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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신앙 선조의 불꽃 같은 삶: 하느님의 종 김범우 토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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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7-05 ㅣ No.1771

[신앙 선조의 불꽃 같은 삶] ‘하느님의 종’ 김범우 토마스

 

 

- ‌김범우 토마스.

 

 

지난해 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는 ‘하느님의 종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에 대한 시복자료 제1집을 간행하였습니다. 이에 자료집의 내용을 발췌하여 게재합니다. ‘하느님의 종’ 133위는 모두 평신도이며, 자발적 신앙 공동체를 세운 한국교회 초기 신자들로서 오늘을 사는 우리 평신도에게는 언제나 모범 중에 모범입니다. 그들에 관한 자료를 함께 읽어보면서 ‘평신도 희년’을 맞아 역사를 공부하고 실천하는 삶을 사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한 첫 공로자

 

“김범우 토마스(金範禹, 1751-1787년)는 순교의 영광을 받았다. 구세주가 우리를 위해 골고타에서 수난하신 것처럼 그는 이 나라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죽음을 구세주에게 바치는 영광을 가졌다. 그는 처음으로 이 나라에서 하느님이 우리의 왕이고 우리의 아버지이므로 충성과 참된 효성으로 지워진 의무는 하느님을 섬기기 위하여 죽음까지도 겪는 것을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을 자신의 피의 목소리로 증언하는 영광을 가졌다. 그는 처음으로 육신은 형벌에 쓰러질 수 있을지라도 영혼은 죽지 않고 완전한 불멸의 희망에서 살아남는다는 사실을 이 극동의 폭군들에게 알리는 영광을 가졌다. 그러므로 조선의 수많은 순교자들 무리의 첫머리에 당연히 놓아야 할 것이다.”

 

제5대 조선대목구장 성 다블뤼(Daveluy, 1818-1866년) 주교는 『조선 순교사 비망기』에 김범우를 언급하면서 여러 차례 그가 한국교회사에서 ‘처음으로’ 겪어냈던 사건을 강조했다. 또한 『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에서도 “비록 참수당하지는 않았지만 그가 신앙의 증거자로 죽었다는 것은 참되다. 김범우는 재판관들 앞에서 또 여러 형벌을 받는 중에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공로를 지녔고 뒤에 오는 이들에게 모범을 보였다.”고 언급했다.

 

다블뤼 주교는 자신이 『비망기』와 『약전』을 정리하던 불과 몇 해 전에도 “단양의 나이든 아전들은 외교인이면서도 여전히 존경심을 갖고 그에 대해서 말하곤 했다.”고 기록하였으니, 김범우 토마스가 아직 성인 반열에 들지 않은 것은 ‘하느님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고 생각될 뿐 다른 이유를 찾을 수 없겠다.

 

 

씨앗에 떨어진 한 방울의 피

 

‘하느님의 종’ 김범우는 1751년(영조 27) 서울 남부의 명례방(현 명동 성당 부근)에서 중인 역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본래 대대로 무관을 역임했으나, 부친이 역관 시험에 합격하여 사역원의 역원 판관에 오르면서 역관 집안으로 이름을 내게 되었다. 김범우는 집안의 장남으로 16세 되던 1767년에 천녕 현씨와 결혼한다. 부인 현씨[玄載淵]는 1801년에 순교한 복자 현계흠 플로로의 사촌으로, 혼인한 이듬해에 아들 인구를 낳았다.

 

『시복 자료집』에는 이러한 사실을 알 수 있는 김범우 집안 소장 문서들 - 가첩 「경주김씨 세보」, 기일록 「장생보록첩」, 김동엽(김범우의 손자)의 「호구단자」 - 과 조선시대 통역관 등용시험인 역과 합격자의 주요 인적 사항을 적은 「역과방목」이 실려 있다.

 

잘 알려진 대로 김범우는 이벽(요한), 이승훈(베드로) 등 초기 천주교 신자들과 가깝게 지냈다. 그는 이승훈이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온 1784년 가을에 수표교 인근에 있던 이벽의 집에서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고 입교했다. 세례를 받은 즉시, 윤지충(바오로), 김종교(프란치스코), 홍익만(안토니오), 최필공(토마스), 변득중, 허속 등에게 교리를 전하거나 교회 서적을 빌려 주었다.

 

『정조실록』을 보면 조상의 신주를 불태운 사건, 즉 진산사건으로 순교한 복자 윤지충이 김범우에 대해 언급한 부분이 있다. 윤지충은 공초에서, “계묘년(1783) 봄 진사시에 합격하고 갑진년(1784) 겨울 서울에 머무는 동안 마침 명례동의 중인 김범우의 집에 갔더니 집에 책 두 권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천주실의』이고 하나는 『칠극』이었습니다. 그 절목에 십계와 칠극이 있었는데 매우 간략하고 준행하기 쉬웠으므로 그 두 책을 빌려 소매에 넣고 고향집으로 돌아와 베껴 두고 그 책은 돌려주었습니다.”라고 하였다.

 

한편 김범우는 아우 현우(마태오)와 이우(바르나바)에게도 교리를 가르쳐 입교시켰으며, 스스로도 교리를 철저히 실천했다. 그뿐만 아니라 자신의 집을 신자들의 모임 장소로 제공하여 ‘명례방 공동체’가 탄생하도록 했다. 1785년 이곳에서 한국 교회의 첫 공식 박해로 기록되는 이른바 ‘을사추조적발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이 일어난다.

 

『사학징의』 권2 부록인 「형조의 을사년 봄 공문」을 보면, “을사년 봄에 본 형조판서 김화진이 차대한 뒤에 출근하였다. 중인 김범우가 서학을 받들어 봉행하므로 붙잡아다가 캐물었더니 김범우는 생각해 보아도 서학에는 좋은 내용이 많다. 그릇된 점이 있음을 알지 못하겠다.”고 했다.

 

김범우가 투옥되어 형벌로 배교를 강요당한다는 사실을 전해들은 권일신은 아들과 이윤하, 이총억 등과 함께 추조판서 앞에 나가 압수한 성상(聖像)을 돌려주고 김범우와 함께 자신들도 처벌해 달라고 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기어이 김범우는 유배되었고, 가지고 있던 책자는 모두 추조 뜰에서 소각되었다.

 

그가 유배 생활을 하면서도 공공연히 신앙을 실천하며 전교하였음은 『시복 자료집』에 언급된 여러 기록을 통해 잘 알 수 있다. 김범우는 1786년 가을(혹은 1787년 초) 형벌의 여독으로 쇠약해져 하느님에게 자신의 영혼을 바쳤다. 한국 천주교회의 첫 희생자가 된 것이다.

 

 

투철한 신앙을 증명하는 기록들

 

『시복 자료집』에 따르면, 김범우에 대한 정부 기록은 『정조실록』, 『추안 및 국안』, 『사학징의』에 남아 있다. 또한 교회 기록은 다블뤼 주교의 『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과 『조선 순교사 비망기』 그리고 「1789년 북경 교회의 구베아 주교가 사천 대목구장 생 마르탱 디디에 주교에게 보낸 8월 15일자 편지」가 대표적이다. 특히 구베아 주교의 친필 편지는 바티칸 인류복음화성 문서고에 소장되어 있는데, 지난해 바티칸에서 열린 한국 천주교회 역사 특별전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에 전시되어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한편 천주교를 반대하는 조선의 유생들이 지은 글을 수록한 『벽위편』(이기경 저, 이만채 편)에도 김범우의 기록이 있다. 천주교를 사교로 배척하고 박해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해 편찬된 이 책에는 천주교를 공격한 최초의 공적 문서인 1785년 음력 3월에 작성한 「통문」도 실려 있다.

 

김범우에게 교리를 배우고 입교한 동생 현우는 그들 삼형제가 교리를 배울 때는 주문모 신부도 없었고, 맏형이 정배되어 죽은 후에는 집안에서 몰래 경문을 외웠다고 증언했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체포된 두 형제 가운데 현우는 서소문밖 형장에서 참수로, 이우는 포도청에서 장사로 순교했으며 지난 2014년 두 분은 시복되었다.

 

진정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썩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으니, 그들의 피 흘림 덕에 감히 오늘 우리의 믿음이 있다고 증언할 수 있겠다.

 

[평신도, 2018년 여름호(VOL.60), 정리 송란희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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