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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교리

진리를 찾아서: 겸손에 관하여 - 겸손의 세 단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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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10-24 ㅣ No.2059

[진리를 찾아서 - 겸손에 관하여] 겸손의 세 단계

 

 

남들에게 자신을 알리고 싶거나, 알려야 하는 사회 분위기가 대세인 요즘, ‘겸손’이란 덕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요? “이런 시대에 겸손을 어디에 쓰려고?” 하실 분도 있겠지요. 하지만 여전히 겸손의 덕은 사람을 아름답게 만들어주는 삶의 중요한 요소입니다. 또한 하느님 앞에서 보여 드릴 수 있는 신앙인의 가장 인간다운 덕입니다.

 

언뜻 겸손은 자신감이 없거나 자존감이 낮은 이들이 보이는 태도와 비슷해 보여도 그 속성은 전혀 다릅니다. 자신의 모습을 왜곡하거나 과장하지 않고 그대로 드러내며, 이웃의 모습도 왜곡하거나 과장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이는 태도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진실한 친절과 평온함을 전해 줍니다.

 

 

경험

 

그래서 겸손의 덕이 깊은 사람은 예수님을 연상시킵니다. 하지만 평범한 이들은 오히려 겸손을 불편해할지도 모릅니다. 종종 ‘안 그래도 되는데 꼭 그렇게 자신을 낮출 필요가 있는가?’ 하는 당혹감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나는 겸손한 사람인가?’ 하고 스스로 묻는다면, 겸손이 제가 지니고 있는 덕이라고 고백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 대신 겸손함을 전해 주시는 분들을 알고 있을 뿐입니다. 추상적인 덕을 직접 보고 느끼게 해 주시는 분들을 따라 살면서 저도 겸손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다가도 누군가가 나의 자존심을 건드리면 같이 맞받아치는 못된 기질이 그동안의 노력을 한순간의 물거품으로 만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노력하지 않는 것보다는 가끔씩 좌절하더라도 노력하는 것이 낫다고 믿습니다. 함께 지내는 형제와 이웃을 대할 때 전보다 더 부드러워졌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저 자신이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고 스스로 격려하곤 합니다.

 

겸손으로 제게 영향을 끼치시는 분이 여럿 계십니다. 그 가운데 삶의 가장 낮은 곳에서 그곳 사람들과 함께하면서 하느님의 현존을 나누는 샤를 드 푸코의 후예들이 가장 먼저 떠오릅니다.

 

이들은 노동하는 수도자들입니다. 사회에서 소외된 가난한 이들의 삶에 함께 녹아들어 그들과 함께 생활하며 그 삶의 현장에서 하느님을 체험하고자 합니다. 자발적으로 가난을 선택한 이들입니다. 이 가난이 그들의 삶을 겸손으로 이끌어줍니다.

 

또 한 분은 요셉의원의 설립자인 고 선우경식 요셉 박사님입니다.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눠 본 적은 없으나 제가 십 년이 넘도록 그 정신을 배우고 있는, 겸손의 삶을 사셨던 분이십니다.

 

2008년 봄에 그분이 돌아가시고 난 뒤 부탁을 받고 그곳에 미사를 봉헌하러 갔습니다. 사실 그 전까지 그분의 삶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그곳에 갔을 때야 비로소 박사님의 삶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조금 더 일찍 찾아왔어야 했는데….’ 하며 깊이 후회하던 제 모습이 기억납니다.

 

박사님은 돈이 없어 제대로 치료받지 못한 채 병을 앓다가 결국 길에서 죽어 가는 행려자들을 살리고 싶어 요셉의원을 시작하셨습니다. 그 뒤 친구 의사들의 도움으로 행려자들에게 다양한 진료와 치료를 하였습니다.

 

박사님은 술에 취한 상태로 의원에 들어와 횡포를 부리던 사람도 보살펴 주었습니다. 또한 환자의 상태가 심각해져 의원에서 치료가 어려워지면 환자를 둘러업고 치료가 가능한 친구 의사의 병원에 가 애원하며 행려자를 입원시키곤 하셨습니다.

 

이렇게 사시면서 잠들기 전에는 그들에게 모질게 대한 것은 없었는지 성찰하셨다고 합니다. 그렇게 불꽃처럼 살다가 홀어머니를 남겨 두고 암으로 돌아가셨습니다. 돌아가시기 이틀 전에도 의원에서 진료하셨다고 하니, 지극히 삶에 충실하셨던 분입니다.

 

나중에 알았지만, 박사님 또한 샤를 드 푸코의 영성을 따라 살고자 하셨던 분이었습니다. 그분이 결혼하지 않으신 것도 스스로 청빈과 정결 서원을 하셨기 때문은 아닐까 추측해 봅니다. 참으로 수도자처럼 사셨던 분입니다.

 

마지막으로, 2013년부터 지금까지 여름과 겨울 방학을 이용하여 ‘생명평화탈핵순례’를 기획하고 이끄는 성원기 선생님을 꼽고 싶습니다. 우리에게 위험 요소인 핵 발전소를 줄이고 환경을 보듬고자 다양하게 실천하시는 분입니다.

 

선생님이 순례를 계획해 공지하면 열정에 찬 시민들은 시간이 허락되는 만큼 도보 순례에 함께합니다. 이렇게 해서 올여름까지 장장 6천 킬로미터를 함께 걸었습니다. 선생님과 함께 그 길을 걷는 시민들은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핵의 위험을 알리고 에너지에 대한 진실을 전하고자 길 위에서 기도하며 걷고 있는 순례자들입니다.

 

 

성찰

 

로욜라의 이냐시오 성인은 「영신 수련」에서 겸손에는 세 단계가 있다고 알립니다.

 

첫째 단계의 겸손은 십계명을 거스르지 않는 것입니다. 계명을 지키는 것으로 하느님 앞에 겸손함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 대부분이 이 정도의 겸손을 실천하며 살아가고자 합니다.

 

둘째 단계는 하느님께 봉사하고자 꼭 필요한 것이 아니라면 가난보다는 부귀를, 불명예스러움보다는 명예를 원하지 않고 생명을 유지하려고 마음으로 짓는 죄라 볼 수 있는 소죄도 범하지 않으려는 태도입니다. 쉽게 말해 이웃에게 상처를 주는 이야기도 함부로 하지 않습니다.

 

셋째 단계는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입니다. 예수님의 삶을 본받아 부와 명예보다는 오히려 가난을 선택하고, 모욕도 받아들입니다. 오래 살려는 바람도 없습니다. 이것이 가장 높은 경지의 겸손입니다.

 

앞에서 소개한 분들이 지고의 겸손에 이른 분들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가난을 통해 하느님에 대한 깊은 신뢰를 배운 분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삶에 동조하기를 기대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신념에 따라 행동한 분들입니다. 아주 탁월하지는 않지만 평범한 이들이 이분들처럼 살기는 쉽지 않아 보입니다.

 

사실 우리가 세례 때 부여받은 세례명의 성인은 대부분 이렇게 살았던 겸손한 이들이었습니다. 주위를 둘러보면, 이런 성인과 같은 분들이 지금 우리 곁에도 계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하지만 이분들의 아름다운 삶이 우리에게 버겁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우리는 무엇 때문에 이분들의 삶을 버거워하며 바라보는 것일까요? 꼭 그럴 필요는 없다지만, 자기 자신을 낮출 줄 아는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요? 그것은 그리스도를 닮아 가난해지려는 원의와, 내게 주어진 현실에 충실하려는 열망에서 비롯됩니다.

 

우리는 없이 사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빈곤을 겪은 이들에게 가난을 이야기하는 것은 잔인한 일입니다. 피치 못한 가난과 스스로 선택한 가난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전자는 가진 것을 벗어버리려고 넘어야 하는 유혹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무엇보다도 재물에 좌우되는 자신의 현실을 봐야 합니다. 그러나 후자는 재물에 좌우될 필요가 없습니다.

 

 

실천

 

삶의 여러 갈림길에서 늘 부딪히는 고민은 그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선택의 순간에서 평범한 사람들은 온갖 조건의 경우를 모두 고려합니다.

 

하지만 겸손한 사람들의 선택 기준은 매우 단순해 보입니다. 어느 것이 그리스도의 삶에 더 가까운 삶인지가 선택의 기준이 됩니다. 그리스도를 더욱 닮아 일치감을 누리며 행복해지려는 삶입니다.

 

인생의 갈림길에서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잘 알지 못하겠거든 좀 더 어려운 일을 택하는 것이 그릇됨을 피할 수 있다고 알려 주신 분이 있습니다. 매우 영적이며 일리 있는 조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좁은 문’과도 연결되는 지점입니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얼마나 좁고 또 그 길은 얼마나 비좁은지, 그리로 찾아드는 이들이 적다”(마태 7,14). 이 성경 구절은 그리스도교 신자도 정작 그리스도의 삶을 그대로 따르는 일을 어려워한다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일상에서 선택의 순간에 내 본성에 따라 가볍게 결정짓는 것을 거슬러 선택해 보는 훈련을 해 봅시다. 곧 일반적으로 해 왔던 나의 편의대로가 아닌 평소와는 다르게 선택해 보는 것입니다.

 

마음 안에 자유를 더욱 키워볼 수도 있습니다. 이는 내 맘대로 무엇을 할 수 있다는 의미의 자유가 아니라 내가 재물이나 사람들의 평판과 같은 외적인 조건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다는 뜻입니다.

 

결국 겸손의 가장 높은 단계는 묘하게도 그분의 겸손을 닮는 것으로 마무리됩니다. 곧 겸손하신 예수님을 닮아 하느님의 겸손과 자유를 따르는 삶입니다.

 

* 박종인 요한 - 예수회 신부. 청소년 사목을 맡고 있으며, 서강대학교에서 ‘성찰과 성장’ 과목을 담당하고 있다. 「교회 상식 속풀이」를 펴냈다.

 

[경향잡지, 2018년 10월호, 박종인 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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