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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ㅣ기도ㅣ신앙

[영성] 프란치스칸 영성7: 누구도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에 관면을 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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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09-01 ㅣ No.1468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의 인격 그리고 프란치스칸 영성] (7) “누구도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에 관면을 줄 수 없다”

 

 

아시시의 성녀 클라라.

 

 

클라라, 프란치스코를 만나다

 

클라라는 포르치운쿨라에서 프란치스코를 만났다. 이 성당의 동정 성모상 밑에서 클라라는 프란치스코에게 자신의 부드러운 금발 머리를 자르게 하였다. 그녀는 자신의 귀족 옷을 벗고 회개자의 옷으로 바꾸어 입었다. 프란치스코는 몇몇 형제들과 함께 그녀를 안전한 장소인 바스티아 움브라(Bastia Umbra)에 있는 산 파올로(San Paolo) 베네딕도 수녀원으로 피신시켰다. 클라라의 가족은 그곳에 가서 클라라에게 집으로 되돌아올 것을 요구하곤 하였지만, 그곳에서 클라라는 보호를 받고 있었다. 그곳은 출입이 허락되지 않은 외부인에 대해 교황령의 통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클라라는 그곳에서 잠시 머문 후, 수바시오 산기슭에 있는 판조의 산 안젤로(Sant‘Angelo de Panzo) 베네딕도 수도원으로 옮겼다. 거기서 클라라의 동생 가타리나(Caterina-후에 아녜스라는 이름으로 바꿈)가 언니를 따라 이 운동에 함께하게 되었다. 삼촌인 모날도(Monaldo)가 와서는 강제로 가타리나를 집으로 데리고 가려 했으나 그의 이런 계획은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프란치스코는 클라라와 그의 동생 아녜스를 성 다미아노 성당으로 보냈다. 그가 예언한 대로, 성 다미아노의 가난한 자매들의 회(Order of Poor Ladies of San Damiano)가 창설된 곳이 바로 이곳인 것이다. 이 작은 성당과 그곳 가까이에 있었던 수도원에서 재산이나 소유도 없이 관상의 삶을 시작하였다. 자신이 죽던 해인 1253년 8월 11일까지 클라라는 한 번도 성 다미아노 성당을 떠난 적이 없었다. 거기에서 클라라는 두 명의 교황(인노첸시오 3세와 그레고리오 9세)에게 자신의 자매들을 위하여 가톨릭교회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가난의 특전’을 허락받기도 하였다. 이는 철저하게 가난하신 그리스도께만 의탁하고자 했던 클라라의 의지를 표현하는 하나의 예이다.

 

클라라의 이런 의지는 교황마저도 꺾을 수 없을 만큼 강렬했었다고 한다. 그레고리오 9세 교황이 클라라에게 서약한 가난을 관면해 주겠다고 했을 때에 클라라가 교황에게 한 유명한 말이 있다. “누구도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에서 관면을 줄 수 없습니다!” 클라라의 이 말은 그레고리오 9세 교황으로 하여금 그 유명한 ‘가난의 특전’을 재확인하게 해준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이곳에서 클라라의 어머니 오르톨로나(Ortolana)와 또다른 동생 베아트리체(Beatrice)마저도 클라라와 그 자매들의 삶에 합류하였다. 이곳에서 클라라는 천신만고 끝에 작은 형제들의 회칙을 모범 삼아 자신이 쓴 회칙을 인준 받았다. 이것은 그녀가 자신을 창조해 주신 것을 찬양하면서 세상을 떠나기 바로 이틀 전의 일이었다.

 

 

복음적 삶 안에서 봉쇄 - 관상의 삶 실현

 

클라라의 관상의 삶은 외적으로 설교를 하러 다녔던 프란치스코와 그의 형제들의 삶을 보충해 주는 특전적 삶이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여기서 분명하게 언급해야 할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클라라가 프란치스코에게서 영감을 받아 선택한 삶의 방식이 ‘복음적 삶’이었지, 수도승적 삶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클라라의 첫 의도가 봉쇄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클라라가 봉쇄-관상의 삶을 거부했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클라라가 선택한 첫 번째 삶의 방식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따라 살아가는 프란치스코의 삶과 같은 것이었고, 교회가 요구한 봉쇄-관상의 삶을 복음적 삶의 방식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여 살아갔고, 이 삶에 합류한 다른 자매들도 봉쇄-관상의 삶을 복음적 삶의 빛 안에서 살아가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수도 규칙서」(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여성에 의해 쓰였고, 교회가 인준한 수도회 규칙서)를 프란치스코의 복음적 삶의 「수도 규칙서」를 모델 삼아 봉쇄-관상의 삶에 적용하여 작성하였던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이 클라라의 「수도 규칙서」는 가난과 작음을 살고자 열망하였던 프란치스코의 복음적 삶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부단히도 노력한 클라라의 이상이 담긴 것이기도 하고, 또한 프란치스코의 조언을 따라 그리스도를 따르는 ‘가난의 이상’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으려는 클라라의 열정이 담긴 또 하나의 ‘가난의 특전’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실제로 클라라는 1219년 우리 작은형제회 역사 안에서 처음으로 모로코에서 다섯 명의 형제가 순교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자신도 모로코에 가서 복음을 살고 전파하다 순교하고 싶다는 강렬한 열망을 표현하기도 했다고 한다.

 

 

프란치스칸 운동의 양대 기둥

 

사실 클라라는 프란치스코의 이상을 여성적인 섬세함으로써 가장 잘 이해한 프란치스코의 동료요 추종자였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클라라는 프란치스코에게 복음적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가장 큰 영향을 준 여인이기도 하다. 이런 관점에서 보더라도 클라라는 프란치스코와 더불어 프란치스칸 운동의 양대 기둥이라 불릴만한 자격이 있는 성녀가 아닐 수 없다.

 

그렇기에 클라라에게 있어 ‘봉쇄’의 개념은 육신의 공간적 제약이라기보다는 고요와 침잠 안에서 그리스도를 사랑과 ‘동정’(compassion)의 시선을 의식하고 다시 그분께 시선을 돌려드리는 행위가 포함된 관계적 역동성인 것이고, 또한 이런 ‘역동적 바라봄’을 통해 우리에 대한 넘치는 사랑 때문에 우리 중 한 사람으로 오신 가난하신 그리스도를 자신들의 마음에 담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가톨릭평화신문, 2020년 8월 30일, 호명환 신부(작은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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