아시아 주민, 프리기아와 팜필리아와 이집트 주민, 키레네 부근 리비아의 여러 지방 주민, 여기에 머무르는 로마인, 유다인과 유다교로 개종한 이들, 그리고 크레타 사람과 아라비아 사람인 우리가 저들이 하느님의 위업을 말하는 것을 저마다 자기 언어로 듣고 있지 않는가?”(사도 2,5-11 참조)>에 이르는 오랜 여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기쁜 소식을 알리러 세상에 파견된<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19-20; 마르 16,15 참조)> 교회는 시간의 종말에 이를 때까지 복음을 선포할 사명이 있습니다. 오늘날 복음 선포를 위해서는 미디어를 사용하여야 한다는 것을 교회는 잘 알고 있습니다<“그러므로 그리스도인 교육과 영혼의 구원을 위한 모든 활동에 필요하다면 그 무슨 종류이든 이러한 매체들을 사용하고 소유할 천부의 권리가 교회에 있으며… 신자들이 또한 이 매체의 도움으로 온 인류 가족의 구원과 발전을 추구하도록 가르치고 지도할 임무가 거룩한 목자들에게 있다. 그리고 이 매체에 인간적이고 그리스도교적인 정신을 불어넣어 인류 사회의 커다란 기대와 하느님 뜻에 완전히 부응하게 하는 것은 특별히 평신도들이 할 일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사회 매체에 관한 교령 「놀라운 기술」 (Inter Mirifica, 3항).> [2019년 11월 10일 연중 제32주일(평신도 주일) 전주주보 숲정이 3면, 송광섭 클레멘스 신부(홍보국장)]

 

 

[미디어 세상] 커뮤니케이션(의사소통)과 교회 (2)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버지께서 누구이신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루카 10,22) 하느님과 인류의 커뮤니케이션(의사소통)은 사람이 되신 말씀 안에서 완전해졌습니다. 예언자들과 사제들을 통하여 하느님께 제사를 드리고, 하느님의 말씀을 듣던 방식이, 예수님을 통한 직접적인 커뮤니케이션(의사소통)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예수님을 통한 직접적인 통로는 하느님께서 당신을 드러내시는 사랑의 행위에 대한 인류의 신앙적인 응답과 결합되어 풍요로운 대화를 낳았습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우리도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루카 11,1) 하고 하느님과의 대화를 요청한 제자들과 같은 요청을 함으로써 놀라운 커뮤니케이션(의사소통)을 통하여 하느님과 제자들뿐만 아니라 나 자신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하느님과 대화할 수 있는 방법을 알게 해달라고 청할 수 있습니다. 또 하느님과의 대화를 통하여 다른 사람들과 대화할 수 있는 방법을 알게 도와 달라고 주님께 청할 수도 있습니다.

 

강생 하신 말씀께서는 침묵과 명상의 순간에서든 장소와 방법을 가리지 않은 말씀과 행동을 통해서든 우리에게 하느님 아버지와 또 인류와 대화를 나누는 방법에 대한 본보기를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아버지를 성경을 통해 설명해 주시기도 하고 당신 자신을 비유로 나타내시기도 하며, 삶으로 삼위일체의 사랑과 의지를 보여주시기도 하십니다. 집 안에서 친밀히 대화하시기도 하고 광장이나 거리, 호숫가, 산꼭대기, 평원 등 모든 곳에서 구애받지 않으시고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말씀하시기도 합니다.

 

“anytime, anywhere”

“anytime you want”

 

언제든지, 어디에서든 당신이 원하실 때 하느님과 사람들과 커뮤니케이션(의사소통)을 하시는 예수님의 역할에서 볼 때, 너무도 확고하고 결정적인 커뮤니케이션(미디어)의 위치를 비추어볼 수 있습니다. 미디어는 시간과 장소, 언어의 장벽을 넘어 모든 곳의 사람들에게 다가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다양한 방법으로 신앙의 내용을 제시하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 충만히 계시된 하느님의 신비와 대화를 나눌 수 있게 해 주는 가능성을 찾는 모든 사람에게 섭리의 기회를 제공합니다. [2019년 12월 22일 대림 제4주일 전주주보 숲정이 3면, 송광섭 클레멘스 신부(홍보국장)]

 

 

[미디어 세상] 커뮤니케이션(의사소통)과 교회 (3)

 

 

커뮤니케이션(의사소통)이 완전한 친교가 되는 절정의 순간이 있다. 곧 성찬의 전례이다. 교회는 자신이 친교(communio)임을 알고 있다. 곧 교회는 인간들 사이의 친교이며, 성삼위의 친교에 뿌리를 두고 그것을 반영하는 성찬 공동체들의 친교이다. 실제로 인간의 모든 커뮤니케이션(의사소통)은 성부, 성자, 성령의 커뮤니케이션(의사소통)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러나 성삼위의 친교는 더 나아가 인류와 맞닿아 있다.

 

성자께서는 말씀이시며, 성부께서는 그 말씀을 통하여 영원히 “말씀하신다.” 또한 하느님께서는 사람이 되신 말씀이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사람들에게 당신 자신과 당신의 구원을 전하신다. “하느님께서 예전에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여러 번에 걸쳐 여러 가지 방식으로 조상들에게 말씀하셨지만, 이 마지막 때에는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히브 1,1-2). 교회 안에서 그리고 교회를 통한 커뮤니케이션(의사소통)은 성삼위의 사랑의 커뮤니케이션(의사소통), 그리고 성삼위와 우리의 커뮤니케이션(의사소통)을 그 출발점으로 한다.

 

구원에 힘입어, 신자들의 커뮤니케이션(의사 소통) 능력이 회복되고 새로워졌다. 그리스도와 만남으로써 신자들은 새로운 피조물이 되고, 십자가 위의 죽음을 통해 예수님께서 피로써 얻으신 그 백성의 일부가 되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완벽하고 무한한 사랑의 커뮤니케이션(의사소통)이 지속되고 순환하는 삼위일체의 내밀한 생명에 참여하게 된다.

 

커뮤니케이션(미디어)은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도록 부름 받은 교회의 본질적 차원에 침투하고 있다. 따라서 교회는 미디어가 제공하는 기회를, 하느님께서 친교를 증진하고 당신 말씀이 더욱 깊이 선포되도록 하시기 위하여 주신 섭리의 길로 이용한다. 미디어는 지역 교회들 간의 더욱 긴밀하고 직접적인 교류를 촉진하고, 상호 인식과 협력을 키워 줌으로써 하느님 백성의 보편적인 성격을 드러나게 해 준다.

 

우리는 이 강력한 미디어의 존재에 대하여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이라 말한다. 신자들이 미디어를 신앙의 정신으로 성령의 빛에 따라 이용하기만 한다면 미디어는 복음 전달에 도움을 줄 수 있으며 교회 공동체들 간에 더욱 실질적인 친교의 유대를 다질 수 있게 해 줄 것이다. [2020년 3월 1일 사순 제1주일 전주주보 숲정이 3면, 송광섭 클레멘스 신부(홍보국장)]

 

 

[미디어 세상] 커뮤니케이션(의사소통)과 교회 (4)

 

 

가. 사람과 문화에 봉사하는 미디어

 

일치와 이해의 효과적인 수단이 될 수 있는 미디어는 모든 선한 일을 수행하거나 수행할 수 있음에도 삶과 가정, 종교와 윤리에 대한 잘못된 생각과 인간의 참된 품위나 미래를 존중하지 않는 풍조를 가져오는 경우가 생겼습니다. 미디어가 인간과 사회의 문화적이고 초월적이며 종교적인 차원을 파악하여 총체적 인간 발전을 도모하고 또 그에 기여해야 하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입니다.

 

어떤 사람은 미디어 이용의 급증과 허구적인 미디어 특성에 집착하는 현상이 사람들 간의 상호 작용을 대치시켰고, 이 때문에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문제가 발생한다고 보고 있습니다. 어떤 경우이건 미디어가 사람들 간의 직접 접촉이나 가족 간, 친구 간의 상호 작용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어려움을 극복하는 것도 일반적으로 미디어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미디어를 집단 간의 대화, 영화나 방송에 관한 토론 등으로 사용하면 커뮤니케이션(의사소통)을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들끼리의 커뮤니케이션을 촉발시키게 됩니다.

 

 

나. 인간 공동체와 발전에 봉사하는 미디어

 

교회 안의 커뮤니케이션, 그리고 교회를 통한 커뮤니케이션은 기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기쁜 소식을 전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언자처럼 복음을 선포하며 현대의 모든 사람을 하느님께로 이끄는 것입니다. 또한 커뮤니케이션은 극도로 세속화된 현실에 대해서 하느님의 진리와 인간의 초월적인 목표를 증언하는 작업입니다. 커뮤니케이션은 갈등과 분열을 거슬러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연대 의식을 증언하는 것이고 다른 민족, 국가, 문화 속에서 정의와 일치를 증언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입장에서 커뮤니케이션을 독특하게 조명하게 하고 하느님의 섭리에 따라 그 역할을 이해한다는 것은 미디어가 인간과 사회의 총체적 발전을 도모하는 데 어떤 역할을 맡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 교회 일치에 봉사하는 미디어

 

커뮤니케이션은 교회 안에서 대화와 정보 소통의 중요성을 언제나 기억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중요성을 인식하고 보호하고자 미디어의 책임 있는 사용 등 효과적인 수단을 찾으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부분적으로 교회의 신뢰성과 효율성을 지키고 현양 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근본적인 것은 성삼위의 친교에 뿌리를 두고 성삼위를 반영하는 교회의 특징인 일치를 명백하게 인식시키는 한 방법이라는 점입니다.

 

교회를 구성하는 공동체의 구성원들 간에는 세례성사를 통해서 하느님의 한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한 자녀라는 것은 교회의 모든 구성원이 교회 안에서 일치를 이루어야 함을 말합니다. 미디어는 그 교회 일치에 봉사해야 합니다. [2020년 9월 6일 연중 제23주일 전주주보 숲정이 3면, 송광섭 클레멘스 신부(홍보국장)]

 

 

[미디어 세상] 커뮤니케이션(의사소통)과 교회 (5)

 

 

라. 세상과 대화할 수 있도록 봉사하는 미디어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인류와 인류 역사에 친밀하게 결합되어 있는”(사목헌장 11항) 하느님 백성을 인식하고 이 점을 강조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선호하는 사람들은 여러 민족과 다양한 문화의 ‘표현’을 알아들으려 하고 주의를 기울일 의무를 지닙니다. 이것은 그들에게서 교훈을 얻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하느님 말씀을 알아듣고 그것을 받아들이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세상과 관련된 현상에 귀를 기울이고, 적극적인 자세를 견지해야 합니다. 그러한 자세는 공동체를 육성하고, 사회의 문제들을 합당하게 해결하려는 사람들을 도와주는 것을 말합니다. 더 나아가서 교회는 언제나 어느 특정 국가나 국민들의 연령층이나 삶에 맞는 메시지로 의사소통을 해 온 것과 같이 오늘날에도 교회는 새로 생기는 미디어 문화 속에서 그리고 그것을 겨냥해 의사소통을 해야 합니다. 이 점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이룩해 놓은 결정적인 계기에 화답하는 기본 요건입니다. “오늘날 다양한 사회적 기술적 문화적 유대로 더욱 가까이 연결되어 있는 모든 사람이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일치를 이루게 하여야 할 교회의 이러한 직무는 현대의 상황에서 한층 더 절박해지고 있다.”(교의헌장) 의사소통을 위한 미디어의 일치를 다지기 위한 노력이 얼마나 중요한 공헌을 하고 있느냐를 고려할 때, 교회는 미디어를 의사소통의 확대와 지상에서 순례 행진 중인 인류의 일치를 위해 “하느님의 섭리로 이런 기계들이 발명되었다.”(「일치와 발전」 12항)고 보고 있습니다.

 

따라서 현대 사회와의 대화의 장(場)으로 들어가려면 교회는 미디어를 책임지고 있는 사람들과 솔직하고 존경 어린 대화를 해야 합니다. 교회 입장에서 본다면 이 대화는 미디어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수반합니다. 그것은 미디어의 목적, 작업 과정, 형태와 유형, 내부 구조, 행위 양식을 말합니다. 그리고 교회는 미디어 운영에 관여하고 있는 사람들을 지원하고 격려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공감대를 지닌 이러한 이해와 지원을 바탕으로 삼는다면, 이 대화는 인간 발전과 복음 선포에 방해가 되는 장애물을 제거할 수 있는 의미 있는 대안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

 

 

마. 새로운 복음화에 봉사하는 미디어

 

복음 선포에 필요한 교리공부, 성경공부, 선교, 전례 등에 미디어의 이용은 오늘날 복음화와 교리 전파에 꼭 필요한 것입니다. 미디어는 현대 사회에 있어서 재복음화와 신복음화를 겨냥하는 교회의 계획을 위한 도구가 될 수 있고 또 되어야 합니다. “보고, 판단하고, 행동하라.”는 옛 글귀가 입증하듯이 복음화에 있어서 미디어의 시청각적인 측면이 면밀하게 배려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미디어나 문화에 교회가 접근할 때 늘 다음과 같은 점을 중요한 것으로 간직하고 있어야 한다. 곧 “오직 그리스도교 메시지와 교회의 참된 가르침을 전파하는 데에만 매체를 이용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현대의 의사소통이 만든 ‘새로운 문화’ 안에, 새로운 언어와 새로운 기술, 새로운 심리로 그리스도교 메시지를 통합시켜야 한다.”(「교회의 선교 사명」 37항) 오늘날 복음화 사업은 미디어 속에 교회가 적극적으로 공감하며 뛰어드는 쪽으로 변화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미디어는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못합니다. 미디어는 사람들이 쓰고자 하는 용도에 따라 이용되는 수단이며 도구일 뿐이며, 미디어를 이야기하면서 우리는 ‘미디어를 통해 인간이 정말 더 나아지고 있는가?’를 숙고해야 합니다. 곧 신앙적으로 성숙, 공동선의 추구,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에 대해서 숙고해야 합니다.

 

미디어는 엄청난 힘을 지녔지만 단지 미디어일 뿐이며, 또 미디어로 머무를 것입니다. 다시 말해, 미디어는 선을 위해서도 또 악을 위해서도 쓰일 수 있는 수단이며 도구일 뿐입니다. 선택은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 [2020년 11월 15일 연중 제33주일(세계 가난한 이의 날) 전주주보 숲정이 3면, 송광섭 클레멘스 신부(홍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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