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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59: 13세기 (7) 사변적인 영성신학의 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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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1-20 ㅣ No.1096

[전영준 신부의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 (59) 13세기 ⑦ 사변적인 영성신학의 태동


지성 중심의 신학으로 영성생활을 직시하다

 

 

스콜라신학이 절정기에 달한 13세기 서방 교회에서는 지성적이며 사변적인 신학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향후 조직신학이라고 불릴 새로운 신학 체계가 자리를 잡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수도자들이 수도원을 중심으로 수덕 생활을 실천하던 영성생활의 기조를 바꾸어 놓았습니다. 순회 설교 중심이었던 도미니코회는 지성 활동에 더 친숙할 수밖에 없었다고 보더라도 가난을 실천하는 삶이 중심이었던 프란치스코회마저 설립된 지 몇십 년 지나지 않아 지성 중심의 신학 활동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

 


사변적인 영성신학의 가능성을 제시한 토마스 아퀴나스

 

이탈리아 로카세카(Roccasecca) 출신이었던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4/25~1274)는 5세 때 베네딕토회 몬테카시노(Montecassino) 수도원 학교에서 수학했습니다. 1240년 나폴리(Napoli)에서 공부하던 중에 학문 탐구에 매력을 느낀 토마스는 도미니코회에 입회하기로 결심했으나, 가족들의 극심한 반대로 1244년에서야 도미니코회에 입회할 수 있었습니다. 토마스는 1245년부터 파리에서, 그리고 1248년부터 쾰른(Kln)에서 공부했으며, 1252년부터 파리와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에서 강의했습니다. 또한 토마스는 1272년에 나폴리에서 도미니코회 수도원 학교를 설립했으며, 그곳에서 자신의 대표작인 「신학대전(Summa Theologiae)」을 저술했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1274년 제2차 리옹(Lyon) 공의회에 참석하러 가던 도중 포사누오바(Fossanuova)의 시토회 수도원에서 사망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Hipponensis, 354~430)와 위-디오니시우스(Pseudo-Dionysius, ?~500경) 사상 연구를 통해 플라톤(Plato, 기원전 427~347) 철학도 접했던 토마스는 스승 대(大) 알베르투스(Albertus Magnus, 1200~1280)를 통해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기원전 384~322) 철학을 접하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에 매료되었습니다. 따라서 토마스는 저서 「신학대전」에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 체계로 하느님 존재를 증명했습니다. 그런데 토마스는 「신학대전」을 집필하던 중에 자신의 연구가 지푸라기같이 하찮은 것이라는 점을 깨닫는 신비체험을 했습니다.

 

토마스는 「신학대전」 제2권 제1부와 제2부에서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는 인간 활동을 다룬 윤리신학 편에서 오늘날 영성신학이 다루는 주요 주제들을 함께 기술했습니다. 아마도 그 당시에는 윤리신학과 영성신학이 구분되지 않았던 시기였기에 함께 언급했겠지만, 제2권에서 토마스가 제시한 내용들은 오늘날 영성신학의 체계를 구성하는 데에 없어서는 안 될 핵심 주제들이었습니다. 제1부 말미에서 은총론을 다루던 토마스는 인간이 하느님의 부르심에 보다 쉽고 빠르게 응답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조력(助力) 은총’을 언급함으로써 은총을 통한 인간의 성화 과정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즉, 조력 은총은 인간의 의지가 선을 추구할 수 있도록 하느님께서 도와주시는 방법이며, 인간이 선을 완성할 수 있도록 지탱해 주시는 방법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제2부에서 토마스는 ‘향주삼덕’(向主三德)과 ‘사추덕’(四樞德) 등을 설명했습니다. 결국 토마스는 그리스도인의 실천적인 영성생활을 설명하는 사변적인 영성신학을 제시했습니다.

 

보나벤투라.

 

 

사변적인 신비신학을 척도로 제시한 보나벤투라

 

이탈리아 바뇨레지오(Bagnoregio) 출신인 보나벤투라(Bonaventura, 1217/21~1274)는 어린 시절 고향에 있는 바뇨레지오 수도원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1234년부터 파리에서 공부했습니다. 파리 유학 시절, 아시시의 프란치스코(Franciscus Assisiensis, 1182~1226)와 프란치스코회 수도자들의 생활에 감동받은 보나벤투라는 1243년 파리에서 프란치스코회 수도원에 입회했습니다. 신학 학위를 취득했던 1248년부터 파리에서 신학 강의를 하던 보나벤투라는 1257년 프란치스코회 수도회 총장으로 선출되었습니다. 특히 보나벤투라는 구걸할 수 있는 탁발 수도회에 대한 세간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개선하는 데에도 총력을 기울였습니다. 1272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10세(Gregorius PP. X, 재임 1271~1276)는 보나벤투라를 알바노(Albano) 교구장으로 임명하고 추기경으로 서임했습니다. 1274년 보나벤투라는 교황 그레고리우스 10세를 도와 제2차 리옹 공의회에서 활약했으나, 공의회가 끝나기 며칠 전 갑자기 사망했습니다.

 

보나벤투라는 저서 「하느님을 향한 정신적 여행(Itinerarium Mentis in Deum)」과 「세 길(De Triplici Via)」 등에서 인간 영혼이 하느님과 일치하고자 나아가는 상승 여정의 단계 혹은 상태를 독창적으로 설명했습니다. 즉, 우리는 제일 원리를 ‘우리 밖에서(extra nos)’, ‘우리 안에서(intra nos)’, 그리고 ‘우리를 넘어서(supra nos)’ 찾게 되는데, 이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삼중적 실체인 ‘신체적 실체’, ‘영적 실체’, 그리고 ‘신적 실체’와 대응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하느님께 올라갈 수 있는 영혼의 능력은 다시 6단계로 확장되는데, ‘감각’, ‘상상력’, ‘이성’, ‘지성’, ‘예지’, ‘영혼의 절정’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하느님과 일치하고자 하는 영혼은 회개를 통해 의로움을 얻어 ‘정화’되고, 묵상을 통해 학문에 이르러 ‘조명’되며, 관상을 통해 지혜를 얻어 ‘완성’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보나벤투라는 하느님을 인식하는 인식론의 방법으로 사변적인 신비신학을 제시했으며, 그의 신비신학은 이후 신비신학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또 보나벤투라는 프란치스코의 신비체험을 연구하는 후대 신비신학자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프란치스코 전기 작품으로는 그의 시성을 준비하면서 서둘러 출판된 몇 개의 사본이 있었습니다. 그러한 전기 작품들은 비정상적인 신비 현상의 관점에서 프란치스코의 신비체험을 다루었습니다. 1260년 프란치스코회 총회를 통해 프란치스코 전기 집필을 위탁받은 보나벤투라는 「성 프란치스코 대전기(Legenda Major Sancti Francisci)」에서 프란치스코의 생애를 정화, 조명, 완성의 길로 구분해 제시함으로써 프란치스코의 삶 전체를 신비체험으로 바라보았습니다. 결국 오늘날까지 프란치스코의 신비체험을 연구하는 많은 신비신학자들이 이러한 관점에서 연구하는 방법론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지성 중심적이고 분석적인 관점에서 연구함으로써 수덕 생활마저도 은총 작용의 단계를 세밀하게 구분하며 사변적인 영성신학의 가능성을 제시했습니다. 이에 반해 보나벤투라는 의지 중심적이고 신비적인 관점에서 연구함으로써 모든 영성 생활을 사변적인 신비신학의 범주 안에서 해석했습니다. 따라서 이들의 연구 활동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체험을 너무 앞세운 영성생활을 차분히 이해하게 하는 토대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가톨릭평화신문, 2018년 1월 21일, 전영준 신부(가톨릭대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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