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9일 (금)
(백) 부활 제3주간 금요일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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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부] 성 아우구스티노의 행복으로 가는 길: 하느님을 소유한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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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6-04 ㅣ No.485

[성 아우구스티노의 행복으로 가는 길] 하느님을 소유한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인간의 행복 추구는 창조와 밀접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아우구스티노의 고백은 인간이 하느님과의 관계 또는 친교 없이 완성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드러냅니다. “주님, 당신 위해 우리를 내시었으니 당신 안에 쉬기까지 우리 마음은 불안하나이다”(《고백록》 1권 1장). 이는 하느님께서 ‘인간이 하느님을 향하도록, 향유하도록 만드셨다’는 말입니다. 인간의 마음, 곧 인간의 가장 깊은 부분이 하느님과 관계를 맺기 위해 그분께 자신을 개방하도록 창조되었기에, 그분과 온전히 일치하기 전까지 충만한 완성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인간은 하느님을 찾고 하느님과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인간은 하느님을 향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어린 시절 제가 동네에서 놀고 있으면 어른들은 저를 ‘변종찬’이라는 이름 대신 ‘누구네 아들’이라고 불렀습니다. 저를 보며 제 부모님을 연상한 것이지요. 또 우리가 그림을 볼 때, 어떤 그림은 화가가 누구인지 이름을 보지 않아도 ‘아, 이건 누가 그렸겠다’ 하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그림에서 화가의 화풍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인간이 하느님의 모습대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에서 인간의 고귀함을 봅니다. 인간의 고귀함은 하느님을 인식하고 사랑함으로써 하느님과 일치되어 살아가는 가능성에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은 하느님께 참여함으로써 하느님과 만나는 장소요, 그분과 일치하는 장소’입니다. 중요한 것은, 인간이 지니고 있는 모상성은 그것을 새겨 주신 분께 나아가지 않으면 보존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곧 하느님의 모상은 한 곳에 정적으로 머무르지 않고, 하느님을 향해 역동적으로 움직일 때 참으로 존재할 수 있습니다.

 

“당신 안에 쉬기까지 우리 마음은 불안하나이다”라는 고백은 인간이 하느님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알려 줍니다. 결국 행복해지려면 하느님을 소유해야 하며, 오직 하느님만이 인간의 영혼을 충족시키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 안에서가 아니면 안식을 찾을 수 없는 인간의 불안함을 아우구스티노는 다음과 같이 상징적으로 표현합니다.

 

“물체는 제 무게 따라 제자리로 기울고, 무게란 밑으로 미는 것만이 아니요, 제자리로 기우는 것. 불은 위로 당기고, 돌은 아래로, 저마다 제 무게로 움직이고, 제자리를 찾는 것. 물속에 버린 기름은 물 위로 떠오르고, 기름 위에 던진 물은 기름 아래로 잠기니 저마다 제 무게로 움직이고, 제자리를 찾는 것입니다. 질서 없는 곳에 불안이 있고, 질서가 있으면 곧 평온이 있습니다. 나의 무게는 나의 사랑, 어디로 이끌든지 그리로 내가 가옵니다”(《고백록》 13권 9장).

 

모든 사물은 다 자기 무게를 갖고 있습니다. 그 무게에 따라 어떤 것은 아래로 어떤 것은 위로 제자리를 찾아갑니다. 만약 연기가 아래로 내려간다면? 돌을 떨어뜨렸는데 하늘로 올라간다면? 황당한 일이지요. 이렇게 제자리를 찾아가지 못하는 상황이 질서가 깨진 상태, 곧 불안한 상태입니다.

 

아우구스티노가 ‘나의 사랑은 나의 무게’라고 말한 것은, 내가 사랑하는 대상으로 나아간다는 의미입니다. 그는 또 사랑하는 주체와 사랑받는 대상 사이에 있는 사랑을 일치시킵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사랑하면 하느님이 되지만, 땅을 사랑하면 땅이 됩니다. 나의 사랑이 그것으로 향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느님의 모습대로 창조된 인간은 하느님께 나아갈 수밖에 없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기에 아우구스티노는 “당신 안에 쉬기까지 불안하나이다”고 말합니다.

 

‘존재론적 무게’이며 인간의 구성 조건이라 할 수 있는 불안은 결코 결함이 아닙니다. 오히려 긍정의 요소이며, 인간이 본성상 하느님께 자신을 개방하도록 부름을 받았다는 표징입니다. 아우구스티노는 “영혼이 육신의 생명인 것과 같이, 하느님은 영혼의 생명이다”라고 말합니다. 오직 하느님 안에서만 우리의 존재는 죽음을 맛보지 않을 것이고, 우리의 인식은 오류를 알지 못할 것이며, 우리의 사랑은 고통을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신앙인의 삶은 행복으로 가는 영적 여정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는 하느님을 완전히 소유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부활 이후에야 하느님을 온전히 소유하며 끝없는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의 행복은 하느님께 참여함으로써 선취先取된 것이지 완성된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 우리의 행복은 희망에 기초할 수밖에 없습니다.

 

신앙은 인간이 이 세상에서 온전한 행복을 지향하며 살아갈 길을 알려 줍니다. 희망은 목표에 도달할 수 있는 가능성의 문을 열어 주며, 어느 정도 미리 영원한 행복을 맛보게 합니다. 사랑은 목적지로 우리를 움직이게 합니다. 결국 신앙인의 삶은 하느님 안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기 위한 영적 여정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길을 우리에게 먼저 제시해 주셨습니다. 그분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와 같은 모습으로 사셨기 때문에, 우리 역시 그 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영적 여정은 그리스도를 따르고 본받으려는 인간의 노력이요 협력입니다. 이 여정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의 가장 핵심 표현이라고 할 ‘행복 선언’에 따라 사는 것으로 구성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하느님 나라가 이미 현존하기 때문입니다. 그분 자신이 행복에 대한 인간의 열망을 충족해 주시는 분입니다. 더 나아가 그분 스스로 이 행복을 누림으로써 참된 행복을 구현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의 여정은 자신만이 아니라 하느님과 타인을 위해 살아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영적 여정 자체가 마음의 정화와 치유의 여정입니다. 마음에 자리한 이기적 사랑을 줄이고, 일치의 사슬인 사랑을 키워 나가야 합니다.

 

* 변종찬 신부는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에서 교부학과 고대 · 중세 교회사를 가르치면서 학생들과 함께 하늘을 바라보며 산다. 이 글은 ‘하느님께 오르는 사다리 - 진복팔단’이라는 제목의 강의 내용을 편집부에서 재구성한 것이다.

 

[성서와 함께, 2014년 3월호(통권 456호), 변종찬 마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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